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위기는 노무현의 보수화가 아니라 불량의견과 불량정치의 만연

김보영 기자에게 답함: 진보를 향한 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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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석(풀벌레)등록 2007.05.10 20:45
안녕하세요. 김보영 기자의 답변 잘 읽었습니다. 김 기자의 답답함에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 기자가 그러한 답답함을 가지는 것은 김 기자의 진보적 성향 때문일 것입니다. 그 진보적 자세에 공감합니다. 대한민국이 보다 더 행복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찬사를 보내고, 저 또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며, 그 실현을 막는 장애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다를 뿐입니다.


정치개혁의 주체와 조건

김보영 기자는 참여정부의 정책이 대체로 실패했다고 봅니다. 실패했다고 보는 여러 정책들 중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정치 분야입니다. 김 기자는 지역주의를 약화하고 정책정당을 강화하려는 정치 분야 정책이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정치 분야 정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그것은 그냥 ‘정치개혁’이라 부릅시다.) 물론 저는 노무현의 정치개혁이 실패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실패할 위험에 처해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정치개혁이 실패할 위험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김 기자는 노무현 대통령을 정치 분야 정책의 ‘주체’ 또는 정책 집행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떳다방 정치인, 보따리 정치인, 지역당 등을 정책의 ‘조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이 매우 주요한 주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과연 지역당과 지역주의 정치인들이 조건에 불과하냐 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김보영 기자가 그런 존재들을 ‘조건’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그것들이 “노무현 대통령 이전에도 존재하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이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한 존재는 단순히 자신 이전에 존재하던 지역주의 세력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무현의 지지율 하락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지역주의 세력들입니다. 그 세력들은 정치개혁의 기본적 조건이 아니라, 정치개혁에 역행하는 반동 주체들입니다.

담배꽁초는 자주 화재의 원인이 됩니다. 그것은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담배꽁초를 화재 예방 정책의 기본적 조건으로 간주하는 데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저기 출몰하는 방화범은 단순히 조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화재 예방 정책을 무력화하고 반대하는 주체들입니다.


조건 탓과 남 탓의 불가피성

물론 그것이 조건이냐 주체냐 하는 문제는 큰 중요성을 지니지 않습니다. 소방수는 매일 방화범 탓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방수가 방화범의 위험을 알리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두고 단순히 화재 예방의 실패를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특히 정책의 조건 자체가 자유로운 행위자들인 경우, 조건 탓은 일정 부분 불가피한 것입니다.

정치개혁에 역행하는 행위자들은 지금보다 더 많이 비판받아야 합니다. 이런 행위자들이 정책의 조건이라면, “허구한 날 조건 탓”은 허구한 날 계속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조건은 궁극적으로 무력화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방화범은 계속 비난받아야 하고 지역주의 잔당들은 계속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지역주의 세력을 비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남 탓'이나 '조건 탓'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구태 정치인, 조폭 언론 등과 같은 자유로운 행위자들을 제거하거나 통제하기 위해 대통령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최소한 노 대통령은 헌법에 보장된 권한으로 그들의 발호를 막고 무력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만 그런 ‘서툰’ 노력 자체를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두 비난했습니다.

구태 정치인과 조폭 언론의 발호를 억제하는 책무는 정치 소비자들(유권자)과 의견 소비자들(독자)들의 몫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유권자와 독자는 오히려 누구를 탓했습니까? “남 탓만 하는” 대통령에게 그 모든 탓을 돌리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노무현을 탓하기 전에 그에게 선택 가능한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강간을 당한 여성이 강간범 탓을 하는 것 자체를 두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 피해여성을 탓하고 싶다 하더라도, 그 여성이 강간을 피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동원할 수 있었는지 먼저 따져 보아야 합니다. 비록 그가 역도 선수이고 유도 선수이고 레슬링 선수였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에게 강간범은 강간 현상의 단순한 조건이 아닙니다. 피해여성 탓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잘 알 것입니다. 강간범 탓은 계속되어야 하고 오히려 장려되어야 합니다.

