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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아직 새벽 6시도 안됬다. 잠은 충분히 잔 것 같으므로 가이드북을 펴고 오늘
일정을 잡아 본다. 버스가 오후 8시에 출발하니 델리의 유적지 몇군데는 둘러 볼수 있다.
그나마 덜더운 아침시간에 개장시간이 Sunrise-Sunset라는 붉은성에 다녀오고, 오후에는 오가는데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꾸릅미나르에 가 봐야겠다. B.C.2500년부터 현대까지 화장실 관련 물품을 전시해놨다는 '화장실박물관'과 85개국 6500개의 인형이 전시되있다는
'인형박물관'도 흥미를 끈다.
@BRI@
돌아다니다 보면 체크아웃시간인 낮12시에 맞춰 들어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시간
연장을 해놓고 가야겠다. 배낭을 프런트나 한국식당에 맡겨놓고 다녀도 되지만, 하루종일 땀에 쩔은 몸으로 다시 밤새 버스를 타고 간다는건 무리다. 샤워하고 옷갈아 입고 버스를
타야한다.
프런트에 내려가서 오후 6시에 체크아웃하겠다니까 (예상대로) 하루숙박비를 더 내란다.
그동안 꽁짜라서 신경도 안썼던 숙박비를 물어본다. 250Rs. 5000원 정도. 싸군. 하지만
달라는 대로 다 주는건 배낭여행자의 길이 아니다. 수첩과 볼펜을 꺼내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안에 숫자을 써넣어 시계모양을 만든다. 하루는 24시간, 정오부터 오후6시까지는 6시간, 6 = 24/4, 하루의 1/4을 더 사용하는데 하루요금을 다 내라는건 말이 안되잖아?
내가 큰맘먹고 100Rs나 낼께. 게다가 넌 저녁에 방을 또 팔수도 있잖아?
이 심오한(?) 커뮤니케이션을 외국어(영어)로 시도하는건 내게 불리하다. 동그라미 하나와 아라비아 숫자 몇개 그리고 지극히 우호적인 미소로 의사전달이 완벽하게 된듯, 잘생긴 인도총각이 할수없다는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OK~"한다. 그제서야 나도 유창한(??)영어로 "Thank you~"한다. 2000원 정도의 돈으로 하루종일 배낭 무게에서 벗어나고, 저녁에
샤워하고 옷도 갈아 입을수 있게 됬으니 "땡땡큐~"다.
아직 한적한 거리에 다행히 오토릭샤가 한 대가 나와 있다. Early bird catches the worm
이란 속담을 생각하며 ,부지런한 릭샤꾼과 가격협상에 들어간다, 다행히 영어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유창하다.
나 : 붉은성까지 얼마?
그 : 100Rs
나 : 왕복아니고 그냥 가기만 할껀데?
그 : 혼자 올수 있어?
나 : 물론이지~(조금 겁은 나지만, 어떻게 되겠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부담스럽다)
그 : 그럼 50Rs
나 : (일단 좀 깍아본다.) 40Rs면 간다던데...
그 : (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누가 그래??
나 : (약간 기가 죽어서..) 가이드북
그 : (더욱 기가 살아서..) 무슨 책인데?
나 : (자신있게) Lonely planet!!
그 : (설득조로) 생각해봐..마담...책이란게 조사하고 쓰고 인쇄하고 사고파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 그동안 물가는 계속 오르잖아? 델리는 특히 물가가 매우 빠르게 오
르는 도시야. 책에 써있는대로 여행하려고 하면 안돼. 마담.. 게다가 이 릭샤는 내께
아니야. 매일 임대료를 내야 하고, 기름도 사야 돼. 남는것도 별로 없어. 거긴 멀어서
기름도 많이 들어. 그렇게는 안돼. 그냥 50Rs 줘.
언뜻 들으면 상당히 논리적인것 같지만, 내 책은 2006년 최신판이고, 어제 경험에 비춰볼
때 여기 쓰여있는 가격은 상당히 세부적이고 현실성있다. 붉은성까지 릭샤요금은 기억안
나지만 거리에 비해 쎄게 부르는걸 알겠는데, 중후한 중년남자가 낡고 좁은 릭샤에 옹색하게 앉아 조근조근 설득하려는 양이 재밌기도하고 안됐기도 해서 더 말 안하고 그냥 탄다.
