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폭풍의 고부관아 터 그 이후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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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찬(chans0007)등록 2006.09.07 15:54
오늘 날 애환의 소 도읍지로 전락한 고부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부초등학교의 개교기념일은 특이하게도 광복절인 8월 15일 이다.

동학농민혁명을 불러왔던 고부군수 조병갑은 고대사의 화려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중방고사성(中方古沙城)의 땅 고부군을 수탈의 땅으로, 혁명의 땅으로, 변모시켜 혁명이후 고부군의 철저한 쇠락을 불러왔던 장본인이다.

혁명이후 후대 고부군수 안길수와 정룡기 군수의 새로운 고부군 재건을 위한 노력들이 뒤 따랐지만 구한말, 시대적 격동기의 한 복판에 위치했던 고부관아 터는 고대사의 화려했던 영화대신 난(亂)이 발생한 역모(逆謀)의 땅으로 재건되지 못하고 역사와 시대적 격동기를 후대에 알리는 학교로 자리매김 되었다.

고부 초등학교의 역사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다음해인 1906년 8월 15일, 고부군 마지막 군수인 정룡기 군수의 고부관아 순교청(巡校廳)에서의 광화학교로부터 시작된다.

1906년, 정룡기 군수는 기존의 고부군 관아 터 순교청(巡校廳)의 교화(敎化)를 목적으로 했던 순교청의 순기능을 살려 순교청안에 3사람의 학생을 상대로 한 첫 교육을 시작으로 보통교육(普通敎育)의 필요성을 인식한 정 군수가 교육장을 명륜당(明倫堂)으로 이전하며 처음으로 사립 보통학교(普通學敎)가 고부관청에 설립되게 된다.

구한말의 척박했던 교육환경은 나라의 고위관리나 일부 학자들을 주축으로 한 마을 공동체 형태의 훈장(訓長) 1인 체제의 한학위주 교육이 성행하던 시기로 무학자가 많았다.

또한 보통학교 교육조차 일부 특정인들의 추천을 통해서 면접을 거쳐 보통학교에 입학하던 시기였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정룡기 군수가 관아의 순교청을 이용해 보통학교 교육을 실시했던 것은 분명 시대를 앞서 실현한 교육개혁 이자 쇠락하는 고부군을 교육을 통해 살려보자는 나름의 자구책 이였다.

정룡기 군수가 1906년 8월 15일 설립했던 첫 사립(私立) 광화학교(匡和學校)는 2년 후인 1908년 5월,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민족사의 가장 대표적인 매국노 이완용의 신교육 제3기 확장 방침의 교지에타라 공립(公立) 고부보통학교(古阜普通學校)로 확장되며 오늘 날 고부 초등학교가 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로 인해 고부군 관아 터는 학교로의 확장과 함께 더욱 좁아졌고, 1911년 고부보통학교의 13명의 1회 졸업생 배출 이후,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애환의 고부군 관청은 사라지고 정룡기 군수의 군수와 교장을 오가던 겸직 업무도 공립 고부보통학교 교장만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일제 강점기의 혼란과 격동기속에서 화려했던 고부군의 관청은 사라졌지만 그곳을 관장하던 정룡기 군수는 사라져 가는 고부관아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학생들에 가슴과 기억에 담아 교육 혼으로 키워냈다.

이러한 시대적 격동기를 거쳐 오늘 날 학교로 정착된 고부관아 터가 지난 8월 15일인 개교 100주년을 맞아 화려한 기념식을 치렀다.

구한말 시대적 격동기를 불러왔던 고부관아 터는 학교로의 정착 99년을 맞는 지난 2005년 6월 3일, 다시 전라북도부터 도 지정 ‘고부관아 터 기념물’로 지정됨에 따라 다시 학교가 이전하고 고부관아 터가 복원될 예정이다.

혹여 과거 고부관아 터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공립 고부보통학교 30회(1940년) 졸업생이던 은성림(81, 정읍 상동거주)씨를 만났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옛 고부관아 터의 모습은 대부분 남아있지 않았고 객사를 비롯한 건축물들이 일부 남아있긴 했지만 학교 건물과 달리 방치되어 있어 흉물스럽게만 보였다.”라고 회고했다.

학교 이전계획을 진행 중인 현 고부초등학교 안성 교장을 찾았다. “조병갑 이후 안길수 군수를 비롯해 정룡기 군수 등이 고부를 부흥시키고자 노력했지만 일제 강점기 속에서 그분들의 노력은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들에 의해 뜻이 펼쳐지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관아 터가 학교로 남아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라면 다행 입니다.”라고 전했다.

(고부 보통학교 초기의 학군지역은 그때까지만 해도 과거 고부군의 관활 지역에 있던 인근의 영원과 덕천, 이평, 소성, 정토(정우면), 백산, 주산, 부령, 행안, 산내(현 부안) 일대의 학생들이 주류를 이뤘다.

고부초등학교에 소장돼 있는 학교 연혁지에 따르면 정룡기 군수가 초기 학교장이던 강화학교의 학생들과 공립 고부보통학교 학생들을 합해 1911년 졸업했던 최초 졸업생은 11명이며 학급 수는 3개 반에 학생 153명, 교직원 4명으로 1명이 서무와 교직을 겸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후 공립 고부보통학교는 해방을 전후로 한때 학생 수가 1,780명에 이르는 큰 학교로 성장되었다가 1949년 인근 관청의 운룡국민학교로 학생수가 분리되고 1950년 6.25 이후 학생 수가 390여명에 이르는 감소 추세를 보였다.

그러던 학생수는 1971년에는 자체학생수만 1,297명에 이르는 거대학교로 다시 성장 했다가 1976년 이후부터 다시 감소추세로 돌아서 1988년 약 400여명의 학생 수가 유지되다가 최근 2006년 통계로 학생 수 102명 선이 유지되는 소학교로 변해있다.

하지만 오늘 날 고부초등학교를 실존케 했던 초대 학교장이자 고부의 마지막 군수인 정룡기 선생이 설립했던 고부초등학교는 지난해 2005년 2월, 96회까지 8,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해낸 저력의 학교로 기억되고 있다.)

파란의 구한말을 장식했던 애환의 소 도읍지 고부의 역사를 고스란히 가진 한 고부초등학교가 100년 후 다시금 옛 고부군 관아 터의 복원과 함께 100년의 학교 역사를 이전할 계획이지만 고부군 마지막 군수이자 고부 초 정룡기 초대교장에 의해 심어진 구한말의 역사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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