아무튼 제 말의 핵심은 노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유아론적 주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수단에는 한계가 있고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의 통제를 벗어난 강력한 주체들이 대통령을 압박하고 견제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현실과 권력 구조가 이러한데도 왜 모두들 노무현 대통령 탓을 해야 하고, 노 대통령은 조건이나 남 탓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남 탓과 조건 탓을 무작정 무책임으로 돌리기 전에, 조건의 개선을 위해 대통령이 동원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들에 대해 먼저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정치나 언론 분야분만 아니라 사회복지 분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여정부의 정책적 기조는 복지강화

김보영 기자는 일관성 있게 노무현이 보수적 경향성을 지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 기자가 든 근거 중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을 먼저 지적하겠습니다. 그것은 국민연금에 관한 것입니다. 김 기자는 정부가 연금 지급률을 깎으려 한 것에 대해 복지의 후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김 기자는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과 합작하여 정부안을 반대하고 그 대신 통과시켜려 한 국민연금 개혁법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안은 정부안보다 연금 지급률을 더 많이 깎았습니다. 그것도 민주노동당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민주노동당의 극우화를 뜻합니까?

양극화 확대, 비정규직 확대와 차별, 사교육 비용 증가 등이 노무현 집권 내내 벌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과연 비정규직이 더 확대되고 더 심하게 차별받게 되었는가? 양극화 추세가 둔화되고 있는가 아니면 더 확대되고 있는가? 저소득층의 사교육비가 과연 증가하였는가? 저는 김보영 기자가 단정하고 있는 것만큼 명약관화한 통계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반대의 결과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주제를 여기에서 토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다만 참여정부의 정책적 기조가 과연 양극화를 심화하고, 사교육비를 증가하고,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것이었나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정책적 기조가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면, 우리가 분석해야 할 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현재 또는 장래에 정책적 효과가 나타날 것인가? 둘째, 그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또는 미진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몇 가지 통계자료들은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지만 효과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진하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원인 중에 정책 자체의 문제점도 있을 것입니다. 지식인들은 정책적 기조를 비판하거나 정책적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최소한 최근 열린우리당 해체 소동은 정책적 기조나 정책적 문제점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김보영 기자는 정책적 기조를 비판하고 있는 셈인데 특히 노무현의 보수화 기조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참여정부의 정책적 기조는 복지강화에 오히려 가까우며 다만 그 강도가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할 뿐입니다. 참여정부에서 제도적 진보가 없었다는 비판도 무지에 의한 오류처럼 보입니다. 대한민국이 ‘복지병’에 걸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만큼 (이 말은 얼토당토 안한 과장에 불과하지만) 제도적 조치들이 취해졌습니다.


한-EU FTA는 한국의 EU화?

김보영 기자는 FTA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한미 FTA가 “한국의 경제 체제를 미국식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미국식’ 경제란 “공공에 대한 시장의 철저한 우선주의”라고 정의합니다. 투자자-국가 소송제가 미국식 경제의 “가장 대표적 사례”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투자자-국가 소송제가 정말 미국식인지, 미국식이 철저한 시장 우선주의인지 강한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의심하는 것은 이뿐만 아닙니다. 한미 FTA가 미국식으로 가는 것이라는 데도 별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또한 미국식으로 가는 것이 보수화의 극단이라는 전제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다만 만일 한미 FTA가 우리 경제를 일방적으로 미국화하는 것이라면, 한EU FTA는 우리 경제를 일방적으로 EU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EU식으로 가는 것은 보수화의 역행입니까?

물론 한EU FTA는 통상협정에만 한정하고 법률 개정 사항은 없으니 한미FTA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쳐야 하는 법률은 무엇이며 그 개정사항이 우리를 정말 미국화시키는지 아직 논증되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FTA를 보혁 프레임으로 해석하려면 매우 많은 추가적 전제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추가적 전제들을 먼저 명료화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합리적 대화의 기반이 생길 것 같습니다.


보수-진보의 선택 기준의 붕괴가 지역주의 부활의 동인?

