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정치의 관계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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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미(blume21)등록 2007.06.30 17:43
로마. 순백의 날개를 날은 듯 우아하게 로마 가도를 당당히 걷는 네 마리 백마의 숨결. 동전을 던져 넣으면 사랑을 이룬다는 트레비 분수의 로맨스. 사자와 검투사의 처절한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군중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던 콜로세움. 화려한 타일로 장식된 목욕탕. 오드리 햅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사랑스러움이 깃든 스페인 계단. 로마의 이름엔 이 모든 역사가 묻어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2000여년의 세월에도 그 고결한 자태를 잃지 않는 수많은 신전과 핍박의 아픔이 묻어나는 카타콤베의 흙 한 줌의 역사를 비껴둘 수 없다. 로마에는 판테온 신전, 베스타 여신전, 아폴로 신전, 카스트로 폴록스 신전 등 그 이름을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신전이 있다.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신의 수가 30만이 되었다고 하니 많은 신전에서 떨어져 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도 미신 주술적 유물부터 국가 종교적 의례와 관련된 유적들이 적지 않다. 본고에서는 고대 로마와 한국을 비추어 종교의 기능, 특히 정치와의 관계성에 집중하고자 한다.


宗敎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기에 본고에서는 종교의 여러 일반적인 정의와 전문가의 논의를 각각 소개하며 그 속에 내재된 종교의 기능과 정치의 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은 종교를 특정한 믿음의 공유와 어떠한 도덕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각자의 믿음이란 정의에 중심을 두고 있다. 로마인에게 종교는 강력한 지도 원리 또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니었지만, 사회 전반에 神적인 믿음을 공유하고 윤리의식을 갖고 있었다. 로마인은 신을 경시할 때 로마제국 전체에 기근이나 질병 등 재난을 받게 된다고 믿음이 있었고, 국가의 모든 관리와 군사는 국가에 대한 충성의 표현으로 로마의 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다. 현실적인 로마인은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종교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를 확립했기에 번영할 수 있었지만, 종교와 미신이 가진 활용성을 무시하지 않았고, 인간이 가진 초자연적 힘에 대한 믿음을 실용적 관점에서 철저히 활용했다.

또 네이버 사전에서는 종교란 통상의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인간의 불안·죽음의 문제, 심각한 고민 등을 초월적 존재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것이란 관점을 주지하고 있다. 로마인에게는 전쟁도 종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타국과의 분쟁 처리나 선전포고뿐만 아니라 집정관의 임명, 민회 개최 등 온갖 중대한 국가 행위는 그에 앞서 신들의 의향을 묻는 새점에서 시작된다. 새점을 치기 전에 닭을 굶겨 모이를 잘 쪼게끔 하여 전쟁에 대한 군사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것을 병사들 스스로 알고 있어도 출정을 앞둔 시점에서 병사들은 전쟁의 승패와 자신의 생명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하기 마련이고 사소한 것에도 쉽게 반응한다. 새가 모이를 쪼았다고 해서 정말로 신적인 존재가 로마와 함께 있어 무조건 승리한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니다. 다만 전투에 앞서 새점을 치는 관행은 기존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신적인 힘을 빌려 병사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고 전투에 임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이기에 무한한 존재에 대한 의존심과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2000년 전 로마인들이 새점과 같은 초월적 상징에 의존하는 것이 21세기에 우리나라에서 흔히 지내는 고사에도 남아있다. 새로운 건물에 입주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영화를 찍기 시작할 때, 방긋 웃고 있는 돼지 머리를 놓고 그 입과 코에 돈을 끼워 넣으며 성공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특정의 종교를 심각하게 믿는 의식이라기보다는 만사형통하기를 바라는 단순한 기원으로 초월적 상징에 대한 막연한 의존심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앞서 살펴본 경우처럼 종교는 정치의 지도 원리로서의 수단보다는 대중 심리를 만족시키고 안정시키는 정신적 버팀대와 같은 역할로 사회의 윤리 의식을 고양시키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활성화하는 역할로 작용해야 한다.