어제 아침 택시타고 공항 다녀온 길이 주로 넓직한 대로였던 것과는 달리 오늘 아침 릭샤타고 붉은성 가는 길은 좁은 골목길과 복잡한 시장통, 마을 어귀 등을 골고루 지나며 도시의 속살을 드러내 보인다. 벌써 꽤 많은 통행량으로 시끄러운 길가 여기저기에 거적 한쪽 뒤짚어쓰고 자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저들은 언제 일어나 어디서 어떻게 또 하루를 살아
낼까? 익숙해진탓인지 그들을 길가의 가로수 대하듯 무심하게 지나치며 각기 제 하루를
시작하기에 바쁜 사람들..
등교시간과 맞물렸는지 교복차림의 학생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얌전히 버스를 기다
리는 좀 큰 아이들. 사이클릭샤 위에 설치된 닭장같은 통에 실려가는 작다못해 잘디잘은
어린아이들. 아무리 작은 아이들이라 해도 한꺼번에 여나믄명을 태우고 페달을 밟기는
힘이 부치는듯, 릭샤꾼은 자전거를 손으로 밀고 가고 있다. 물론 오토릭샤에 혼자 꼿꼿이
앉아가는 아이도 있고, 어딘가엔 두껍게 선탠된 고급자가용에 실려 학교에 가는 도련님과 아가씨들도 있겠지. 저 아이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바꿔 나갈수 있는 미래의 폭이 얼마나 될까? 그 변화의 가능성이 아무리 작다해도 그 부모들은 오늘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며 하루를 살아내겠지. 때론 자존심과 양심도 팔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릭샤가 천천히 속도를 낮추고 있다. 멀리 붉은성곽이
보여 '다 왔구나~'하며 좋아하는데, 갑자기 도로를 가로막고 있는 바리케이트와 무장한
군인들이 눈에 들어 온다. 놀란 릭샤꾼이 군인들에과 흰두어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Prime minister가 오는 날이라 오늘 이 근처 도로가 모두 봉쇄되서 더이상 못간단다. 나.원.누구는 Bush방문기간과 겹쳐서, 누구는 노무현대통령이 와서 붉은성에 갔다가 헛탕쳤다더니
대통령도 아닌 수상 때문에 구경을 못하고...내가 끕이 가장 낮구나.
할수없지.. 뭐. 크게 섭섭할것도 없다. 서울와서 경복궁에 못들어 가보나고 무슨 큰일나는 것도 아니고, 이른아침 델리 거리구경도 충분히 재미있고 의미있었다. 릭샤꾼이 미안한지 꾸릅미나르까지 가면 지금 요금은 빼주겠다고 가잔다. 솔깃한 제안이지만 거기까지 다녀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텐데, 일행이 되기로 했으니 이제 어느정도 보조를 맞춰야 할 아저씨들에게 아무말도 안하고 나온게 걸려서 그냥 숙소로 돌아온다.
숙소로 돌아와서 아저씨들에게 연락을 취하려니, 아뿔싸~ 방 홋수를 모른다. 프런트에
내려가 Two Korean Men의 방에 전화를 연결해 달라니까, 한국사람이 많이 머물고있다
며 숙박부를 내밀고 이름을 찾아달라는데, 이런..이름도 모른다. 궁여지책으로 'They are old'하니까, 단번에 Oh!하면서 전화를 걸어주는데.. 맞다. 연락이 되서 기쁜게 아니라 어째
입맛이 쓰다. 나또한 old woman으로 분류될테니까.(old & fat 이려나?) 어째튼 20대 초반의 여행자가 주류를 이루는 이 거리에서 우리는 상당히 old하다.
곧 아저씨들이 내려오셔서 같이 아침식사를 하면서 오후에 꾸릅미나르에 다녀올 생각이라니까 같이 가자신다. 결국 아저씨들 방을 아예 체크아웃하고 짐을 모두 내방으로 옮겨놓은후 같이 꾸릅미나르로 출발한다.