김보영 기자는 보수-진보의 경계선이 흐려졌기 때문에 정책정당의 가능성이 낮아졌고 지역주의가 부활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보수-진보의 선택 기준의 붕괴가 어떻게 지역주의 부활의 동인이 될 수 있는지는 좀 치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선택 기준이 없어 혼란을 느끼는 ‘진보적’ 시민들이 얼마나 되는지? 현재 얼마나 많은 ‘진보적’ 시민들이 노무현의 보수화 때문에 참여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는지?

제 글에 대해 많은 독자들이 비판을 했습니다. 그 비판 내용을 찬찬히 읽어 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노무현 정권이 실패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실패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수화와 무관한 것들이었습니다. 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연 ‘진보적’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진보적이어서, 진보적이지 않은 노무현에게 실망했다는 전제가 얼마나 타당한지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의견(오피니언) 시장에서 노무현의 성패를 가늠하는 기준 자체는 진보와 보수의 기준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것은 전통적 리더십을 해체한 노무현식 리더십에 대한 기성세대의 혐오일지 모릅니다. 이런 말하기 정말 싫지만, 전통적 (지역적 연고에 바탕을 둔한) DJ 지지자들의 정서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양자’ 노무현에 대한 실망일지 모릅니다. 자기 정파의 지분을 넓히기 위해 제각기 기획된 정치공학에서 나온 정치선동인지도 모릅니다. 영남에서 영남대로, 호남에서는 호남대로, 충청에서는 충청대로, 수도권에서는 수도권대로, 보수층에서 보수층대로, 진보진영에서는 진보진영대로, 재벌옹호론자들은 그들대로, 반미주의자들은 그들대로, 부동산부자들은 그들대로, 빈민층은 그들대로, 먹물들은 먹물대로.

대한민국의 위기는 노무현의 보수화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위기는 불량의견과 불량정치를 소비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견의 소비자들은 생산된 의견들이 불량품이 아닌지 검증해야 합니다. 정치 소비자들은 생산된 정치적 담론이 불량품이 아닌지 검증해야 합니다. 불량의견이 판을 칠 때 의견 소비자들은 의견 프로슈밍(생산소비활동 또는 공동생산)을 통해 의견 시장에 좋은 의견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불량정치가 판을 칠 때 정치 소비자들은 정치 프로슈밍을 통해 정치 시장에 좋은 정책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오만한 의견 생산자(언론)들과 정치 생산자(정치인)들의 독재를 종식시켜야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불량의견과 불량정치의 횡행을 종식시키지 못한다면 진보도 없고 복지도 없습니다.

김보영 기자를 알게 된 것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진보를 향한 김 기자의 갈증을 높이 사며 그 갈증을 우리가 공유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국 생활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단하지 않길 바라며 탐구와 성찰에서 큰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김보영 기자의 답변

안녕하세요. 당일날 아침에 노무현 대통령의 글을 보고 하도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2시간이 채 안걸려 써서 올린 글인데 이렇게 과도한 관심을 받게 되고 또 이렇게 많은 반론을 받게되니 약간 당황스럽긴 합니다. 어쨋든 변변치 못한 글에 관심을 가져주신데 감사드립니다.

학술적 논쟁으로 받아주시길 원하신다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온라인 신문 기사에 적합한 논쟁 형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안그래도 유학생은 공부나하라는 애정어린(?) 댓글들에 살짝 찔려오던 중에 반갑기도 합니다. 저도 한 수 많이 배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지역주의 극복과 정계 개편 실패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1차적 책임을 묻는 저의 인식의 근원에는 '형성주의(맞는 해석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constructivism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를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국가 정책을 평가할때 그 평가에 대한 이론적 배경은 크게 환경(context)을 중시하는 입장과 주체(agency)를 중시하는 입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사회학적 논쟁이 되겠습니다만 지나치게 복잡해질 것 같아 사회정책학의 수준에서 한정해서 논의하여 보겠습니다.

