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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꽤 마신 편인데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벌써 일어나 혼자 새벽 산책을 나가셨던
경상도아저씨가 들어오시고, 전라도아저씨도 잠이 덜깬 얼굴로 곧 나오신다. 셋이 모여
앉아 하루 일정을 상의하는데 경상도아저씨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하신다.
@BRI@그: 우리가 늙긴 늙었나봐요...
나: 왜요??
그: (서양 처녀 3명이 머물고 있는 방을 가리키며) 저 방 봐요, 아직 꿈나라야.
학생도 일어날 생각을 안하고...
시계를 보니 아직 8시도 안됐다. 그러고보니 아무 바쁜 일 없는데 우리 셋만 괜히 일찍 일
어나 모여 있다. 늙으면 새벽잠이 없어진다더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어젯밤
‘젊었을때랑 변한게 하나도 없다’고 그렇게 우기던 경상도아저씨가 하룻밤새에 늙음을
자인하시는걸 보니 안됬다. 푸릇푸릇한 20대 젊은이들은 9시가 넘어서야 하나둘 일어나
나온다.
오늘은 근교에 있는 박수나트(폭포)에 다녀 오자고 하신다. 가이드북에 의하면 볼품없는
작은 폭포여서 나는 빠지겠다고 했더니 굳이 같이 가자신다. 몇칠동안 정신없이 움직여
서 오늘은 좀 푹 쉬고 싶은데.. 할수없이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 ‘릭샤타고 간다’는 조
건을 달아 함께 움직이기로 한다.
식사를 하러 나가는데 청소아줌마가 내게 왜 자꾸 창문을 열어놓고 나가냐며, 다시 올라가 서 창문을 모두 잠그란다. 3층이니 통로 쪽만 잠그면 될것 같은데, 왠 문단속을 그리 심하게 하라고 하나 했더니, 열린 창으로 원숭이들이 들어와 물건을 훔쳐가거나 방을 어질러
놓는 경우가 많단다. 원숭이.. 여기는 그런 변수도 있구나.
수제비 비슷한 티벳음식으로 아침겸 점심을 먹고 릭샤를 타러 가는데 한떼의 거지가 달려
든다. 또 만만한 동양여자인 내게만 집중적으로.. 마주치는 걸인에게 모두 연민을 갖으며
여행을 하기는 불가능하므로 대충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걸레같은 거적에 형체감없는
작은 아기를 둘러 안고 손을 내미는 빼빼마른 젊은엄마까지 외면하기는 어렵다. 돈을 좀
주려고 지갑을 찾으니 여자가 “No Money, Food for baby!”라며 손짓으로 가게를 가리킨다. 돈말고 애 먹을 음식을 사달라고? 그러지. 뭐..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여자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구석에 있는 진열대로 돌진하더니
까치발로 서서 맨위칸에 있는 포대를 주섬주섬 꺼낸다. 하나. 둘.셋.. 뭔지는 몰라도 이렇게 많이 사줄 생각은 없어서, 더이상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니 화들짝 놀라 한개만 남
기고 모두 올려 놓는다. 더 내려놓지 말라는거지, 이미 내린걸 올려 놓으란건 아니었느데..
주인에게 뭐냐고 물어보니 아기분유란다. 가격은 160Rs! 이런~ 바가지를 옴팡 썼군,
길에서 같으면 5-10Rs만 주면 끝나는 건데.. 어쩐지 들어올때 주인이 날 좀 한심하게 보는것 같고, 여자에게도 전혀 손님대접을 안한다 했더니..상습범인게 분명하지만 이제 와서
안된다고 하기도 뭐하고, 놀라서 하나만 남겨 놓고 내 눈치만 살피는 모습도 애처로와
계산대에 나와 있는 10Rs짜리 사탕 한봉지까지 얹어 170Rs를 내고 나온다.
갑자기 없어진 나를 찾느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일행에게 다가가 그 이야기를 하니 모두
혀를 차며 ‘그냥 나오지 그걸 뭐하러 사주었냐?’고 한다. 그 여자가 그 비싼 분유를 애를
먹일 것 같냐고? 되팔아 돈만 챙길꺼라고. 맞는 말이지만 의외로 별로 화가 안난다.
설령 (아마도 확실히) 그 여자가 분유를 아기에게 먹이지 않고 되팔아 돈을 쓴다 해도,
엄마가 편해야 아기도 편할수 있다. 여기 물가로 치면 170Rs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한국돈으로 치면 3500원 정도. 여행수업비라고 생각하면 그리 많은 돈은 아니다.
