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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제일 가난한 동네?
“엄마, 우리 동네가 인천에서 제일 가난한 거 맞아요?”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이 집에 오더니 밑도 끝도 없이 인천에서 우리 동네가 제일 가난한 것이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누가 감히 그런 말을 해?”하고 물으니
“엄마,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요. 인천에서 우리 동네가 제일 가난하다고 하셨어요. 정말인가요?”
참 선생님도 할 말이 그리도 없으셨을까.
어떻게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지는 못할망정 아이들의 기운을 죽이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의아했다.
설마 선생님께서 그런 말을 했을까 싶어 같은 반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자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혼내시다가 그런 말까지 나왔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을 이해할 수가 없다.
미래의 꿈나무인 초등학생들에게 가장 큰 꿈을 심어주고 앞으로 나아갈 큰 세상에 적응 할 수 있게 가르치지는 못할망정 정말로 가난한 동네의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하다니, 아들의 마음의 상처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나는 잠시 먹먹했다.
그 말을 들은 부모들도 펄펄 뛰었지만 그런 걸로 선생님을 찾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이들에게 부자와 가난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아픈 맘을 누르며 차분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그러시는데요. 인천에서 산동네가 있는 동네는 우리 동네 밖에 없데요.”
아들의 한마디가 나를 슬프게 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늘 산동네를 오르면서 꽃과 풀들의 대화를 들려주었고 우리가 이런 곳에 살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며 살라고 가르쳤고 산동네 위로 떠가는 맑은 구름들을 보며 우리 아이들은 동화 속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너무나 맑고 깨끗한 구름을 보며 8살짜리 딸아이는 “엄마, 천사들이 청소를 너무 깨끗하게 해서 구름이 저렇게 하얗고 예쁜가 봐요.”라고 이야기를 해서 나를 행복하게 해줬는데
그 산동네가 가난의 기준이 된다니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부자의 기준을 의심하게 된다.
5월이면 나는 늘 생각하면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기억 하나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현주랑 나는 쉬는 시간에 학교 뒤꼍에서
둘이서 번갈아가며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엎드리면 이긴 사람이 그 사람 등 위에 손을 짚고 그 등을 뛰어 넘는 높이뛰기 게임을 했다.
수업시작 종이 울렸는데도 가위 바위 보에서 이긴 현주가 나보고 얼른 엎드리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하고 교실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내 등을 짚고 넘던 현주가 그만 넘어져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
나는 교실로 들어가서 선생님께 알렸고 선생님께서는 현주의 발등을 마사지를 해주고
약을 발라주셨다.
수업이 끝났지만 현주는 걸을 수가 없었고 그런 현주를 선생님은 등에 업히라고 하신 뒤
나에게는 현주의 가방을 들라고 하셨다.
우리 동네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정도를 걸어가야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현주를 업고 그 먼 길을 우리와 함께 가셨다.
가다가 힘들면 현주를 풀 섶에 앉혀 놓고 땀을 닦으시고 또 가다가 힘들면 저수지 둑길에 앉아 쉬기도 하시면서 현주네 집까지 업어다 주셨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 선생님께서는 귤을 갈아 만든 주스 한 박스를 사가지고 현주네 집에 가셨고 현주네 부모님께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다쳤다며 연신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리셨다.
나는 중학교까지 밖에 학교를 다니지 못 해 기억에 남는 선생님도 많지 않지만
유일하게 내 기억 속에 5월이면 행복하게 자리를 잡으시는 ‘김성수’선생님이 늘 그립다.
그런 선생님이 간절히 그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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