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심판 - 선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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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psythkim)등록 2007.04.10 12:24
세 가지 심판
- 선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


2007년 4월 9일 월요일
새뜰심리상담소출판사 대표 김태형



“과연 이 세상은 정의로운가?”
인류 앞에 숙명적으로 던져진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부조리한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세상의 정의로움’을 믿고 싶어 하지만 현실에서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한다.

1945년에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 민족이 독립을 쟁취했던 것은 분명 정의가 실현된 ‘역사적 사건’일 것이다. 그러나 처벌을 받아야 했던 친일매국노들은 친미파로 변신하여 한국사회의 지배세력이 되었고 그 중 다수가 부귀영화를 누리다 죽었다. 반면 한 생을 조국에 바친 김구, 여운형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비참하게 암살을 당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고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죄인들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큰 돈을 긁어모아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이러한 부정의한 현실을 체험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넋두리처럼 말한다.
“물론 나쁜 놈들은 언젠가 심판을 받겠지. 그것이 역사의 심판이든 하늘의 심판이든. 그렇지만 그 놈들이 살아서는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니...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그러나 너무 빨리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는 말자.
사람은 누구나 다 살아있을 때 ‘세 가지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1. 민중의 심판

‘사회적 존재’인 사람은 사회성원들로부터 평가를 받게 된다. 사회에 이익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고 사회에 해가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나쁜 평가’를 받을 것이다. 이렇게 사회를 위해 가치 있는 행동을 한 사람은 그 공로의 정도에 따라 작게는 ‘긍정적인 사회적 평가’를 크게는 ‘민중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법이나 권력의 심판이 아니라 민중의 심판을 중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장군이나 이토오 히로부미를 암살했던 안중근의사는 비록 부정의한 권력에 의해 처형을 당했지만 민중은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이다.
역사를 기준으로 볼 때 민중의 심판은 피할 수 없다(후세에 이루어지는 민중적 심판이 ‘역사의 심판’이다). ‘이완용’이 살아 있을 때에는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죽은 뒤에는 ‘매국노’라는 역사적 심판을 받았듯이.

악인들은 민중의 심판을 피하려고 발버둥친다. 잘못 대처하면 꼼짝없이 벌을 받게 되거나 쪽박을 차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그럴싸하게 위장을 함으로써 민중을 깜쪽같이 속이려고 한다(민중이 우민화될수록 이들의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은 커진다). 또 다른 이들은 권력의 힘으로 민중의 입과 귀를 틀어막으려고 한다.

악인들 중에는 ‘민중의 심판’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또한 ‘설사 그런 심판이 있다고 해도 내가 살아있을 때 안 받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희망처럼 ‘민중의 심판’은 운이 따른다면 피할 수 있다. 부조리한 사회가 오래 유지될수록 ‘민중의 심판’이 가지는 위력은 약해지기 때문에 악인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다 죽을 수 있는 기회도 그만큼 많아질 것이다.


2. 자식의 심판

밖에서 나쁜 사람이 가정에서 착한 사람으로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가정은 긴장을 풀어주는 곳이기 때문에 나쁜 사람은 가족 앞에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 결과 악인의 자식들은 나쁜 부모를 만나게 됨으로써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된다. 이는 자식들의 과실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태생적인 저주’, ‘원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악인들은 자식농사를 망침으로써 ‘자식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는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자식으로부터 부모대접을 못 받게 되는 것이다.
매우 드물지만 요행히도 악인의 자식이 도덕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비록 아버지가 매우 나쁘지만 어머니가 좋다면 혹은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를 대신할만한 ‘정의로운 어른’이 가까이 있어서 그 사람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면 악인의 자식은 ‘바르고 정직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자식은 성장한 뒤에 반드시 ‘부모’를 재평가할 것이기 때문에 반성하지 않는 악인은 자식으로부터 부모대접을 못 받게 되고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 자기 자신보다 더 나쁜 자식을 만듦으로써 심판을 받는다.
악인은 자식을 정신적, 도덕적 불구자로 만들 가능성이 많다. 그 결과 악인의 자식은 부모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될 것이다.
친일파나 독재자의 자식들이 부모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기는커녕 자기 부모를 미화하며 집착하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정신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신적, 도덕적 불구가 된 자식은 부모를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에 의존하고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이들의 ‘위선’과 ‘자기기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정신적 고통’과 ‘마음의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부모를 찜쪄먹을 정도로 망가진 자식은 부모가 살아있을 때에는 두고두고 그 부모를 괴롭힐 것이며, 부모가 죽은 뒤에는 그 부모의 이름을 더 더럽게 만들 것이다. 결국 악인의 가문은 대를 이어갈수록 열등한 유전자(정신적 불건강도 포함된다)로 바뀌다가 종래에는 멸종될 가능성이 많다(사회적 존재 가치를 상실한 유전자는 자연도태될 것이기 때문이다).

