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히 도발적인 제목이다. '범죄국가, 북한' 까지는 쉽게 수긍이 가는데 '범죄 국가, 미국'이라니 대한민국에서 보수임을 자처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 책의 불경스러운 제목에 분노(?)해 마지 않을 것 같다.
북한은 지난 50년 동안 미국의 핵 위협 속에서 살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최근까지 미국은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즉각적인 배치와 사용이 가능한 핵무기를 남한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 핵무기가 북한을 겨냥하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의 핵 위협에 50년간 시달려온 북한으로서는 생존을 위해 자신들도 핵을 소유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결론 도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는 핵에 대한 미국의 태도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도덕적 정당성마저 갖게 된다. NPT 가입을 거부하고 핵의 비확산 발상에 코웃음치고 있는 이스라엘의 거대한 핵 병기고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은 채, 북한이나 이란과 같은 나라의 핵발전소에 대해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미국의 이중적 행태는 이미 도덕적 균형을 상실하고 있다. 핵 문제에 있어서 자기 입맛에 따라 일관성 없이 원칙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과 ABM조약(탄도 미사일을 제한하는 조약)과 생물 무기 협약과 국제 형사법원(ICC)과 지구 온난화에 대한 교토 협약 등에서 탈퇴한 상태다. 자신은 국제 조약들을 입맛에 따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면서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조약의 엄격한 준수를 강요하고 있는 꼴이다. 제 3자가 보기에는 깡패짓이나 마찬가지다.
국가적 자질을 갖고 보더라도 미국이 북한보다 나을 게 별로 없어 보인다. 북한은 미국과 달리 (한국전쟁 이후에) 공격적인 전쟁을 벌이거나,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거나, 핵무기로 이웃나라를 위협한 적이 없다. 물론 북한이 자국민의 권리를 짓밟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북한 죄수들이 당하는 고통과 인권의 부정이 (미국이 관장하고 있는)아브 그라이브나 관타나모의 죄수들이 당하는 것보다 더 중하다고 할 수도 없으며, 북한의 인구 대비 구금자 비율 또한, 2백10만명(0.7%)이 구금 상태인 (특히 흑인과 빈곤 계층의 구금자 숫자가 극히 비정상적으로 많은) 미국의 경우보다 높다고 할 수도 없다.
북한에 의해 저질러진 일본인 피랍자의 인권침해에 대해 백악관이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지만, 미국 CIA가 비밀리에 전 세계에서 납치해, 어떤 법의 손길도 미치지 않는 곳에 건설된 강제 수용소에 감금한 채 행한 인권 침해에 대해서 언급한 사례는 없었다.
2002년 북한은 미국에 의해 악의 축으로 규정되었다. 사실 서구 사회가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이미지(잔인하고 상식을 넘어선 나라)는 한국 전쟁에서 기원하고 있다. 1950년 한국 전쟁을 시작한 쪽은 김일성이었다. 그러나 이승만도 그 이전 자주 침공을 위협한 바 있으며, 1949년에는 북한의 방어 태세를 시험하기 위해 월경 기습을 감행하기도 했다. 당시 통일을 위한 이승만의 북진 요구는 나날이 거세어 졌으며, 그의 군대도 기습의 강도를 높여 갔다. 그는 사흘 안에 북의 수도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중앙정보부는 이승만을 '아무도 의지를 꺽지 못할 고집불통' 혹은 '노망난 늙은이' 정도로 생각했고, 영국 대사관은 그를 '위험스러운 파시스트 나 정신이상자' 로 간주하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이 취한 최초의 행동은 정치범에 대한 처형 명령이었다. 하지만 이 행위는 훗날 적절한 과정을 거쳐 북한군의 잔학 행위 탓으로 돌려졌다. 비밀 해제된 미국 문서는 2천명 이상의 정치범들이 전쟁 초기 몇 주간 재판 없이 처형된 것으로 밝히고 있다. 당시 서울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이었으며 훗날 유명한 한국사가가 된 그레고리 핸더슨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0만명 이상이 재판 또는 영장 없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 말기 미국 군의 공식 보고는 북한 잔학 행위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가 7천 3백 34명이며 이중 극히 일부만 전쟁 초기 국면에서 이승만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대북 비난 논거의 핵심이 되었다. 전쟁 학살에 대한 미군 당국의 보고는, 생생한 사진까지 곁들여 1953년 10월 전세계에서 간행되었다. 북한이 광적이며 잔인하다는 이미지는 상당 부분 이 보고에서부터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런던 <옵저버>지의 특파원이었던 필립 딘이 프랑스 신부인 카다르로부터 전해들은 정보(공산군에게 함락되기 직전 대전에서의 학살)는 달랐다. 카다르 신부는 미국인들이 대전에서 철수하기 직전, 남한 경찰이 교회 부근의 숲을 모두 쳐내고 죄수 1천 7백명 가량을 수용했는데 모두 트럭에 실려 왔다고 했다. 이 죄수들은 바깥으로 나가 긴 참호를 파도록 명령받았다. 카다르 신부 자신이 그것을 보았고 미군 장교 몇몇도 지켜보았다.
참호 파기가 어느 정도 끝나자 남한 경찰들이 죄수들의 절반 정도를 쏘아 총살하곤 남은 사람들에게 시체를 묻도록 명령했다. 카다르 신부의 만류가 저지된 뒤, 남은 죄수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되었다. 신부는 그 죄수들이 '대전 형무소에서 반란을 일으킨 공산 게릴라' 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전쟁 초기 남쪽에서 행해졌다던 북한의 잔학 행위가 실제로는 한국이 저지른 소행이었던 것이다. (한 보고에 의하면 대전 지역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총수는 대전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빨치산 출신을 포함해 약 7천명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 대사관 소속 무관 밥 에드워즈 중령도 이 사실을 워싱턴의 정보 당국에 사진과 함께 보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학살 희생자는 모두 1천 8백명으로 한국군에게 분명히 책임이 있으며, 처형 명령은 '최상부'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 당시로부터 1953년까지의 사이 어느 시점에 누군가 -군당국이나 정부관계자 - 이 사건을, 전쟁 중에 북한이 저지른 최악의 잔학 행위로 둔갑시키도록 의도한 것 같다. 하지만 전쟁 초기에 행해진 최악의 잔학 행위는 사실 유엔군에 속한 측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었으며, 그 행위의 책임을 북한이라는 적에게 돌림으로써 그 사실을 은폐하려는 음모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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