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으로 간대요.

이민교회의 단기 선교에 대한 단상

검토 완료

조석진(cho3237)등록 2007.07.27 10:19
저희 가게로 어떤 아주머니가 들어옵니다.

우리 부부가 교회에서 만난 아주머니입니다. 여기 교회는 지역적으로 가깝거나 아니면 나이가 비슷한 부부끼리 가정목회를 가지도록 하고 있더군요.

'목장'이라 부르기도 하고 '텐트'라고 부르기도 하는 평신도들의 모임으로 서로간의 신앙심을 자라게 하는 배려입니다. 가톨릭교회의 반모임, 구역모임과 같은 것입니다.

들어온 아주머니는 '맹순이' 아주머니였습니다. 이름이 맹순이가 아니고 저희 부부가 붙여준 별명입니다. 평소 좀 '맹..'한데가 있어 그렇게 우리끼리 부르고 있습니다.

마침 인터넷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피랍된 단기선교팀 뉴스를 듣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데요?"

아주머니가 묻습니다. 아내가 "아직 그대로이네요. 참 딱하게.."

"글쎄, 우리 교회에서 아프가니스탄 단기 선교팀이 출발하기 하루전에 일어난 사건이지 뭐예요. 대신 요르단으로 간대요."

마치 롯데 백화점에 물건이 없어 옆의 신세계백화점으로 간다는 식으로 태연자약하게 대답하는 아주머니를 보내고 나서 한참을 지나서야 무언가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 이민사회에서도 교회의 교세확장 경쟁이 굉장합니다.

지난번에도 오마이뉴스에 이민교회를 나간 단상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만 여지없이 '생나무'처리가 되었습니다.

저가 쓴 오마이뉴스 기사를 본 '뉴욕 중앙일보'의 오피니언 칼럼 담당자가 글을 보내달라기에 똑같은 이민사회의 교회 이야기를 보내니 편집 담당자가 '너무도 정확한 이야기'라서 싣지 못하겠다고 답장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글을 싣다가는 신문판매에 지장이 생긴다고 하더군요.

교회는 세계의 어느곳이든, 어떤 문제이든 간섭할 수 있지만 교회를 간섭할 권한은 이 지구상의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듯 합니다.

저는 다시금 이곳에서 느낀 교회에 대한 지난번 글을 아래에 그대로 베껴싣습니다.

다시금 편집과정에서 '생나무'처리해도 좋으나 이번 아프간의 불행한 사건에는 서로들 몰려가는 단기선교의 폐단이 분명 있는 듯 하여 다시 한번 옛글을 올립니다.


제목: "비지니스라구요?"
일자: 07-05-12
등급: 생나무


'비지니스'라구요?
이민사회에서 본 한인교회
조석진(cho3237)


이곳 이민사회에는 유난히 교회가 많습니다. 한인들 10명만 모이면 먼저 교회부터 만든다는 말이 있지요.

이민전에도 아파트 베란다에서 밤중에 담배라도 피울라치면 곳곳에 서있던 빨간색의 십자가들이 마치 공동묘지를 연상시키곤 했지요.

네온사인이라도 차라리 하얀색의 십자가라면 그리 무서운 느낌이 없으련만 전부 붉은 색의 십자가라 마치 무덤이 나열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뜻하는 붉은 색이라고 하겠지요.

한국에서 줄곧 살아온 저도 가끔은 낯선듯 바라다 보는 밤동네의 십자가들을 외국인들은 정말 낯설게 본다고도 합니다.우후죽순이란 말을 그럴 경우에 사용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이곳에도 작은교회 큰교회 이름도 천양지차로 붙인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모두들 지친 이민자들의 영혼을 위무하는데 그렇게 열심히 희생적으로 활동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허나 때때로 보는 이민수기에서는 대놓고 이민오면 절대로 교회가지마라는 글도 있습니다.

아마 교회에서 억울한 일이라도 당해서인지 노골적으로 지역과 목사명도 거론한 음해성 이민수기를 올린 사람도 있습니다.

다들 피곤한 이국생활에 그래도 같은 동포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신앙단체를 찾게 되고 다양성과 지역편리성에서는 단연 개신교 교회가 앞장을 서고 있지요.

개척교회까지 치면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 있어 가끔 나들이 길에 마주치는 '무슨무슨 교회'라는 한글 간판을 보면 반갑기도 하고 속으로 '여기까지 한인교회가?...'하는 의아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쓰러움은 교인은 몇명이나 될까?하는 혼자만의 궁금증마저 일어킵니다.

