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종격투기는 폭력의 극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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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연(hahah22)등록 2007.06.14 13:19

ⓒ 장형연

박남숙 용인시의회의원


이종격투기를 보면 로마시대로 돌아간 듯하다. 착각이 든다. 콜로세움에서 목숨을 내놓고 사투를 벌이던 검투사들처럼 서로 치고받으며 피를 흘리는 장면이 공중파 방송을 통해 여과 없이 방영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프로 씨름선수였던 2m 18cm의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이 k-1에 진출한 이후 이종격투기의 인기는 더욱 급상승하고 있다. 이종격투기의 대표적인 경기에는 k-1이 있는데, 말 그대로 k자로 시작되는 가라테, 킥복싱, 쿵후 등 서서 타격하는 무술 중에서 최강자를 가려내자는 경기이다.

관람하는 관중들은 잔인한 모습이 연출될 때마다 환호하고 열광하기 때문에 링에서는 선수들은 목숨을 내걸고 모든 싸움기술을 총동원해 상대방을 때려 눕혀야 하는 살벌한 경기에 내몰리고 있다.

처음 이 경기는 8각형 철조망 안에서 글러브도 착용하지 않은 채 모든 공격이 허용되었다고 하며, 경기를 하다가 죽어도 상관없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때려 눕혀야 하는 룰 때문에 미국에서조차도 한때 TV중계를 금지시켰다고 한다.

이것은 스포츠가 아니라 쌈질이다. 모든 싸움기술이 허용된다는 점에서 철저히 상업화된 싸움일 뿐이다. 경기 중 쓰러진 선수의 면상에 주먹질을 하고 안면을 무릎으로 가격하는 것도 허락된다. 이런 경기는 사실 법망에 걸리지 않는 한도에서 잔인하고 끔찍한 폭력의 극치를 보여주는 운동 아닌 폭력 그 자체이며, 사람을 죽이지만 않을 뿐 콜로세움의 광기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게임을 할 때 메디컬 체크를 한다지만 선수들은 장기적 뇌 손상과 후유증, 그리고 사망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 한 사실이다. 현대인들이 즐기는 이종격투기 경기는 자본주의 논리와 인간 내면에 잠재해 있는 폭력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말초적인 쾌감 때문에 인기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스포츠라 할 수 없다. 문제는 이종격투기가 아직 감수성이 예민하고 판단력이 부족한 청소년들에게 상당한 폭력성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격투기를 보고 즐기는 이유는 대리만족 때문일 것이다. 마우스피스가 튀어나가고, 피를 토해내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짜릿함을 느끼며 열광하는 관객은 이미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한 살인교사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은 사이버 상에서 무수한 폭력과 범죄행위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문화에 길들여진 젊은 세대는 아무런 죄의식이나 가치판단에 대한 기준이 없다. 폭력적 성향으로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윤리의식이나 죄책감같은 것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21세기를 열었지만 아직도 이런 원시적 야만사회의 모습이 도처에 비일비재하다. 사람들은 자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면 대개는 관심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불의한 일이나 난처한 문제가 발생하면 도피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하려 한다.

18세기의 영국작가인 올리버 골드스미스란 사람은 “침묵은 동의”를 뜻한다고 했다. 불의한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어도 그 불의에 대항하지 못하고 수수방관한 것은 묵시적인 동조를 한 것이다. 마틴루터킹 목사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악에 대해서 항의를 하지 않고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실제로 악에 협조하는 것이다.” 또 에드먼드 버크란 사람은 “악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선량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뿐이다.” 라고 주장했다.

에드먼드 버크가 한 말에 이런 것도 있다. “못된 사람들이 합칠 때에는 선량한 사람들도 뭉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한사람 두 사람 쓰러지게 된다.” 매일같이 불의와 부정, 그리고 폭력들이 일어난다. 세상이 이렇다보니 대수롭지 않다며 눈감아 버릴 때가 많다. 그러나 구조적인 큰 악에 대해서는 내가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큰 악이라며 나 혼자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슬그머니 자리에서 빠진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인 위기를 맞았을 때 중립을 지킨 사람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이종 격투기는 스포츠도, 운동도 아닌 폭력이며 악일뿐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방관자가 되어 생각하는 사람으로만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인가? 돌을 들고 나가진 못해도 소리라도 질러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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