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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건을 살린 영화.
이 영화에서 장동건은 완전 마쵸다. 간첩의 목을 따서 진정한 군인이 되기 위해, 보통 안발라도 되는 위장크림으로 얼굴을 도배하고, 어쩌면 군인에게도 전혀 필요없을 국가 이데올로기, 전쟁 이데올로기를 머리 속에 장전시킨다.
@BRI@군에서 그 집단 생활에 매력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이라크 파병'에 차출되기를 내심 바랬는지도 모른다. 주변에 이야기하기 위해서. 남성 마초 문화 속에서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 위해서. 진짜 남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인지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의 경우 이라크 파병을 지원하는 군인들이 꽤 있었다. 논란이 있을 법한 이 이야기는 접어두자.
장동건의 그러한 사상적 무기(전쟁 이데올로기의 극단적 묘사라고 보여지는데)는 결국 사고로 이어진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오인. 사살. 1명 사망. 1명 정신질환 '획득'
장동건도 미쳐간다. 주변 마을 사람들의 시달림에, 자책감에, 애인과의 결별에, 동료들의 시선과 언행에.. 결국 훈장을 받고 전역한다.
김기덕의 영화가 모두 그러하듯,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추상과 구체가 겹쳐있고, 상상과 현실이 겹쳐있어, 항상 모호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는 몽환적인 느낌은 준다. 김기덕 코드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장동건의 전역에서 더이상 실제 장동건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 이후 등장하는 장동건은 상징이고, 메타포이고, 아군과 적군도 구별하지 않을 정도로 미치게 만드는 전쟁광의 모습이며, 결국 일상 속에 깃들어 있는 우리네 폭력성이다. 폭력(국가)의 강제로 군대에 와야하는 한 순수한 청년(장동건의 동기)이 해병대에 지원하였고, 그 안에서 폭력을 배운다. 그리고 길들여진다. 그래도 그는 순수했다. 하지만, 동기의 사고, 전역을 경험한 후 후임으로부터 폭력을 당하자 그의 폭력성은 광기로 변한다. 작은 의견충돌과, 비아냥거림에도 살인을 일삼는 식으로. 영화 속에서 그의 죄책감은 보이지 않는다. 김기덕 코드의 효과다.
사실 난 이 영화를 보면서 군과 사회가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미시적인 폭력 장치들의 종류는 다를지라도 결국 그 효과와 개인을 억압하고, 그 개인에게 집단적 정신성을 이식하는 방법은 동일하게 보인다.
영화 말미에 진짜 장동건이 등장해 시내 한 복판에서 총검술로 사람을 죽이게 되는데, 그는 이미 실성하여서 사태를 파악할 이성이 없다. 폭력성이 군에서 사회로 전염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폭력의 구조는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해안선'은 일정치 않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물이 운동하는 양태에 따라 해안선의 형상은 변한다. 해안과 육상의 경계가 모호하다. 마찬가지로, 사회와 군. 정상과 병리. 이성과 감성. 순수와 불순. 등 모든 대립의 경계는 항상 모호하다. '난 그렇지 않아'라는 생각이 전적으로 자기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난 그렇지 않다'는 말은 '모든 크레타인들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는 크레타인을 떠오르게 한다.
'난 거짓말쟁이가 아니라서 말해주는데, 크레타인은 모두 거짓말쟁이야. 그런데 나도 크레타인이지. 그런데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야.' 대상언어와 메타언어. 자아와 타자의 애매한 경계. 거짓과 진실의 모호한 틈새.
김기덕은 '해안선'이라는 제목으로 멀쩡한 이성을 가진 사람들만 살아간다고 믿고 싶어한 시민들의 생각을 정면으로 꼬집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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