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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직 교수와 학자 등 지식인 720여명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나섰다. 스스로의 색깔을 중도보수라고 밝힌 <선진화 국민회의>라는 모임을 모태로 해서 만들어진 성명서인 듯하다.
그 모임을 주도하는 면면을 살펴보니 ‘중도’이기보다는 그냥 ‘건전한’보수라고 했어야 더 그럴듯한 포장이었다. 아니면 속내를 그대로 들어내서 ‘보수 수구’적 입장이라고 규정했던가.
성명서에 담긴 주장은 조선을 비롯한 보수언론과 보수적 정치집단의 논리를 고스란히 이어 받고 있다. 성명서에 참여한 이명현 전 문교부장관은 ‘좌파를 진보’로 착각하고 있다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진보 정치란 언설들의 침묵해버린 과정들의 결과, 혹은 침묵해버린 의식의 표현이라고 나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과학, 문학, 종교적인 언표들 혹은 정치적인 언설들이 다른 실천들에 연접되는 하나의 실천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말은 오래 전에 프랑스의 구조주의자 미셀 푸꼬가 <에스프리(Esprit)>란 잡지의 질문에 답한 말 중의 일부이다.
진보 정치에는 자유 민주주의 원리들이 다 들어 있다. 진보정치는 다양한 것의 인정, 변화에 대한 신뢰, 언론의 자유, 획일주의적인 사고에 대한 반대, 인권의 존중, 자유로운 의사의 표현, 각자의 고유한 기능의 자유로운 발휘 등을 표방한다.
이런 기본적인 원칙과 상식을 무시하는 자들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남아 있다. 그들은 변화와 다양성의 인정, 자유로운 정치적 언설을 제약하고 하나의 잣대로만 세상을 재단하고, 자신들의 주장만을 관철하려고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권위를 통해서 억누르려고 하는 자들이다.
그 세력은 민주주의 기본 원리를 무시하는 자들이다. 바로 그들이 오늘 ‘중도 우파’를 표방하면서 작전환수권과 같은 특정한 정책을 특정 이념으로 몰아 부쳐 자신들의 권위 속에서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성만을 획책하고 있다.
메일을 통해 성명서 초안을 받고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성명서가 철학을 공부하고, 사회과학을 공부한 언필칭 ‘지식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로는, 그것도 집단적으로 표출하는 그 발상 자체가 유치하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특정 정치적 사안에 대하여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는 것은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서 자유다. 또 자신의 생각과 다른 정책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민주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지식인이라고 말하면서 그 주장의 논지와 경향성이 특정 정당의 한 여성 국회의원 논리를 그대로 빌렸다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적 기능을 다한 것이 못된다.
오히려 국민간의 의사소통의 불편함과 불안감만을 심어주었을 뿐이다. 나아가 특정 정책을 지지하는 보수 언론들의 <신나는 굿판>을 한판 더 벌려 줌으로써 국민의 올바른 판단을 가로막았을 뿐이다.
성명서를 보면, 나름대로의 비판적 시각이나, 새로운 관점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의 문제를 다룬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의 상투적이고 빈약한 논리를 그대로 표절하고 있을 뿐이다.
(1) 노정권은 안보 문제를 정치화하고 있다. (2) 작전권 환수와 한미연합사 해체는 안보악화와 미일에 군사 종속화할 수 있다. (3) 작전권 환수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아직 우리의 군사 역량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4)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평화체제가 구축될 때까지 논의를 미루자.
요컨대, 이걸 그대로 받아들이면 영원히 전시 작전 통제권을 이어받지 말자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니 이 성명서를 지식인이라는 값싼 이름으로 발표한다는 것조차 부끄러울 뿐이다. 무슨 대안도 있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의 한미군사동맹에 대한 비전이나, 한미관계 발전에 대한 그 어떤 고민의 흔적도 없다.
그렇다고 동북아 국제관계 변화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앞날에 대해 고민한 흔적도 없다.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대치한 이 상황에서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평화적 통일을 위한 지식인의 역할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북한의 미사일과 핵위협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지난 시기 <여의도 관제 데모시절>의 <추억의 목소리>만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시기의 남북한 극단적 대치 속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적 보수적 시각 틀에 안주해서 기득권을 누리겠다는 숨은 의도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미국이 이 문제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 진정 지식인의 시각이란 말인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학자들이 그 정도로 밖에 정치적 식견이 되지 않는가? 미국 정부의 관료들이 <감정적으로> 외교 국방정책을 결정한다니 말이다.
천만에 말이다. 그들과 같이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외교 국방정책을 만드는 나라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누가 진정한 ‘지식인’인가?
이번 성명서를 발표한 자칭 원로, 지식인이라고 말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학술원 회장, 전직 교육부 장관, 전현직 대학 총장, 교수, 변호사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른바 사회 원로로 대접받는 <지식인(Intelligentzia)>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대체로 지적인, 정신적인 능력을 가진 자 혹은 지적인 활동을 하는 계층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이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Intellego에서 왔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 감각적으로 <구별해낸다>, <분별하다>, <지각한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 다음으로 정신적으로 <이해한다>, <파악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결국 지식인(知識人), 지성인(知性人)이란 말은 <분별하면서 파악하는 지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누가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일까?