비교적 단거리였던 붉은성에 비해 델리 외곽에 있는 꾸릅미나르까지 오토릭샤로 가는 일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넓은 도로를 메운 갖가지 교통수단이 제각기 눌러대는 경적소리가 고막을 찢고,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면 정신없이 비집고 드는 릭샤의 난폭한 운전, 스칠듯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차들. 스릴과 서스펜스 면에서 놀이공원 기구를 훨씬 압도한다.
다른건 몰라도 시끄러운 소리는 정말 견디기 힘들다.
뒷자리에 셋이 나란히 앉아야 해서 가운뎃 자리에 불편하게 끼어 가시던 전라도 아저씨가 갑자기 히죽이 웃으시면서 그런다. "ㅎㅎ.. 내 자리가 젤 좋아~" 아. 그러고보니 가운데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다. 가장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안전벨트도 없이 덜덜 떨며 가고 있는데, 가운뎃 자리에 앉은 사람은 양쪽에 두툼한 인간에어백을 장착하고가는 셈이니...
첫날밤 도로에 싸이드미러 없는 차들이 달리는걸 보고 놀랬는데, 오늘 보니 거의 모든
차에 싸이드미러가 없고 극소수의 싸이드미러 있는 차들도 모두 얌전히 접고 다닌다.
도로상황을 보니 그럴수밖에 없는게 모든 교통수단들이 차선 무시하고 워낙 바싹 붙어서
달리고 끼어들기 때문에 싸이드미러가 있으면 길마다 교통사고가 날 판이다. (나중에 들
으니 인도에서는 자동차 구입시, 싸이드미러가 썬루프처럼 선택사항이란다. 어쩐지..어
떻게 그렇게 흔적없이 깨끗이 띄어냈나? 했다)
별기대 없이 유명하다니까 그냥 한번 가본 꾸릅미나르는 예상외로 무척 아름다와 먼길을
릭샤에 흔들리며 온게 결코 억울하지 않다. 이슬람교가 흰두교를 몰아낸 것을 기념해서
세운 전승탑이라는데, 내 눈에는 상당히 여성적이고 예쁘게만 보인다. 돌로 어떻게 저리
유려한 곡선을 만들었을까?
200여년 동안 여러 대에 걸쳐 완성된 74m높이의 꾸릅미나르 옆에 그보다 더 높은 탑을
세우겠다고 시작했다가 한단 밖에 못쌓고 끝난 탑이 민망하게 서있고, 한때 무척 아름다왔을게 분명한 여러 건축물들의 폐허 위로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할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고
있다. 우산을 양산삼아 쓰고 다녀봤지만 그정도로 막아질 열기가 아니다. 정말 덥다.
꾸릅미나르를 나와 점심은 좀 좋은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Lonely planet은 대부분의 지면을 배낭여행자를 위한 싼 숙소와 음식점에 할애하고 있지만, 군데군데 something special라는 난을 두어, 경험삼아 한번 가볼만한 비싼곳도 소개하고 있다. 하룻밤 숙박비가 1000$가 넘는 궁전호텔같은데야 언감생심 꿈도 안꾸지만, 음식값이 비싸야 얼마나 비싸다고...기분전환상 그런대도 한번 가봐야 한다는 나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책에 나온대로 꾸릅미나르를 나와 왼쪽으로 200m정도 걸어가면 나온다는 하얀건물에 파란대문, Olive Bar &
Kitchen을 찾아간다.
넓직한 정원을 지나니, 데스크의 여직원이 예약하셨냐고 묻는다. '유명하다더니 예약안하면 못들어가나?'하고 내심 쫄아있는데, 실내로 들어가보니 손님이 우리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예약 여부를 확인하는게 황당하기는 하지만, 일단 시원해서 좋다. (나중에 들으니, 식사시간에는 손님이 많아서 예약 안하면 밥 못먹는데 라고 한다)
실내장식은 깔끔하기는 하지만, 뭐 그렇게 특별할껀 없다. 메뉴는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고, 가격은 보통 1000Rs가 넘는다. 일단 익숙하고 가격이 그중 만만한 (900Rs) 피자를
주문하고 맥주도 두병 시킨다. 정말 한참 지나서 피자가 나왔는데 맛은 그저 그렇고,
피자 위에 상추같은 채소를 여러장 덮은게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여기가 정말 고급음식점인갑다'.하고 느낀건 실내장식이나 식사에서가 아니라, 상주하는 여직원이 손닦으라고 수도를 틀어주고, 페이퍼 타월도 뽑아주던 여자화장실.(남자화장실엔 아무도 없단다) 그리고 화장실박물관과 인형박물관 가는 길을 지도를 봐도 당체 모르겠어서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물어봤더니 자기도 모르는데 매니저에게 물어보겠다며 책을
가져가더니, 한참후에 나타난 매니저가 자기도 잘 몰라서 박물관에 전화를 해서 알아봤다며 이케저케 설명을 해주는 그 극진한 친절함.