환경을 중시하는 입장은 대표적으로 실증주의(positivism)과 제도주의(institutionalism)을 들수가 있겠고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입장은 최근 정치학 사회학 외교학 분야에서 부상하고 있는 언어학적 접근(linguistic approach)이나 신념주의(ideationalism에 대한 역시 나름의 번역입니다.)를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이 양측의 접근이 모두 현실 정치와 정책과정을 설명하는데 제한점이 더욱 크다고 생각하여 이 양측의 장점을 수용하되 변증법적 원칙을 적용한 형성주의가 가장 유용하여 이를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일단 실제가 아닌 언어만이 존재한다는 언어학적 접근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객관적 환경요소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다만 인간이 모든 환경적 조건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 역시 받아들입니다. 종합하면 모든 환경적 조건을 파악할 수는 없으되 주체(agency)는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따라 전략적으로 부분적 조건을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이렇게 전략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된 조건 위에서 주체의 신념과 가치에 따라 목표가 설정됩니다. 그리고 조건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정책)들이 도출 되지요.

하지만 앞서 말한데로 모든 조건이 완전히 이해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략이 꼭 의도한 결과를 내지는 않습니다. 즉 ‘정책적 결과는 = 의도한 목표 + 의도하지 않은 조건의 영향’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주체는 가치와 신념이 있으되 전략적으로 사고하기에 그 정책적 결과는 다시 또하나의 조건으로서 이해되고 해석되어 다음의 전략을 발전시키는데 동원이 됩니다. 결국 ‘조건-전략적 주체의 행위(정책)-정책 결과’ 사이의 변증법적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론적 틀은 제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의 매우 기초가 되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그러니 이에 대한 반론은 적극 환영하며 저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말하자면 '최고 권력자로서의 주체'가 되겠지요. 님이 지적하신 떳다방 정치인이나 지역당들은 노무현 '대통령' 이전에도 존재했던 '조건'입니다. 이를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따라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이해하고 해석하였으며 이에 따라 '정계 개편'이라는 목표를 설정하였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집권 기간동안 '정책'을 펼쳤던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그 정책적 결과(지역주의의 부활)를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과에 대해서 계속 '조건' 탓을 하면 그것은 결국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행위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셈입니다. 속된말로 누가 몰랐습니까? 한국 정치 현실이 그런 것을? 허구헌 날 조건 탓만 하려면 집권은 왜 했습니까? 그런 '조건'에 의한 실패는 '파악되지 못했던 조건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뻔이 알고 인식하고 있는 조건에 대해 추진한 전략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보수 언론을 탓하던, 야당을 탓하던 그것도 다 마찬가지 입니다. 그거 원래 있는 조건이었고 다 알고 있었던 조건 아닙니까? 그 조건 때문에 5년의 집권 기간 이후에도 여전히 실패 했다는 것은 그 집권 5년을 실패했다는 얘기입니다. 즉 그는 '실패'한 것입니다.

복지와 한미FTA가 진보와 보수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부분에서도 역시 '형성주의'적 입장에서 말씀 드려 보겠습니다. 즉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노무현의 정치인의 실체가 아니라 그 정치인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인식되었느냐가 현실적으로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정말 노무현 개인이 어떠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지 제가 그가 아닌이상 알수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궁금한 지점이긴 합니다만 말이죠.

그럼 지난 대선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그당시 대통령 선거에 대한 정치적 구도는 보수-진보, 권위주의-민주주의, 외세의존 외교-자주적 외교, 개혁회귀-개혁지속 뭐 이런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도는 노무현 후보측에서 적극적으로 설파한 프레임이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당시 이회창 후보측이 주로 설파했던 경험있는 지도자-어설픈 지도자와 같은 프레임보다는 노무현 후보측의 프레임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진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 구도는 계속 노무현 정부를 좌파라고 공격하는 조선일보나 한나라당 등과 같은 요소에 의해 확대 재생산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말입니다. 그 덕에 여전히 노무현 정부는 '진보'의 옷을 입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집권 5년 이후 나타나는 결과는 그 반대입니다. 양극화는 확대되고, 비정규직 차별은 확대되어 왔으며 그 비중은 증가하였고, 사교육 비용도 계속 상승하고 서민들은 더욱 죽을 맛입니다.

그럼 이러한 결과는 올바른 전략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했던 다른 환경요소에 의해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까요? 문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전략 자체가 그 흐름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는 것이지요.

