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구려의 역사지킴이 -

-광개통왕비 건립하고 제사지낸 임순형씨 -

검토 완료

김영진(yjk6377)등록 2006.10.16 12:08

인사를 하는 임순형씨 ⓒ 김영진


제례 지내는 모습 ⓒ 김영진


“‘광개토대왕비’ 앞에 서는 순간 가슴이 얼어붙고 발이 그 자리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그 기상에 압도된 마음하나로 광개토대왕비를 제작하자고 마음먹고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을 시작했다. 지난 29일 자신이 경영하는 원당 ‘너른마당’ 식당 큰마당에서 광개토대왕 추모제를 연 임순형씨(51),
단군제례 형식에 맞춰 의식를 올리고 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계승자인 하얼빈동포 무용가 서인숙씨(27)가 광개토대왕의 혼백을 기리는 살풀이 춤을 추는 한마당이 열렸다. 고구려 기마의 기마민족의 기상을 담은 ‘마상무예’와 택견시범도 펼쳐졌다. 디지털 영상복원전문가 박진호씨가 복원한 고구려 고분벽화도 대형현수막에 인화해서 걸렸다. 역사지킴이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저 열심히 살아가던 그가 광개토대왕비에 매료된 사연은 간단하다. 역사탐방을 갔다가 처음 만나게 된 광개토대왕비를 대하던 감동을 그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우연한 역사탐방의 기회에 만나게 된 고구려와의 인연을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될 사명의식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6대째 원흥리 지금의 농협대 입구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지금의 ‘너른마당’식당은 그야말로 자신의 젊음이 고스란히 배여있는 삶터이다. 이곳에 5년여간 우여곡절을 겪으며 중국에서 원형 그대로 제작한 광개토대왕비를 2004년 어렵게 실어다 모셨다. 광개토대왕비를 그래로 본뜬 거대한 비석(높이6.39m,넓이 1.5m, 무게47t)은 너른마당 한 가운데 우뚝서서 우리민족의 기상을 위엄있게 나타내고 있다.
일찍이 고구려 개국신화에 나타난 추손왕(지금의 주몽)의 17대손이며 18세대 왕위에 등극했던 광개토대왕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실 때까지 많은 업적을 남긴 바는 역사에 그려져 있는 그대로이다. 그가 제작한 광개토대왕비에는 만주 에 그대로 남아 있는 원형비석에 있는 대로 광개토대왕의 출생부터 업적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새겨져 있고 원래의 비에 있는 것처럼 능과 비석들의 관리에까지 자손만대에 이르는 보존을 명하신 내용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2천키로를 단 걸음에 달려간 고구려에 대한 열정
광개토대왕비를 그대로 복원하자고 마음을 다잡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2천키로가 넘는 거리를 밤새워23시간을 꼬박 달려가는 것에서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석공10여명이 매달려 5년여 가까이의 긴 세월을 작업했던 일이니만큼 제작과정도 쉽지 않았다. 달아 없어진 부분이나 깨진 곳등 원형 그대로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정교한 기술을 자랑하는 석공들을 썼지만 2번이나 돌이 깨지는등 시행착오를 거쳐서야 완성되었다.
하루이틀에 걸쳐 완성되는 일이 아니다보니 무엇보다도 가족들의 이해와 협조가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부인의 역할은 말할 것도 없었고 아들과 딸은 이런 아버지의 기질을 닮아서인지 아직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이해하고 협조하며 벌써 각자 독립해서 그야말로 장사꾼의 기질을 발휘해 주고 있다.
그는 그렇게 만대를 내다보고자 했던 대왕의 미래관이 고작 300년도 가지 못했던 역사의 아픔을 안고 있는 것을 지금에라도 그 기상을 바로 이어받아 우리역사가 얼마나 찬란하고 위상이 있었는가를 올바르게 알려 대왕님의 혼백을 편히 모시고 싶었다고 한다.