아..그러나 불행히도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분명히 영어로 말하고 있는데 억양이 너무 특
이하다. 열심히 설명하는데 자꾸 What? What?하며 끊기도 민망해서, 어느 순간부터 다 알아듣고 있다는듯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yes, yes,하다가, 길고도 지루한 외계어가 끝난후 활짝 웃으며 유창한(?) 영어로 'Thank you~'해버린다. 길이야 다른사람에게 물어봐도
되고, 친절한 대접을 받는건 고맙고 즐거운 경험이니까..
그렇게 극진한 대우를 받은 결과, 얇은 피자 한판에 맥주 두병과 커피 한잔을 먹고 마신데
세금과 봉사료가 포함된 계산서는 거의 2000Rs. 별로 먹은것도 없는데 어젯밤 코넛플레이스에서 4명이 배부르게 먹고 남기기까지 한 금액의 2배도 더 나왔다. 우리돈으로 치면 4만원 정도이니 셋이 점심 한끼 먹으며 쓸수 있는 돈이지만, 이곳 물가수준을 생각하면 대단한 금액이다. 아저씨들은 덕분에 이런데도 와봐서 좋았다고 하시지만, 나때문에 괜한 과소비를 하게 된것 같아 미안하다.
다시 오토릭샤를 타는게 너무 끔찍해서 이번에는 인디아게이트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가보기로 한다. 걸어오는 길에 봤던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벤치에 앉아있는 버스를 기다리는
인도인들에게 인디아게이트까지 가려면 어떤 버스를 타야하냐고 묻는다. 모두 눈만 껌뻑
껌뻑 거릴뿐 아무 반응이 없다. 아예 상대를 안해준다.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냐? 모르면 모른다고나 하지. 영어를 모르나? 꿍시렁대면서 자리를 옮기는데, 갑자기 벤치에 않아 있던 사람중 하나가 뛰어 오며 소리를 지른다.
그: 702!
나: 뭐라고??
그: 702번, 그 버스가 인디아게이트까지 가!
그가 손가락질 하는 쪽을 보니 마침 702번 버스가 들어오고 있다. 인사도 못하고 아저씨들을 불러 버스에 올라 탄후, 밖을 내다보니 그는 이미 자기가 기다리던 버스가 와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 말을 무시한게 아니라, 버스 번호를 떠올리느라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나보다. 우리가(아니..내가) 승질이 좀 급하기는 급하다.
차장인듯한 남자가 다가와 10Rs씩 내란다. 요금을 내고 인디아게이트에서 내려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버스차장의 지위가 우리와는 다른듯 그가 내 앞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lady 어쩌구'하며 일어서게 하더니 나를 그자리에 앉히더니, 'foreigner 어쩌구' 하면서 옆자리의 남자까지 일어나게 하고 그 자리에 전라도아저씨를 앉혀준다.
난데없이 서서 가고 있는 두 인도남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자리에 앉아 열린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시내를 달리니 '버스 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요금도 덜
들고 무엇보다 조용해서(덜 시끄러워서) 좋다. 오토릭샤는 달릴때 오토바이 소리같은걸 내는데 그 소리를 계속 들으며 가려면 대단한 인내와 무신경이 필요하다.
1차대전때 영국을 위해 싸우면 인도를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말에 속아 참전했다가 죽은
9만명의 인도병사 이름이 새겨져있다는 인디아게이트에 가서 (흰두어로 쓰여져 있을테니.
