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원사. 그것도 굉장히 '항구적'이어서 정원 가꾸는 일에 '충실한' 정원사. 고로, '성실한 정원사' 주인공 저스틴을 지칭하는 제목이다.
어느 시대에서나, 보통은 자기 정원을 가꾸며,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관찰하며, 생명의 주기적 반복에 '참여'하는 사람은 굉장히 형이상학적이어서 우주론적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거나, 다르게 표현하자면 현실에 별 관심이 없는 캐릭터를 지닌 인물이다.
@BRI@저스틴은 어쩌면, 그런 인물이다. 영화는 외교관이라는 직업이 그를 현실 참여적 인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왜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기투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는 시점의 혼란스런(사실 이 영화는 <디 아워스>라든가, 시간과 공간의 이질적 층위를 마구 뒤섞어 놓은 <21 grams> 보다는 굉장히 단순한 문법으로 읽혀진다) 시점의 이동을 통해, 주인공 저스틴의 '독을 품은' 행보를 설명한다.
행위의 배후에는, 근대적 사유를 따르자면, 언제나 '코기토'가 있고, 이 영화에서 그 코기토의 주체(주인공)는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 타샤에게서 '레종데뜨르'를 찾는다.
'어떠한 증거도 믿지 말라, 오직 그녀만 믿어라'라는 영화의 홍보성 프로파간다가 가드너의 그러한 '의식의 흐름'을 요약한다.
내러티브가 꼬집고 있는 '당연한 사실'은 자본의 몰가치적 성격이다. 맑스와 고진의 사유를 따라, 자본은 자기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넘어서지 못하는 약점을 안고 있다. 언제나 이러한 자본에 기생해서 살을 찌우는 권력층이 존재하게 마련.
영국의 한 제약회사가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사기극'을 벌인다. 아니, 사기극이라기 보다는, 731부대가 자행했던 인간 마루타 실험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제약회사는 UN이라는 평화의 '가면'을 쓰고 검증되지 않은(사실,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실 제약회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프리카인의 생명은 애당초 '부재'의 영역에 속한다) 결핵 치료제를 끊임없이 투여하며 살을 찌우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을 모를리 없는 영국 정부는 제약산업의 경제적 효과를 정치적으로 '포장'하며 자본의 몰가치한 자기-증식적 성격을 은폐시키려 든다.
이처럼, 아프리카인들의 무덤을 밟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영국 사회, 나아가 서구 문명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로부터 타샤는 앙가주망을 시도하다 무참히 살해된다.
아내의 '의문사'를 규명하려던 가드너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고, 아내가 못다한 일을 마무리지으려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그 역시. 살해당한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은 몰가치한 자본을 공격하는 마이클무어식의 문제의식과 동일한 궤를 그리고 있는데, 기실 이런 류의 영화는 (부족하긴 하지만) 많이 만들어진 편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런 류의 영화와 다른 점은 일상 속에 파고든 이해불가한 자본의 속성을 '투박하게' 혁명의 언어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인 지점, 바르트가 이 영화를 봤다면 '푼크툼'이라고 했을 그런 지점에서부터, '혁명'이라거나 '개혁'이라고 느끼기엔 무언가 결점이 있는, 그래서 더욱 가슴에 와닿는 '탈주'를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주인공은 분명 상황으로부터 탈주하고 있는데, 이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잔잔한 OST와, 외부인에게 고요하고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씬들을 통해 일상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사랑의 상실로 인해 느끼게 되는 공허감 때문에 자본의 근본적 부조리를 지적해낼 수 있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원래 혁명이라는 것은 나와 동떨어진 거대한 대중을 바라보며 시작된다기 보다,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랑의 대상에 대한 마음씀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
|
|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