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람들의 소나타

<타인의 삶>

검토 완료

황현실(littelf02)등록 2007.03.06 20:43
시대가 악한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소립자인 개인들은 절대 악일 수 없다고 말한다. 영화가 들려주는 메시지는 그것이다. 분단이, 정치가, 이즘이 인간이 인간을 감시하고 경계하고 악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레이만은 슈타지, 즉 동독의 국가안전부의 감시를 받는다. 그의 온 집안에 물 샐 틈없이 도청장치와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고, 24시간 숨 쉬는 것 까지 보고, 감시된다. 그의 감시를 맡은 이는 냉정하고 감정이 없는 로봇 같은, 도청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인 비즐러.
@BRI@
그는 안전부에서 학생들에게 도청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안전부는 드레이만 부부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비즐러는 냉철함과 완벽주의적인 기질로 24시간 근무태세에 돌입한다. 하지만 기계 같던 비즐러의 삶이 드레이만 부부의 도청을 계기로 조금씩 균열되기 시작한다. 그 파문은 잔잔하고 일상적이었지만 그만큼 자신이 깨닫지 못할 정도로 완전하게 그의 삶을 흔들어놓는다.

부부의 생활이 온전히 비즐러에게 전해지면서 그의 강팍한 생활에 변화가 온다. 비즐러는 드레이만이 즐겨 읽는 브레히트의 시집을 몰래 가져가 읽기도 하고, 괴로움을 달래는 드레이만의 피아노 선율에 마음 한자락이 흔들리기도 한다. 자신이 변화를 알아채기도 전에 이미 그는 전과 다른, 그가 되어간다. 그리고 결국 비즐러는 드레이만 부부의 삶에 완전히 관찰자일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영화가 주는 긴장은 이 지점부터 시작된다.
비즐러는 어디까지 브레이만의 삶에 관여할 것인가... 그리고 어느 지점까지 그의 삶은 변화할 것인가. 브레이만을 위해 가짜 보고서를 쓰고, 그의 모든 불법행위를 눈감아 주면서 비즐러가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가 지켜주고 싶었던 것은 브레이만의 정치적 신념과 자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진정 그가 지켜주고 싶었던 것은 좌절하고 고뇌하며 그럼에도 다시 꿈틀거리며 가치를 찾아가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모습이 브레이만의 그것과 더 멀고 다르게 느껴질수록 비즐러는 브레이만의 삶에 더욱 매료되기 시작한다. 그와 같은 것을 읽고, 같은 것을 들으며 같은 것을 느끼려 한다.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으려 하고, 그의 목소리로 말하려 한다.

브레이만이 반사회주의적 글을 통해 동독 정부의 허구를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동안, 비즐러는 그의 행적을 감춰주고 허위로 보고서를 날조한다. 그리고 비즐러는 브레이만을 보호함으로써 모든 것을 잃는다. 통일 후 자신의 신념에 따라 무엇이든 쓰고 공연할 수 있는 브레이만과 달리 비즐러는 브레이만의 행적을 허위보고한 이유로 편지 감식반으로 좌천된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게 서로의 삶에 깊이 관여해버린 그들은 결국,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암흑의 시간을 지난다. 비즐러는 브레이만의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브레이만은 자신이 도청당했다는 사실마저 몰랐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의 뒤에 누군가가 있었음을 느끼게 된다. 연인도 친구도 동료 지식인들도 모두 죽음으로 희생되었던 그 때, 왜 나만이 무사했는가... 브레이만의 뒤늦은 의문은 영화가 숨겨둔 마지막 감동으로 이어진다.

비즐러는 아무도 더 이상 그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쓸쓸한 삶을 살아간다. 편지를 배달하는 일로 생계를 꾸리며, 전과 달라진 게 없을 것 같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살아가는 비즐러다. 하지만 그는 무심하게 지나던 거리에서 문뜩 걸음을 멈춰선다. 그의 눈길을 잡은 것은 서점 앞에 걸린 브레이만의 새 작품을 광고하는 포스터. 그는 서점 안으로 들어간다. 비즐러가 브레이만의 새 작품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후욱~ 하고, 가슴 한 켠이 묵직해진다.

- HGW XX /7 에게 헌정한다.

비즐러는 자신의 요원번호가 씌어진 책장을 덮고 무표정하게 그 책을 사선, 다시 아무도 그를 알아봐주지 않는 거리로 걸어간다. 그때 브레이만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그를 멀리서 지켜볼 뿐이다. 아무 말도, 어떤 감사의 헌사도 없이 그렇게 둘은 그 거리에 서 있다.
단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하지 않은, 선하지 않은 시대를 함께 통과한 선한 자들의 이야기가
오래 가슴에 남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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