복지예산의 획기적인 확대까진 어렵다고 치겠습니다. 하지만 제도적 확대의 길은 IMF상황에서 김대중 정부도 어느 정도 이루어낸 사항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도 노무현 정부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지요. 한참 논의되던 근로소득공제제도(EITC)도 (개인적으로 크게 지지하진 않았지만 그나마도) 소리소문 없이 무산되었고, 최근 가장 주목할 만하던 제도적 변화였던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도 청와대의 무관심속에 제대로된 자원확보는 전혀 안된 상태에서 최소한의 수준으로 껍데기만 도입되었습니다. 극심한 국가제도에 대한 불신 속에서도 노인 부양에 대한 부담이 너무나 크기에 국민의 70% 가까이가 지지했던 제도가 말입니다.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국가를 통해 그 부담을 서로 분담하는 국민연금 제도는 미래세대 부담이 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냥 ‘깎았습니다.’ 그럼 국가를 통해 나눠주지도 않으면 그 부담은 어디로 사라진다는 얘기입니까? 마술이라도 부린답니까? 제도 안에서 개개인의 부담이 30%까지 치솟는다면 재원의 다양화를 통해서 해결해야 부담이 덜어지지 국가가 발을 뺀다고 해결될 리는 없는 것은 당연한 얘기지요. 이 개혁이 그대로 진행되면 향후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보일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이처럼 말로만 복지를 들먹일 줄 알았지 개개별 구체적인 쟁점에서는 ‘생각’조차 있었는지 심히 의심스러울 따름입니다.

사교육비 급증에 대해서도 노무현 정부 내내 시도했던 것들은 위성과외 등 기술적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꿀 시도는 일어나지 않았지요. 이른 점에서 그동안 수많은 이전 정부에서의 실패를 반복한 셈입니다. 이 부분은 그나마 아직 해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해가 되어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 한미FTA입니다. 자꾸 옹호하는 분들을 이를 ‘개방’이라고 생각하는데 개방은 이미 WTO체제에서 7~80% 이루어졌습니다. 즉 FTA는 개방이냐 쇄국이냐라는 옹호자의 논리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나 한미FTA는 통상차원이 아니라 경제체제 통합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은 ‘한미FTA를 통해 우리 경제제도를 개혁하겠다’라고 여러 번 강조 했던 노무현 자신의 발언에서도 여러 번 확인됩니다.

즉 결론적으로 한국 경제 체제를 미국식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미국식’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공공에 대한 시장의 철저한 우선주의입니다. 미국은 전국민 의료보험 조차도 없는 복지 후진국입니다. 공공보다는 개인이 우선하는 가치가 모든 시스템에 전제되어 있지요.

투자자-국가 소송제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투자자의 이익이 공공정책에 우선할 수 있는 것이지요. 노무현 대통령은 멕시코에서 실제 패소해서 변상한 금액이 얼마 안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이 제도로 인해 정책 고려 과정에서부터 투자자의 이익을 고려하게 되는 잠재적이고 더욱 포괄적인 공공의 비용을 무시한 협소한 단견의 소치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에서 투자자-국가 소송제에 제소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하겠다는 얘기는 정책 수립 과정에서 투자자의 이익을 매우 적극적으로 고려하시겠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제도가 전면 시행된 이후에 다른 대안을 추구할 공간이 협소해지는 새로운 ‘조건’이 형성됩니다. 단순한 제도적 시행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제약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로서 보수-진보의 프레임에서 진보적 선택으로 당선되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처럼 보수의 극단을 선택함으로서 그나마 존재하던 선택기준을 붕괴시켰기에 ‘적어도’ 정계개편을 원하던 노무현 대통령의 꿈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노무현은 그것을 열린 우리당이라는 ‘정당’으로 협소하게 보고 통탄하고 있다면 저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정치구도 측면에서 비판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A에 대해 B를 가지고 비판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근본적인 정치구도는 당연히 열린 우리당이라는 개별 정당을 포괄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쓰다보니 매우 길어졌습니다. 끝까지 읽으셨다면 감사드립니다. 전에 쓴 글과 걸린 시간이 똑같았네요. 길이는 배로 길어지고. 마치 전 기사의 해설판 같이 되어 버렸네요.

그럼 건승하십시오. / 김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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