비록 읽지는 못할지라도) 그 이름들을 한번 만져 보고 싶었는데, 인디아게이트는 멀찌감
치 출입제한 철책이 둘러져 있어서 접근이 불가능하다.
인디아게이트 주변은 인도인들을 위한 도심공원의 역할을 하는듯 상당히 넓게 녹지가 조
성되있고. 평일낮임에도 가족단위의 인도인 행락객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잡다한 군것질
거리와 조악한 장난감과 기념품을 파는 행상들. 풍선장사와 사진사도 있고, 바로옆 조그만 연못에는 보트와 오리배까지 떠다니는 전형적인 행락지다. 특별히 먹거나 살만한 물건이
없으므로 남들 하는대로 보트를 한번 타 본다. (30분동안 배 빌리는데 30Rs, 노 저어주는데 10Rs, 10Rs를 절약하기 위해 그 더운날씨에 아저씨들보고 노를 저으시라고 했다.)
보트에서 내려, 다시 여러사람에게 '화장실박물관'과 '인형박물관' 가는 길을 물었으나
대부분 모른다. 서울시내에서 김치박물관이나 자수박물관을 물을때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려나?하는 생각을 하면 이해는 된다. 간혹 아는 사람도 있는데, 이번에는 일껏 해주는
설명을 내가 알아듣지를 못한다. 아까 그 식당매니저의 영어가 결코 특이한게 아니었다.
다시 비가 내린다. 어제부터 계속 비가 내리면 나혼자 우산을 쓰고 다니고 아저씨들은 쫄
딱맞고 다닌다. 라면과 소주를 상자째 메고 왔다는 사람들이 우산은 '무거워서' 일부러
빼놓고 왔단다. 우기에 여행을 오면서 우산을 안가져 오다니? 하루에도 몇번씩 비가 내리
는데.. 다행히 비는 대부분 금방 멈추고, 햇빛이 워낙 뜨거워서 옷도 금방 마르지만, 빗물
마른 옷이 다시 금방 땀에 젖으므로 에어컨이 돌아가는 실내가 아니면 옷은 어짜피 언제나 축축하게 젖어있기 마련이다.
우산이 너무 작아서 혼자 쓰기도 모자라고, 누구는 씌워주고 누구는 안씌워줄수도 없어서
혼자 쓰고 다니기는 하지만, 비 맞고 서있는 사람들보고 또 어디를 가자고 하기도 미안해
서 아직 좀 이른 시간이지만 일단 빠하르간지로 돌아가기로 한다. 이번에는 짧은거리이니 그냥 오토릭샤로..
빠하르간지에 도착해서 시장 구경을 하다가 우산이 있길래 사시라고 하니까, 여전히 비를 맞고 있으면서도 두분다 '무거워서' 싫으시단다. 참 특이한 사람들이다. 먼저 숙소로 돌아
와 샤워하고 짐을 꾸리고 있으니, 곧 아저씨들도 돌아오셔서 떠날 준비를 하신다. 이번에는 짐이 있어, 셋이 오토릭샤를 타고 움직이기는 무리이므로 택시를 타야할것 같다.
바가지를 안쓰려고 나오는 길에 프런트직원에게 터미널까지 적정 택시요금을 물어보니
돈이 없어서 그러는줄 아는지 버스타고 가라며 약도까지 그려주며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
버스보다 빠르고 편한 전철타고 가는 방법도 아는데, 역까지 걸어가면 일껏 갈아입은 옷이 또 땀에 젖을것 같아 택시를 타려는건데, 버스정류장은 전철역보다 더 멀다.
그래도 말하는 사람 성의도 있고 나중에 필요할수도 있어서 잠자코 듣고 있는데, 경상도
아저씨가 내 뒤로 다가와 ' 저 놈들이 불러주는 택시는 비싸요. 나가서 직접 잡읍시다' 하
고 속삭인다. 이 아저씨가 말만 안되는게 아니라 듣기도 안되는구나.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모릉께~'의 자세로 세상 편하게 로비소파에 앉아 계시는 전라도아저씨를 보니 또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한다.