이제 다시는 돈말고 음식을 사달라는 사람에게 끌려 가게에 들어가는 실수는 하지 않을
테니..그 정도 바가지는 한번쯤 당해도 된다.
수많은 행인과 걸인과 상인들을 지나쳐 오토릭샤 스탠드에 다다른다. 가이드북에는 분명 15-20Rs라고 되어있는데 모두 한결같이 30Rs란다. 큰돈 아닌데 실갱이 하기 귀찮아, 그
냥 30Rs씩 내기로 하고 두대의 릭샤에 나누어 탄다.
릭샤는 폭포 앞이 아닌, 폭포로 가는 산길 입구에서 멈춘다. 하긴..폭포가 신작로 끝에
있을리는 없지. 결국 걸어야 하는구나. 어떤 사람은 폭포까지 30분이 걸린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두 시간이 걸린다고 하고, 도대체 가늠이 안되는 거리..
조리를 신고 산길을 오르는데 비까지 오기 시작한다. 미끄럽다. 우산을 포기하고 그냥
비를 맞고 오르는데 안개가 밀려온다. 순식간에 바로 코 앞에 있는 사람 밖에 안보인다.
난생처음 보는 정말 대단한 안개다. 우리나라였으면 당장 하산했겠지만, 이곳에서는 별로
특이한 날씨가 아닌듯 여전히 많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르내리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냥 올라간다.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서 만난 폭포는 그저 그렇다. 산속에 흘러 내리는
가느다란 물줄기 하나.. 이걸 폭포라고 불러야 하나?
폭포보다는 안개 구경에 의미를 두며 내려오는데, 순식간에 하늘이 걷히고 해가 나온다.
몰려온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안개가 사라지고, 가깝고 먼 산골짜기들이 얼굴을 내민다.
너무나 맑고 밝은 초록빛에 찬탄하고 있는데, 금방 또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내린다.
심심치않아 좋기는 하다만 나는 아무래도 어느정도 지속성은 보장하는 우리나라 날씨가
좋다. 이건 너무 정신없다.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기도 귀찮아, 이번에는 아예 안 편다.
드디어 하산완료!! 원래는 갈깨는 걸을 생각이었지만, 모두 피곤하고 비도 오므로 릭샤를
타고 돌아가기로 한다. 몇시간전 30Rs를 내고 온 장소로 돌아 가려는데 이번에는 모두
60Rs를 달란다. 연이어 3명한테 물어봤는데 모두 한결같이 원래부터 60Rs라고 한다.
흠~ 이거 봐라. 비가 온다고 그새 값을 2배를 불러? 뭐 원래부터 60Rs라고? 우리가
그렇게 어수룩해 보이냐? 관둬라 관둬! 어짜피 비도 맞은거 그냥 걸어간다! 다행히 일행
모두 동의한다 (서슬퍼런 내 기세에 눌려, 할수없이 동의했나??) 5분쯤 걸었을까? 빵빵
거리는 소리에 뒤돌아 보니, 아까 그 릭샤꾼이 릭샤를 몰고 쫒아와 말을 건다.
그: 타. 30Rs!
나: 싫어. 비맞고 이만큼이나 걸어 왔는데 30Rs 못내! 20Rs면 타고..
그: 그래. 대신 같은 방향가는 사람 있으면 더 태운다.
나: 그러던지... (이 좁은 릭샤에 누가 더 타냐?)
다시 2대의 릭샤에 두명씩 나눠 탔는데 릭샤 한대는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반해, 내가 탄
릭샤는 앞에 걸어가고 있던 두명의 젊은 서양여자애들 옆에 선다. 여자애들이 별 얘기없이
금방 “Yes"하고 릭샤에 올라 타려는 것으로 보아, 우리와 같은 케이스인 듯 하다. 그런데
도대체 한명도 아니고, 두명이 어떻게 타겠다는건지??
여자애들은 익숙한 자세로 한명은 딋자리로, 한명은 앞자리로 올라탄다. 이렇게 탔으면
우리도 굳이 2대에 나눠타지 않고 4명이 한대에 타도 됬을껄.. 하지만 앞자리는 두명이
앉을수는 있으나, 운전대가 정중앙에 있어서 2명이 타면 운전하기에 상당히 무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릭샤꾼은 그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듯 몸따로 손따로인 자세로 더욱 속도를
높혀 릭샤를 몰고 간다. 이제 생존에 대한 그의 열의가 더 이상 얄밉거나 추해보이지 않고, 왠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비에 젖은 몸을 밀착하고 앉아 서로 아무말 없이 가기가 불편해서 옆에 앉은 여자애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나 : 니들은 얼마에 탔니?
그녀: 30Rs
나 : 처음엔 얼마 부르대?