악인이 ‘자식의 심판’을 피할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악인 중에는 자기보다 더 악한 자식을 보면서도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미친 사람’에 근접한 이들도 있고, ‘자식을 낳지 않음’으로써 이 심판을 피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악인들이 아예 미쳐버리거나 자식을 낳지 않는다면 ‘자식의 심판’은 피하게 되겠지만 그것이 그나마 사회에는 해를 덜 입히는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권장할 만하다.


3. 무의식의 심판

‘민중의 심판’, ‘자식의 심판’이 타인으로부터 받는 심판이라면 ‘무의식의 심판’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심판이다. 이 심판은 절대로 피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을 다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기 ‘무의식’을 속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의 무의식에는 ‘양심’이 살아있기 마련이다(비록 그 양심의 힘은 매우 약할 테지만). 우리가 나쁜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 ‘죄의식’을 느낌으로써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바로 이 무의식에 굳건히 버티고 있는 ‘양심’ 때문이다.

혹자는 “악한 사람에게 무슨 양심이 있겠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심’ 자체가 없어서 ‘죄의식’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이미 ‘미친 사람’(속칭 ‘사이코’나 ‘괴물’)이기 때문에 그것이 주역이든 악역이든 간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 양심의 부재는 ‘나쁜 사람’과 ‘미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상세히 논할 것이다).

‘살인범’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법이나 경찰이 아니라 ‘죄의식’이다. 이런 점에서 살인범은 법의 심판을 피할 수는 있어도 ‘무의식의 심판’은 피하지 못한다(물론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악한 사람은 ‘죄의식’ 때문에, 잠을 잘 때 빈번하게 악몽에 시달리며, 초조감과 불안감으로 도무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다. 또한 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람은 ‘무의식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화려한 겉치장을 한 채 권력과 재물의 힘을 뽐내며 사는 악인들도 그 내면은 ‘무의식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루하루는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다 이러저러한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그러나 ‘죄의식이 없는 고통’은 견딜 수 있다.
정의를 위해, 민중을 위해 싸웠던 많은 애국자들이 모진 고문도, 죽음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 ‘죄의식이 없는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죄의식으로 인한 고통’은 정말로 견디기 힘들다. 그러니 악인들이 썩을 대로 썩어 들어가는 자기 마음은 돌보지 않으면서 부귀영화를 누린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악한 사람일수록 하늘의 심판(혹은 내세의 심판)도 두려워한다. 그래서 ‘면죄부’를 사려고 종교에 귀의하기도 하는데 그런다고 해서 ‘무의식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

악인들은 불리해지면, 선량한 사람들을 물귀신처럼 잡고 늘어지면서 다음과 같은 협박을 상습적으로 한다.

“나한테만 죄가 있냐? 너희들은 정말로 죄가 없냐? 어차피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없다.”

이런 협박은 상당히 교묘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움찔한다. 왜냐하면 엄밀하게 따지면 ‘죄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는데다가, 착한 사람일수록 자기비판적이기 때문이다(악인들은 타인비판적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을 가르는 ‘선명한 구분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기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여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지만, 자기 잘못을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악한 사람들은 더 이상 변명을 늘어놓거나 핑계를 대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민족과 사회 앞에 지은 죄를 깊이 반성함으로써 심적 고통에서 벗어나 단 며칠이라도 사람답게 살다가 죽어야 할 것이다.

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의 마음은 평화롭고 인생은 행복하지만 비딱하고 거짓되게 사는 사람의 마음은 고통스럽고 인생은 불행하다.

그러니 선한 사람들이여!
‘세상의 정의로움’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거친 세상의 풍파가 사납게 몰아쳐도 쉽게 좌절하지 말자. 그리하여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발걸음을 결코 멈추지 말자.
세 가지 심판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선한 사람들의 인생에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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