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보도연맹 가입원서 ⓒ 학살규명범국민위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부가 1948년 여순사건을 계기로 좌익혐의자들을 일률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관변단체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당국은 보도연맹원들을 선량한 국민으로 받아들이겠다던 구호와는 달리 여전히 북한에 동조할 수 있는 위험세력으로 보고 경찰과 군, 우익단체 등을 동원, 예비검속한 후 전국에 걸쳐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보도연맹원의 상당수는 좌익 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이지만 좌익과 무관한 사람들도 있었다.
국민보도연맹 피살자 규모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경찰청 전산자료를 통해 6.25 당시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처형자가 17,716명임을 확인했다. 이중 보도연맹원으로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3,593명이었다. 처형 주체로는 군경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전쟁기에 무단 처형된 사람들에 대한 자료는 후에 신원조사에 활용되었다.
경찰청 과거사위는 발표문의 말미에서 “국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인권을 보호해야만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고, 그 책무는 급박한 전시상황이라 하여 달라지지 않음에도, 국가기관인 경찰과 군이 적법한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고 좌익활동 관련자 및 그와 무관한 양민을 학살한 것은 잘못이라 할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만시지탄이지만, 경찰청 과거사위는 경찰청 자료를 통해 보도연맹을 포함한 전쟁기 무단 처형의 실체를 일부나마 확인하고 그 책임도 군경에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국가기관 최초로 보도연맹 학살의혹을 사실로 확인하면서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 1950년 7월 초, 대전 산내 학살 ⓒ 학살규명범국민위
그러나 경찰청 과거사위의 중간조사결과는 보도연맹을 비롯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이라는 빙산의 일각을 살짝 건드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경찰청이 소장하고 있는 전산자료를 검토하고 경북 청도의 보도연맹 유족들과 몇몇 경찰 관계자를 만나 사실을 일부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이번 조사결과는 보도연맹에 대한 본격적인 사건조사라기보다는 한국전쟁기 민간인 피살자에 관한 경찰 전산기록 검토보고에 가깝다.
자료조사 측면만 보아도 1950년 7월 8일 계엄 발령 후에는 경찰이 군의 지휘를 받았고 미군 투입 후에는 작전통제권이 미군에 넘어갔으므로 경찰보다는 군과 미국 측에 귀중한 자료들이 더 많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고 신원조회 관련기록은 정보기관에 더 많을 수도 있다. 경찰 자료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또한 피해자와 목격자, 책임자, 관련자를 조사하는 현지조사 측면에서는 더욱 취약하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는 지금까지 문서와 증언을 통해 전국의 79개 시군에서 약 6만 명의 보도연맹 피살자가 있었음을 확인했고, 한강 이남의 거의 모든 시군에서 학살이 이루어졌으니 보도연맹원 피학살자의 총수가 20만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한다. 경찰청 과거사위는 사건이 확인된 지역들에 일일이 접근할 엄두도 못 냈다. 조사관 1-2명이 1-2년 들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1951년 대구 인근에서의 학살 ⓒ 학살규명범국민위
▲ 1951년 대구 인근에서의 학살 ⓒ 학살규명범국민위
이제 공은 법에 의해 과거사 진실규명의 임무를 부여받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이하 ‘진실화해위’)로 넘어갔다. 지금 위원회의 진실규명 신청 접수창구에는 전국의 약 90개 시군에서 보도연맹 사건 조사신청이 들어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보도연맹에 대한 본격 조사에는 아직 착수도 못하고 있다. 전국에 걸쳐 발생한 보도연맹 학살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자면 현지 조사팀 몇 개에다 종합조사팀까지 가동돼야 하는데, 위원회에 그럴 인력이 없기 때문이다.
▲ 2006년 9월 12일,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중인 채의진 문경 석달마을 학살 유족 ⓒ 학살규명범국민위
▲ 2006년 9월 14일, 진실화해위원회 앞에서 1인 시위 중인 이창근 익산역 폭격 유족 ⓒ 학살규명범국민위
참고로 진실화해위 내의 민간인학살 조사인력은 40여 명인데, 이 인원이 보도연맹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미군 폭격 사건, 부역혐의 학살, 빨치산 토벌전 과정에서 일어난 학살, 형무소 재소자 학살, 여순사건, 대구 10.1사건 등에다 인민군이나 좌익에 의한 학살까지 모두 조사해야 한다. 학살규명 범국민위에서는 진실화해위의 존속 기간 4년 또는 2년 연장할 경우 6년 내에 이 사건들을 모두 조사할 수 있는 팀을 꾸리자면, 지방자치체의 협력을 최대한 받는다 해도 최소 130명의 조사관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한 바 있다. 현재의 인력으로는 보도연맹 하나도 제대로 조사할 수 없는 실정인 것이다.
하여, 반세기 이상의 세월 동안 말 못하고 냉가슴만 앓아온 피학살자 유족들이 드디어 행동에 나섰다. 전국유족협의회의 유족회원들은 지난 9월 11일 충무로의 진실화해위 앞에서 “조사인력 증원, 위원회 확대개편, 신속철저하고 전면적인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결의대회를 갖고 송기인 위원장을 찾았다. 유족들은 위원장의 12월 추진 약속에 내년은 너무 불투명한 시기이고 그러다간 4년 금방 간다면서 지금 즉시 조사인력 증원계획을 추진할 것을 주문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 2006년 9월 11일, 진실화해위 확대개편 촉구 전국유족결의대회 ⓒ 학살규명범국민위
오늘로 8일째를 맞는 유족 농성단의 심정은 절박하다. 정부가 반백 년도 더 넘긴 지금에 와서야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며 진상조사에 나서는 마당에, 유족들을 또 다시 죽이진 말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기에 유족들의 부모형제자매들을 불법 학살했고, 진실을 알고자 하는 유족들의 요구를 번번이 압살함으로써 유족들을 여러 번 죽여왔다.
유족들은 이구동성으로 지난해 5월 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통과됐을 때가 생애에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고 말한다. 이제야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는 기분이었단다. 그런데 현 인력으로는 이미 사건 수로 500건을 넘긴 수많은 사건들의 조사에는 착수조차도 못하고 설령 착수한다 해도 조사결과가 부실하거나 사건이 축소 왜곡될 게 뻔하니, 이러다간 유족들을 또 한 번 죽이는 결과를 내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기쁨과 희망이 또 다시 분노와 절망으로 변하는 날, 그 날은 대한민국이 재탄생할 절호의 기회를 잃고 다시 헤어날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날이 될 것이다.
▲ 2006년 9월 11일, 진실화해위 확대개편 촉구 농성중인 유족 ⓒ 학살규명범국민위
▲ 2006년 9월 14일, 진실화해위 위원실에서 농성중인 유족들 ⓒ 학살규명범국민위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때다. 전쟁기에 국가권력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법적으로 죽이고 남은 이들에게 재갈을 물림으로써 사람들한테서 사람다움을 뺏어갔다. 사람들한테서 사람다움을 뺏어간 국가폭력의 진실을 밝히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지 못하는 한, 사람은 결코 꽃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
이춘열(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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