그녀: 60Rs
나 : 그랬구나. 우리도 비온다고 배를 불러서, 그냥 걸어오는데 금새 따라오더라.
얄미워서 걸어온거 빼고, 20Rs만 주기로 했다.
그녀: 잘했네. 나도 그럴껄....
깔깔대던 여자애가 앞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뭐라뭐라 말을 한다. 느낌상 방금 나눈 이야기를 옮기는 것 같은데 전혀 알아 들을수 없다.
나 : 그건 어느나라 말이야? 니들은 어디서 왔어?
그녀: 프랑스어. 우리는 캐나다인인데, 프랑스어 사용지역에 살아..
나 : 아. 그렇구나. 나는 Korea 에서 왔어.
그녀: What?
나 : Korea!
그녀: Sorry, I don't know.
나 : Korea!! The Asian country between China and Japan!
그녀: Sorry, I don't know
뭐 이런 무식한 애가 다있나? 코리아를 모른다니? 그건 그렇고 국제사회에서 Korea의 위상이 아직도 이 정도인가? 머쓱 & 착잡 & 잠잠...
그녀: (갑자기) Oh! Korea! World cup!! #$%^&!@#$%^&*(@#$%^&
나 : (기뻐서) Yes! Yes! Korea!!
그녀: Korea 알지. 니가 R을 L로 발음해서 못 알아들었어..
나 : (헉~ 그래..나.. R/L뿐 아니라 P/F도 구별해서 소리 못낸다. 하지만 코리아가 코리아지.. 그걸 어떻게 다르게 소리를 내라고??)
숙소에 돌아와 좀 쉬었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로 한다. 다행히 이제 더 이상 무슨 요리를 해먹자는 말들은 안한다. 버스정류장 근처 커다란 레스토랑은 이미 2층까지 좌석이 거의 차 있다. 술과 고기와 음악과 웃음이 넘쳐나는 공간에 앉아 있자니, 낮동안 보았던 고단하고 남루한 사람들이 자꾸 떠올라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다. 어쨌든 탄두리 치킨과 맥주는 맛있다.
숙소에 다와 가는데 경상도아저씨가 갑자기 커피를 사신다고 앞장서 노천카페로 들어가신다. 전라도아저씨는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바지주머니에서 팩소주 2개를 꺼내신다. 아까 맥주 한병에 150Rs나 해서 4병만 시켰더니 부족하셨다보다. 학생은 잽싸게 숙소로 뛰어가 멸치와 고추장을 가지고 온다. 완벽한 팀웍이다.
서늘한 밤공기를 느끼며 길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니 참 좋다. 이미 어두워졌건만 거리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닌다. 행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여기는 인도도 티벳도 아닌 인터네셔녈 시티다. 정말 다양한 인종들이 다양한 표정과 차림으로 지나간다.
델리 버스터미널에서 보았던 젊은 한국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카페 앞을 지나간다. 경상도
아저씨가 커피 한잔 드시고 가라고 부른다. 그쪽에서 아는척 안하는걸 굳이 왜 부르시나? 하고 있는데 여자기 의외로 반갑게 웃으며 아이를 데리고 들어와 앉는다.
쌀쌀해 보이던 인상과 달리 초면에 말도 잘하고 수더분하게 잘 어울린다. 남편이 델리에서 사업을 하는데, 델리가 너무 더워서 방학을 맞은 아이와 둘이 피서를 왔고, 내일 델리로
돌아간단다. 인도에서 태어났다는 10살짜리 아들 훈이는 깔끔하고 귀엽게 생겼고, 영국인
학교에 다녀서인지 아주 매끈한 발음의 영어를 구사한다. 흰두어도 엄마보다 더 잘한대고, 방학마다 부모는 못가도 아이는 꼭 한국에 계신 할머니댁에 보낸 덕에 한국말에도 아무 문제가 없다. 단 쓰기는 좀 어려워하고, 하기 싫어 한다는고..
어른들 사이에서 지루해하던 아이는 학생이 게임 얘기를 꺼내자 눈을 반짝이더니 곧 둘이 의기투합하여 바로 옆에 있는 피씨방으로 들어가 나올 줄을 모른다. 아줌마와 아저씨들은 11시가 넘어 카페주인이 상당히 미안한 표정으로 ‘문닫을 시간’ 이라 말할 때까지 계속 뭔가 화제만발이다.
경상도아저씨와 학생이 아이와 엄마를 숙소까지 데려다 주러 가고, 전라도아저씨와 나는
먼저 숙소로 돌아오고...그렇게 인도여행 네째날, 맥그로간지에서의 둘째날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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