반드시 확정적 범주를 가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회와 문화의 발전에 따라 이 계층에 속하는 자격과 요건도 달라질 수 있다.
이 정의는 고대나 중세 시절에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정신노동을 하는 학자, 승려, 예술가들에 적합한 정의였겠지만, 오늘과 같이 직업의 귀천이 없어지고,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정의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을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으나, 대중교육이 보편화되고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세계적인 <지성>이 되는 마당에 이 기준도 적합하지 않다.
지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을 들 수 있겠지만, 교사, 교수, 변호사, 의사들이 반드시 <지성인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누가 ‘지식인’이냐보다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을 오히려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지식의 유무보다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다양성과 비판적 사고를 열어 놓고, 실질적으로 사회적 책무와 실천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여기서 중요하게 대두하는 것은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이다. 지식인을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는 자>로 규정하면 동어반복적 지식인에 대한 정의일 수밖에 없다.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말하는 경우에 우리는 도리 없이 <지식인의 실천적 현실참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경우에 자유당의 독재, 5.16 쿠데타 이후의 군사정권 아래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내던지고 스스로 자신의 지식과 논리를 배반하는 자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가까이는 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짓밟고 민중을 학살하고, 민초의 한을 역사에 피 뿌린 채로 정권을 잡았던 군사정권에도 기꺼이 몸과 정신을 내 맡긴 정신 나간 식자층들도 보았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사상과 신념의 일관성을 포기한 자들을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 최소한 그들은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난 역사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 바는,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이 말했듯이 “지식인과 권력층의 밀월은 비열하고, 잔인하고 짧게 끝나고 만다”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박정희 유신 정권에서 헌법을 기초했던 자들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그 동안 지식인들이 현실정치에 뛰어들거나 권력에 참여했을 때 절망으로 끝나고만 예들을 수없이 목격해 왔다. 한 순간에 삶의 경력 동안에 쌓았던 명망이 사라지면서 세속적 비난과 놀림감이 되어버린 <지식인>이라는 자들을, 우리의 현실 속에서 수없이 보아왔다.
미국의 최고의 지성으로 잘 알려진 언어학자 촘스키는 <지식인의 책임>이란 글에서 “지식인의 책임은 진리를 말하고 거짓을 밝히는 데 있다”고 하면서 지식인들이 특히 진리를 전파하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기만>을 폭로해야한다고 했다.
실제로 촘스키는 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에서부터 최근의 이락에서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전쟁 개입에 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지속적으로 미국정부가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감추는 변명과 선전을 지적하면서 미국 정부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런 그의 지식인의 역할과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하면서, 최근의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무책임한 정치적 행태에 대해서도 여전히 비판의 잣대를 들이밀고 있으며, 부시의 이기(二期) 정부 출범한 이후에도 제국주의적 미국의 이상과 허구적 평화관, 네오콘적 시각에 반대하는 지식인의 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지난 시절을 돌아볼 때, 지식인의 바른 현실인식과 비판이 없는 동안에 이 땅에는 권력과 타협하고 출세에 눈먼 어용지식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지식인들을 누가 <사회의 원로>로 대접해 주겠는가? 젊은 사람들이 존경할 대상이 없는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 바로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스스로 만든 함정이 아닌가?
어쨌거나 진보를 표방하는 당장의 정치 현실을 보면서, 우리가 나서야 구국(救國)할 수 있다고 발언하고, 목소리를 높히는 사람들이라면 자신들이 유신시대, 전두환 군사 정권 시절에 무엇을 했던 사람들이었는지를 먼저 고백해야 한다.
촘스키 말대로 <진리를 말하고 정부의 위선과 거짓을 폭로>하는데 실질적으로 행동했던 사람들인가? 아니면 자신의 안위와 가족의 평안만을 생각하면서 이웃을 돌보지 않던 자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교육부 장관 시절에 이 땅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미래희망을 가질 수 있는 교육제도의 근본적 개선을 고민하면서 반성해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진정으로 자신의 학문이 최고였기 때문에 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또 원로로서 대접받는 진정한 자격이 있는지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을까?
행여 그 잘난 학벌과 명문대학에서 가르쳤다는 그 명분만으로 지식인의 대열에 합류하고, 그 대열에 끼인 덕택에 오늘의 이 시점까지 잘 먹고 잘 사는 기득권 세력에 안주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는 자세부터 먼저 챙겨야 할 것이다.
이 땅의 온갖 잘못된 실상이 그들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가진 자들만이 잘 먹고 잘사는 교육구조, 사회구조를 만들어가면서 자신들은 그 속에 안주하고 있는 않은 지를 먼저 반성하라는 것이다.
그런 부정의한 구조를 깨뜨려서 평등하면서도 정의로운 사회구조를 만드는 것을 거부하려는 반동적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자문하는 것이 우선 순서일 것이다.
진리를 밝히고 사회의 등불이 되어야 할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는 것만으로, 사회적 경력만으로 이 나라의 어른으로서 원로인양 폼 잡고 살아가는 <찌질이 보수 수구 세력들>과 자신들이 어떻게 다른지, 그 색깔부터 분명히 드러내야만 한다.
그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을 지식인으로, 지식인의 참된 역할을 다한 사회의 원로로 받아들이고 대접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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