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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31일, 이랜드 사건에 두 번째로 공권력이 투입됐다. 민주노동당을 비롯하여 이랜드 노조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사회단체들은 기간사업장도 아닌 이랜드 파업장에 공권력을 두 차례나 투입하는 것은 공권력 남용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법원 또한 지난 7월 25일 이랜드가 낸 영업방해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해당 영업장을 점거할 경우 건당 노조는 1000만원, 조합원은 100만원을 이랜드에 지급하라고 판결한데 이어, 31일에는 17개 뉴코아 매장에 대해서도 배상책임을 묻도록 해, 사회적 갈등을 중재해야 하는 행정·사법권력의 역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반면, 국민여론은 노조보다 사측과 정부의 책임을 더 크게 묻고 있다. 지난 7월 24일부터 25일까지 진행된 한길리서치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50.4%는 이랜드 사태의 책임이 정부에게 있다고 답했고, 27.2%는 이랜드 사측에 책임이 있다고 답했다. 총 77.6%의 국민이 정부와 이랜드 사측에 책임을 물은 것이다.
국민들은 이번 사건의 본질과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불안 문제의 심각성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지만, 사측과 정부는 국민의 의사와 정반대로 공권력을 집행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연행과 구속, 통장 가압류라는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고 있음에 비해 정부와 사측은 국민의 의사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나라를 움직이는 최고 권력, 즉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데, 왜 국민의 의사와 반하는 국가결정이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이는 우리의 87년 헌법체제가 성숙해진 정치의식을 바탕으로 한 국민의 의사가 정치체계 내로 투입하지 못하도록 만든 엘리트주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엘리트 민주주의의 탄생과 국민(people)의 주권 행사권 박탈
근대적 의미의 헌법은 프랑스 혁명 등 근대 시민혁명의 결과로 출현했다. 물론 일본과 독일의 경우처럼 시민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개혁의 일환으로 헌법체계를 근대화한 경우도 있었지만, 현대적 의미의 헌법의 본류는 근대 시민혁명, 특히 그중에서도 프랑스 혁명의 결과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당시에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뚜렷하게 자각하고 혁명을 주도했음에 반해, 평범한 보통 민중들은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다. 물론 민중을 헌법의 중요한 담당자로 설정한 일부 선각자들이 존재했지만, 헤게모니를 장악한 부르주아 계급은 대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동력이었던 민중을 정치에서 배제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국민을 분리할 수 없는 단일한 집합체이자,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전일적 존재라고 보았다. 국민은 동일한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는 동일성만이 강조되면서 개개인의 차이와 개성은 말살되었으며, 단지 선출된 의원만이 국민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주권의 소유와 행사는 분리되었다. 주권을 '소유한' 국민은 의원에게 주권 행사를 위임하게 된다. 이때의 위임은 자유위임, 즉 대표는 자신을 뽑은 유권자의 의사와 독립적으로 양심에 따라 판단하도록 한다. 의원은 지역구가 아니라 전체 국민을 대변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반면 소수의 선각자들이 주장한 주권론은 국민을 개별적 시민의 총화로, 즉 국민전체를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체로 보았다. 국민을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는 개인의 물리적 결합이라고 간주하여, 개개인의 직접참여가 중시되고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가 유권자의 의사에 종속되는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했다. 이때 선출된 의원은 명령위임원칙에 따라 유권자의 의사와 반하는 활동을 할 때 소환될 수 있다.
순수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법규범을 적용해야 하는 범위와 규모의 확장이라는 불가피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동기보다는 부르주아가 봉건잔재를 청산하는 동시에 아래로부터의 민중저항을 차단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따라서 초기에는 남성, 재산가들만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소유할 수 있었고, 그것이 당연시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지배하는 규칙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인민의 자기지배' 사상이라는 것을 볼 때, 순수한 대의민주주의, 즉 소수만이 정치를 독점하는 엘리트 민주주의는 출발부터 민주주의의 취지와 어긋났던 것이다.
물론 20세기 초반 이후 노동자들과 민중들의 투쟁으로 보통선거제도가 확립되면서 선거의 민주적 성격이 강화되었고, 대의민주주의에도 부분적으로 직접민주제적 기제가 도입되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가 우후죽순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면서 민중들의 저항을 체제내화하기 위한 시도였다.
대한민국, 과연 절차적으로 민주적인가?
그렇다면 우리 헌법은 '인민의 자기지배'라는 민주주의의 본래 원칙에 얼마나 충실할까? 현행 한국 헌법은 올해로 꼭 스무 살이 되었다. 1948년 제헌 이후, 그 어떤 헌법보다도 '민주적인 동기'에 의해 개정된 87년 6공화국 헌법은 역대 헌법상 가장 오랜 수명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87년 헌법은 그 내용이 민주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6월항쟁이라는 개정 동기상의 이유 때문에 민주헌법이라 불린다. 내용상으로는 엘리트 민주주의에 충실한 것으로 일반 국민의 의사를 국가운영에 투입할 수 있는 제도적 경로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일반적으로 대의제 민주주의에 충실한 나라에서도 대표자들과 국민의 판단이 다를 때, 국민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직접민주제적 제도를 부분적으로나마 도입하고 있다. 국민투표·소환·발안제와 같은 최소한의 직접민주제적 조치를 도입해 대의제 민주주의에 따른 일반 국민의 정치적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헌법 체제는 이러한 최소한의 보완장치 조차도 마련해 놓고 있지 않다.