잉거(Yinger)와 벨라(Bellah)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잉거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①정치집단과 종교집단의 일치, ②정치권력에 의한 종교의 이용, ③정치권력에 대한 종교의 도전” 세 가지로 구분한다. 벨라는「근대 아시아에서의 종교와 진보」의 서문에서 “종교와 정치, 사회관계를 종교적 이상과 현실세계사이의 융합(fusion), 분리(disjunction), 그리고 창조적 긴장(creative tension)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의 융합은 원시적 종교와 고대적 종교의 특성으로 종교가 단지 기존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거룩한 것으로 포장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자신의 지배를 확대, 심화, 공고화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려고 한다. 잉거의 두 번째 논의와 벨라의 융합의 논의는 한국고대사회의 전형적인 시조 숭배와 고대 로마의 황제 숭배에서 드러난다. 시조 숭배는 고대사회에서 가장 일반화된 조상숭배신앙의 범주에서 성립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조상제사는 사회적 결속을 위한 힘을 제공하며 사회 존속을 지탱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한국고대사회에서 국가의례는 정치, 사회, 종교 전반과 관련된 사회존립의 상징적 근거였으며 제사의례를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꾀했다. 삼국에서 진행된 시조숭배는 단순히 의례적 차원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국가적 권위의 원천이자 신성성의 근간으로 활용했다. 얼마 전에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주몽’에서 신녀 여미을의 존재는 ‘천지신명의 뜻’에 부합하는 국가의 경영을 의미한다.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의례를 주도하였고, 왕의 권위를 정신적으로 후원하는 역할을 하였음을 극적으로 볼 수 있다.

로마 또한 권력을 유지, 발전시키는 기능을 수행함에 있어 정치와 종교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국가형성 초기 단계부터 지배 권력의 합리화와 정당성을 위해 이념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종교적 권위가 필요로 하였고, 로마의 제국화로 인한 다종족․다국가 체제에서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 및 정치체제를 포용 또는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성격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다.

그렇다면 종교는 제국의 새로운 통치 원리로 어떻게 작용하였는가?

구체적으로 첫째, 고대 로마에서의 종교는 타국과의 유연한 정치․외교적 관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로마의 전통 종교에서 나타나고 있는 신의 성격은 초기의 농업적 신에서 도시-국가적 정치적 신들, 추상적 개념의 신격화와 그리스 신들의 수용, 동방의 외래신 유입, 그리고 황제숭배의 단계로 이어졌다. 이같이 로마의 전통 신관은 고정 불변의 토착신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외래 신에 대해서 개방적이며 융통성 있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로마는 그리스 및 소아시아 출신의 신들을 수입함으로써 그들 지역의 호의를 얻고 외교관계를 확대하였고, 같은 종교를 가짐으로써 같은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로마는 필요에 따라 자신이 정복한 민족들의 신들을 무시하거나 모욕하지 않고 패자가 믿는 신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주며, 패자의 신들 중에서도 중요한 신은 카피톨리노 언덕에 신전을 세워서 모셨다. 이러한 공동체적 결합은 그 자체가 신성한 것이었고 매년 신들에게 바치는 제의를 통해 공동체 성원의 안녕 즉, 제국의 평화를 기원하였다.

둘째, 종교의례와 황제 숭배 의례는 自治體의 생존논리이며, 제국에 대한 충성의 표현이었다. 예컨대 그리스인들 역시 로마제국의 지배라는 새로운 외적 권위에 대해 이를 거부하기보다는 합리화․순응하여 자체의 신성관념에 융합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생존논리로서 활용했는데 지방의 전통적 종교와의 결합하는 방식 또는 해당 도시의 수호신이나 전통 신들과의 결합하는 형태로 황제 숭배 의례를 자발적으로 시행하였다. 황제는 종교적 축제에서 영예를 얻었고 황제의 형상과 관련된 의례는 황제를 신으로 취급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면서 종교의례가 충성도․정치적 친밀감을 표현하는 경쟁수단이 되었다. 이처럼 로마 제국의 정치적 조건 속에서 황제숭배는 이중적 지배 계급의 통치 논리로서 유효하게 작용하였다. 즉, 로마 본국의 지배 계급에게는 제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유효한 통치논리가 되었고 각 지방의 토착적 지배계급에게는 로마와의 외교적 관계를 통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고, 해당지역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는 생존논리가 되었던 것이다.