프런트직원은 70-100Rs면 충분히 간다고 했는데, 길에서 택시를 잡아보니 120Rs이하로
는 내려가지를 않는다. 어느새 배낭을 멘 등에 땀이 젖어든다. 외지인이 현지인과 같은 돈을 내려고 하면 안되지. 120Rs로 낙착.
그러고 보니 인도에 도착한지 이틀도 안되서 지하철 오토릭샤 싸이클릭샤 시내버스 택시
게다가 노젓는 보트까지 거의 모든 교통수단은 섭렵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인도에 도착한지 이틀이 아니라 한달은 된듯한 느낌이 든다. 즉 이제 별로 겁이 안난다.
퇴근시간과 맞물린 델리시내는 상당히 혼잡하고 정체현상도 꽤 심하다. 신호대기중이거나 길이 막혀서 차가 조금만 서 있으면, 어디선가 나타난 걸인들이 차창밖에 달라 붙는다. 하
체가 없는 사람이 차도를 기어 들어올때는 어찌나 불안하고 안됐던지 문을 열고 돈을 주었지만, 각자의 사정이야 어쨌튼 사지멀쩡한 사람들에게는 차가 빨리 출발하기만을 바라며 나도 버텨본다. 동양여자가 제일 마음이 약하다는걸 경험상 아는지 차에는 분명 4개의 창문이 있는데 유독 내가 앉은 쪽으로만 달라붙는다. 창문도 열려있는데..버티기 힘들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요금을 내고 내리려는데, 운전사가 팁은 안주냔다. 시세보다 비싸게
주고 온거 뻔히 아는데 팁은 무슨? 게다가 팁이란게 손님 마음이지, 먼저 요구할 사항은
아니지. 이 친구가 연로한(?) 동양아줌마를 아주 봉으로 아는구만. '팁같은 소리 하구 있네~'라는 한국어를 'I have no money. Sorry~'로 완곡하게 번역해서 말해주고 그냥 내린다
전철역옆 깔끔한 스낵바에 들어가 간단하게 이른 저녁을 먹었는데 비싸고 맛도 없다.
장시간의 버스여행에 대비해 노점에서 과일도 좀 사고, 2Rs씩 내고 공중화장실에서 볼
일도 보고 약속장소로 가니, 학생이 먼저 와 있는데 얼굴이 핼쓱하다. 아침에 생수사러
나가기 귀찮아서 식당에서 주는 물을 그냥 먹었더니 종일 설사를 한다고...
설사하는 사람이 어떻게 11시간동안 버스를 타나?? 학생은 그래도 아침나절보다는 많이
나은거라며 같이 타고 가겠단다. 하긴 아픈 사람을 낯선도시에 혼자 남기고 가느니 우리가
데리고 가는게 나을것도 같다.
'출발시간 8시, 탑승시작 7시반부터, 탑승구 17번'라고 버스표에 인쇄되있다. 아직 시간이 넉넉히 남았으므로, 17번 탑승구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제각기 다른 목적과 행선지를 갖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흩어지는 터미널이라는 공간은 관광지와는 다른 흥미와 즐거움을 준다. 정말 제각각인 인도인들의 옷차림을 구경하는것 만으로도 심심치 않다. 혼자 여행하는 서양인들이 간혹 눈에 띄고, 빠하르간지에서 골목마다 부딫히던 한국대학생들은 가격이 저렴한 일반버스로만 여행을 하는지, 전혀 안 보인다.
저기 열살남짓한 남자아이를 데리고 서있는 젊은여자는 한국사람 같은데, 어떤 용감한
아줌마가 아이를 데리고 혼자 인도여행을 왔나? 배낭이 아닌 바퀴달린 트렁크를 밀고 다
니는 것도 특이하고. 그런데 서로 빤히 보이는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전혀
아는체를 안한다. 일본 사람인가? 아닌데..한국사람 맞는데..
나 : 저 아줌마, 한국사람 같지 않아요?
경상도: 그렇죠? 가서 물어 볼까요?
나 : 놔두세요. 자기가 모르는체 하는데, 우리가 뭐하러요??
전라도: 저 아줌마, 한국사람 맞는데, 여기 사나 봐
나 : 왜요? 그새 가서 말 걸어보고 오셨어요?