그런 작은 시골교회를 보면 이곳도 토론토 위주의 대형 한인교회는 많은 교역자를 전면에 배치하여 기세좋게 나아가는 대형선단에 비유되는 반면 시골교회는 작은 돛단배와 같아서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닙니다.

같은 목사라도 누군들 작은 교회를 담임하여 목회를 하고 싶겠습니까마는 작은 교회와 큰 교회를 다닌 저의 경험으로는 그것은 순전히 교회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 목사 개인능력에 죄우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종의 마케팅 능력(?)이랄까요.

큰 교회는 본당에 들어설 때에 이미 신자들은 기가 죽더군요. 죽 도열하여 '눈도장'으로 출석을 체크하는듯한 여러 교역자와 부목사들의 악수를 거쳐야 입장하게 되더군요.

왜 그렇게 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예배가 마칠때면 목사 사모님까지 마중을 하는 큰 교회의 특색이 있더군요.

탄탄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전도에 힘을 기울이야만 큰 교회로 성장을 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교회조직론이란 신학교의 과목이 있을 정도이고 로마시대에서도 살아남은 초대교회의 그 무서울 정도의 질긴 '조직력' 말입니다. 근세에 들어 사회주의자들도 그 교회조직에서 그들만의 '조직이론'을 만들었다고도 들었습니다.

평신도 2년을 마치면 올라간다는 '집사'한번 못하고 그만둔 저이지만 교회에 그런 많은 계급이 있다는 것을 다녀보고서야 알게 되었죠.

원래 가톨릭으로 기독신앙을 접한 저는 구교와 신교는 마치 다른 종교 이상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가톨릭이 기업으로 치면 '공기업'이라면 개신교 교회는 수익성을 최대의 목표로 치는 사기업, 그중에서도 유명한 재벌급쯤 될 듯 싶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거룩하지 못한 일을 지면에 올리는 일을 이곳에서도 한국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바로 맞아죽을 짓이 되기 때문이죠.

이 세상 무슨 죄를 지어도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성경의 무서운 귀절로 응징하는 자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묻습니다.

그러는 당신네들은 누구에게 그런 성령과 하느님의 독점권을 인정받았냐구요?

교회에 가면 마치 하느님과 전속 라이센스 계약을 맺은 듯이 날뛰더군요.

즉, 이웃 교회도 아니고 바로 자기네 교회에서만이 구원이 이루어지고 다른 목사가 아닌 바로 자기네 목사의 말씀만이 '정통'하다는 그런 얼토당토않는 신앙을 가지고 있더군요.

특히 핵심조직에 속한 전위부대로 열성파들이 그런 특공대-특별히 공부도 못하면서 대가리만 큰 우둔한 사람을 일컬음-노릇을 하더군요.

참으로 희한한 경험을 많이 하였지만 일일히 나열하여 기술하지는 못합니다.

세세히 열거할수록 분통이 터지기도 하고 왜 그리 우둔한 자세로 스스로 구약의 율법에 얽매였는지 하는 의문이 자꾸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긴 수많은 이민교회가 있지만 뒤틀리고 소외된 영혼구제에는 얼마나 진심으로 다가가고 있을까 묻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불행한 일에 수많은 한인교회가 무슨 역할을 했던가하는 참회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세탁소에 들리는 자재납품업자인 캐네디언 '체스'영감에게 저가 묻습니다.

"헤이, 체스, 넌 교회 안가니?"

"안가."

"왜?"

"어릴 적엔 갔지. 하지만 지금은 안가. 몽땅 '비지니스'거던."

'비지니스' 바로 회사와 같은 경영체란 말이지요.

저도 동감합니다. 바로 비지니스와 비슷한지는 아닌지요. 그것도 아주 좋은 비지니스.

첫째가 원료가 들지 않습니다. 무한한 '하느님의 말씀'이 성경책 한권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둘째가 부작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팔아도 고객불평이 있을리 없습니다. 있다면 순전히 고객의 신앙심 부족이라는 책망으로 다스리면 끝납니다.

세째가 애프터 서비스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네째가 외상이 없습니다.

이런 '비지니스'니까 다들 바쁘게 세우고 있지만 주님은 글쎄요 이런 교회 세우기에 급급한 것을 바랄까요. 일부 넘치는 대형교회는 제3세계, 저들만의 표현으로 '미전도 종족'선교까지 나가니 그야말로 '글로벌 비지니스'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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