앞서 살펴본 고대 로마와 고대 한국에서의 황제 숭배와 시조 숭배는 잉거와 벨라의 논의처럼 종교적 형태가 모두 국가통치의 근간으로 활용되었으며 국가성장의 단계에 부응하여 체계화되는데 수단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종교는 특정한 믿음을 공유하는 것이므로 현대처럼 다양한 가치와 서로 상이한 믿음을 공유할 경우 내지 다수가 동일한 믿음을 공유하지 못할 경우, 더 이상 지배의 원리 또는 통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거나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기능할 수 없다. 정치는 종교와의 유착관계를 떠나 스스로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와 규범의 정당성을 이끌어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현존하는 사회질서에 순응하게 하는 합법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반면, 앞서 논의한 바와 달리 종교는 사회를 변화시키거나 사회의 부조리나 모순, 경제적 불평등과 부정의, 정치적 부패와 타락에 대해 비판하며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기능도 하고 있다. 다신교 국가였던 고대 로마에서 이와 같은 “정치권력에 대한 종교의 도전”과 “창조적 긴장관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기에 1970년대 이후의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기독교에 조명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커밍스(Cumings)는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의 상황을 남미와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교회는 반체제 인사들의 긴급피난처 구실을 해왔으며 교회는 정권의 침탈에서 상대적으로 면제된 유일한 기관”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장집도 “1970년대 이후 교회만이 강대한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하나의 사회집단으로서의 자율성을 지켜나갔으며 교회가 정치적 반대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면서 다른 반체제세력에게 일종의 피난처 구실을 해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1970년대 한국은 사회경제적으로는 산업화와 고도의 경제성장으로 인해 산업구성원의 변화와 사회적 불균형을 양산했다.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전략은 외자를 끌어들였고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이루어 상류계층에 편향되는 경제성장이론을 설립하였다. 이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에 따른 도시 노동계급과 농민의 상대적 박탈감이 고조되고 정치적 불안정이 더욱 고조되어 사회적 통합의 위기를 경험했다. 정치적으로는 정부의 개헌과 특별조치법으로 인해 언론의 사회비판적 기능이 둔화되었고 국민의 정치 참여의 수단인 집회, 결사의 권리가 제약됨으로써 합법적인 정치참여의 수단이 제거되었다. 정치의 행정화, 효율화, 합리화 현상으로 관료주의적 문제해결과 관료적 지배양상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사회 배경 속에서 학생과 종교계에 의한 체제 저항적 정치운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국가에 의한 강제력으로 시민사회가 미분화되고 수축하고 있을 때, 교회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유형, 무형의 자산을 토대로 시민사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국가에 의한 억압적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저항운동을 벌인 교회들과 도시산업선교회, 민중교회 등이 지배 세력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된 성찰의 공간을 제공하였고, 진보적 성직자 계층과 기독자교수협의회 그리고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참여하는 인사들이 노동자계급이나 여타 다른 계급과 제휴하면서 여타 진보적 사고의 기반을 제공하였다.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권력에 대해 저항하는 자세가 바로 교회의 선교의 의미로 이해되어졌기 때문이다.

유신 시대의 종교 구체적으로 기독교는 국가의 폭력성과 억압성을 깨닫는 시기에 사회 변혁운동 세력의 후원세력으로 또는 사회 변화의 방향성을 제시하려는 기능을 하였다. 이와 같이 종교는 정치, 경제, 사회에서 발생하는 복합적인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서는 비판 의식을 고조시키고 변화를 유도하는 도전으로 말미암아 하여 정치권력과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일치되어 종교의 가르침을 정치적 목적에 맞게 해석하여 십자군 전쟁의 비극을 겪기도 했으며, 최근에 이르러서는 聖戰의 명목 하에 테러를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 속에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와 거리 유지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다. 본고에서는 고대 로마와 한국을 돌아보면서 이 의문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였다. 요약컨대, 첫째, 종교는 사회의 불안 심리를 안정시키고 사회와 개개인의 윤리 의식을 고양시켜 사회에 긍정적으로 피드백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둘째, 종교는 정치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보좌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정권의 통치와 권력 스스로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셋째, 종교는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항하여 정치와 창조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종교는 정치는 전혀 별개의 영역의 여집합이 아니다. 또한, 종교⊂정치, 종교⊃정치, 또는 종교=정치의 공식관계도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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