“흔히들 사재를 턴다고 표현하는데 저는 그런 표현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그저 이일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개성상인 임씨(여기서 임순형씨는 자신이 개성상인의 피를 이어받은 최고의 장사꾼이 되고 싶다고 했다.)의 피를 이어받은 자신이 꼭 해야 할일이라고 생각했단다. 긴 기간동안 쉽지않은 일에 얼마나 커다란 비용이 들었을까 궁금해하며 던지는 질문에 그는 자신이 꼭 해야 할일에 돈으로 어떻게 가치를 정하겠느냐고 되묻는다.
그래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덴테 어땠냐고 하니 5년이 다되는 긴 시간과의 싸움이었으니 무슨일이 없었겠냐며 그제서야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털어 놓는다.
한번은 길림성에서 허브웨이성까지 200Km가 넘는 거리를 밤새워 달리는 자동차 속에서 현지에서 차를 사고 운전자를 사서 작업장까지 가야하는데 밤샘운전에 능하다는 운전자가 잠깐의 실수도 차가 전복되어 그야말로 타지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뻔한 일도 있었고 항상 일이 진행되는만큼 맞춰서 돈이 준비되어 있는건 아니었기에 백두산에서 피라미를 잡아먹으며 끼니를 때운 적도 있었다고.
또 재미있는 일화는 너른광야에 익어가는 곡식을 바라보며 광활한 대지에서 난무하는 중국인들을 부러워 하다가도 세밀하고 야무지지 못한 중국인들을 볼 때면 “그러면 그렇지, 너희가 아무리 뛰어나도 우리 한민족을 따라잡지는 못할거다!”하며 혼자 의기양양 할때도 있었다며 소년처럼 웃는다.
광개토대왕비 건립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에 대한 사랑
이렇게 어찌보면 좌충우돌하며 중국을 넘나든 세월이 5년여, 이제 만주벌 고구려의 기상을 좇아 소신을 펴기 위해서라면 죽을 힘을 다해 온 임씨가 지금 뒤돌아보며 느끼는 건 “무지했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이란다. 아마 지금 다시 이 일을 해내라면 그때처럼 무지막지한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는 조금 의문이란다.
“원래 광개토대왕비에 새겨 있는 9월29은 아마 음력인듯한데 처음엔 그렇게 제를 모시다보니 너무 춥더라구요 그래서 올해는 양력의 의미를 담아 지난 9월29일에 추모제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한다. 원 제를 살려 고기도 생머리고기를 쓰고 각종 제사의 예를 갖추어 지냈단다.
얼마 전에 특수 컴퓨터 기법으로 복원한 고분벽화등도 계속 설치중이다. 그뿐 아니라 고구려의 기상이 그대로 살아있는 ‘중원고구려비’나 ‘백두산 정계비’등도 그대로 제작하여 너른마당 한켠에 복원되어 있다. 특히 원본조차 없어진 ‘백두산 정계비’는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문헌을 뒤져 그대로 복원시키느라 애를 먹었고 통일이 되면 백두산에 그대로 복원시키고 싶어 미리 제작해 두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잇는다.
일차적으로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계속추진해서 고구려 문화공간을 따로 만들고 싶은것이고 “지금 제가 이렇게 하는건 우리민족의 올바른 역사를 지금시대의 우리생활 속에서 조금이라도 뿌리내려보고 싶어서 젖먹던 힘까지 다하고 있지만 정작 올바른 우리역사를 이어가줄 미래의 젊은이들을 양성하고 싶은 게 진짜 욕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짜 장사꾼이 되어 돈도 많이 벌고 싶단다.
어릴적 선생님이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시면 다른 아이들은 대통령이요,법관이요의사요, 했는데 유독 자신은 사장님이 되고 싶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며 그래서 지금 이렇게 돈버는 장삿꾼 ,사장님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장학회를 설립하려면 돈도 많아야 되지않겠냐며 자신의 당찬 꿈을 내비친다.
만주벌 외로운 곳에서 백두산을 바라보고 있던 광개토대왕의 외로운 혼백은 이제 그의 가슴에서 다시 환생하여 ‘너른마당’의 뜰을 찾는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민족 모두의 가슴에서 고구려의 기상으로 살아 움직일 것이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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