전라도: 아니...아까 인도사람한테 인도말로 뭐라고 하더라구...
나 : (그렇구나. 여행자가 아니고 교민이라면 시도때도 없이 밀려와 법썩을 떠는
여행자들이 반갑기보다 귀찮을수 있지.시선 피하는 마음,이해는 간다. 근데 좀 섭하네)
탑승시간이 가까와져 우리가 탈 버스를 찾으니 앞에 서있는 버스 모두 아니란다. 이 버스들이 출발한 다음에 들어오는 버스인가? 하고 기다렸는데, 새로 들어온 버스들도 모두 아니란다. 결국 학생이 자기가 알아보고 오겠다며 일어선다. 그런데 7시반이 넘어 8시가 가까와 오건만 우리의 막둥이는 아직도 여기저기 헤메고 다닐뿐 돌아오지 않는다. 저 친구가 뭐하나? 그게 뭐 어려운거라고? 도대체 이해가 안돼서, 내가 한번 나서보니 단박에 이해가 간다. 이 버스라고 해서 가면, 저 버스라고 하고, 거기가면 또 다른데로 가라고 하고...
이런식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부글부글 끓은 화를 억누르고) 창구에 가서 최대한 얌전하고 공손하게 물어본다. 다행히 이번에는 여기가라, 저기가라...안하고, 종이에 차번호를 적어준다. 6066. 출발시간 3분전!! 비상이다!!! 전라도아저씨께 짐 지키고 계시라고 하고, 아저씨 아줌마 학생 모두 흩어져서 6066 번호판을 찾느라 버스 꽁무니만 보고 다닌다. 그사이 내 바로 옆에서 후진하던 버스가 정차해있던 버스를 쿵~ 들이받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난리도 아니다.
드디어 학생이 불빛도 안들어오는 어두운 귀퉁이에 서있는 6066 볼보버스를 발견하고
"여기요! 여기" 소리를 지른다. 이번에는 모두 배낭을 짊어지고 헐레벌떡 전력질주를 한다.
17번 탑승구와는 아무 연관없는 공터에 서있는 버스안에는 벌써 각기 알아서 찾아온
승객들이 가득 좌정하고 있다. 이럴러면 도대체 탑승구 지정은 왜 해주는건지?
우리가 헐떡대며 좌석을 찾아 앉을 즈음, 아까 그 한국 아줌마와 꼬마가 우리보다 더 헐떡
대며 버스에 올라탄다. 그러길래 아까 우리에게 아는척이라도 좀 했으면 우리가 챙겨서
같이 탔지. 약간 쌤통이다 싶은 내 심뽀와 달리 아저씨들은 청하지도 않는데 벌떡 일어나
아줌마와 아이의 짐을 선반에 얹어주신다. 역시 나보다 착한 사람들이다. 물론 아무래도
동성보다 이성에게 관대하기 마련인 자연의 법칙도 작용할테고...
타느라고 하도 애를 먹어서 그런지 현재 인도에서 운행중인 공공버스중 제일 좋다는(따
라서 요금이 제일 비싼) 볼보버스가 그리 좋은줄을 모르겠다. 의자가 넓고 다리받침도
올라와 침대 비슷하게 되기는 하지만, 쾌적함은 우리나라 우등고속버스보다 못하것 같다. 어두운 조명 탓에 확인할수는 없지만 느낌상 좌석시트의 청결상태도 심히 의심스럽다.
게다가 그렇게 허벌나게 뛰어와서 탔는데, 30분이나 지나서 출발한다. 차앞에서 현금이
오간후 두어명의 손님을 더 태우고 만석이 되서 출발하는걸로 봐서, 우리가 제때에 안탔
으면 우리 자리도 새로 돈받고 새로 팔았겠지 싶은 생각이 드니 더욱 화가 난다. 아저씨들은 '어째튼 탔으니까 됬잖냐?'고 하시지만, 난 아니다. 무지무지 화난다. 편하게 가려고 기껏 비싼돈 주고 이 차를 탄건데, 어떻게 처음부터 이렇게 애를 먹이나? 이렇게 화가 난 상태에서 12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갈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하다. 이미 어두어진 창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밤새 담배 한대 못피우고...난 이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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