① 국민투표제
현행 우리 헌법체제는 국가수준에서 이 세 가지 요소 중 국민투표제만을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나 이 조차도 거의 유명무실한 제도다. 우리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되어 있고, 제130조 2항은 헌법 개정에 관한 국민투표 규정으로 "헌법개정안은 국회가 의결한 후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여 국회의원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난 2004년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탄핵결정문'에서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신임투표'에 대해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재신임을 국민투표의 형태로 묻고자 하는 것은 헌법 제72조에 의하여 부여받은 국민투표부의권을 위헌적으로 행사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민투표제도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남용해서는 안된다는 헌법적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했다. 이것은 헌재가 그나마 존재하고 있는 국민투표제를 매우 엄격하게 해석하여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대의민주주의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문제를 국민의 직접 참여를 통해 해결하려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다. 지난 30년간 32개국에서 실시된 41개 국민투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법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경우는 30건, 없는 경우는 11건, 헌법적 강제성을 가진 것이 15건, 국민제안에 의해 4건, 정부나 의회가 자문을 구하기 위해 22건의 국민투표가 있었다.
국민투표제를 도입한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투표를 발의할 수 있는 연서규모다. 미국의 경우 비록 주 단위이긴 하지만 연서규모로 워싱턴주는 선거인의 4%, 캘리포니아주는 5%, 오리건주는 4%, 오하이오주는 6%, 로스 앤젤러스는 10%, 코발리스시는 10%를 규정하고 있다. 규모가 작을수록 높은 비율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 수가 3천5백만명 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최소한의 연서규모로 유권자의 5%(약 175만명) 정도를 고려할 수 있다. 얼마 전 한미FTA 반대운동진영이 국민투표를 요구하며 받은 서명인 수가 2007년 8월 현재 147만명이다. 이것이 실제 국민투표가 불가능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5% 서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실현 가능한 대안이 존재하면 참여 동기는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②국민소환제
유권자가 헌법 의무를 저버리거나 불법·부당 행위를 한의원을 임기 중에 투표를 통해 해임할 수 있는 주민소환제는 2006년 5월 2일 지방자치 수준에서 통과되어 최근 하남시를 중심으로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한 주민소환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17대 총선에서 대부분의 정당이 국민소환제 도입을 공약으로 제시했고, 2006년 3월에도 여야 의원 21명이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의원 수준에서 국민소환은 아직 도입되지 않고 있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권이 없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국민의 심판은 차기 선거 때나 가능하다. 그러나 재선이 불가능한 대통령의 경우 국민이 심판할 기회가 없을뿐더러 설령 재선이 가능하도록 개헌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다음 선거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뿐이다.
우리 헌법이 국회의원에 대한 소환제를 명시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자유위임원칙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유위임원칙에 따라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표자는 선거구의 유권자의 의사와 독립해서 활동해야 함으로, 유권자는 자신이 선출한 대표를 소환할 권리가 없다.
헌법 제46조 제2항은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이 자유위임원칙이나 대의제에 관한 정의규정이라기 보다 국가의사 결정과정에서 준수되어야 하는 일련의 헌법적 당위를 규율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국회의원 면책특권을 보장하고 소환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것을 볼 때 자유위임원칙에 근거하여 해석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물론 명령위임원칙을 택하더라도 유권자의 의사를 의회로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권자가 하나의 단일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매번 투표를 통해 의사를 확인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면 대표자는 전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유위임원칙보다 명령위임원칙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명백히 유권자의 의사와 다른 결정을 임의적으로 내리는 대표자에 대한 국민의 통제는 명령위임원칙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유위임원칙 하에서 대표자를 소환할 사유는 정치적 결정에 대한 문제가 아닌, 개인의 도덕성과 관련된 문제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분명한 정치적 의도를 가진 결정도 ‘양심’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소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민의 자기지배’라는 원칙에 부합하는 국민소환은 일상적으로는 유권자 개개인의 의사를 묻기보다 대표자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결정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일반 국민이 용납할 수 없는 정치행위에 대해서는 소환이 가능하도록 명령위임원칙을 적용하는 것으로 구현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특정 집단의 특수이익을 위하거나, 지역 이기주의에 악용되지 않도록 어떻게 ‘제한적’으로 적용하게 만들지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 대목이다.
③ 국민발안제
국민이 직접 중요한 법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한 국민발안제의 경우 1972년 7차 개헌에서 폐지되었다. 다만 지방자치법 13조 3항의 조례의 제정 및 개폐에 대한 주민청구 조항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오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대통령령이 정하는 주민 수 이상의 연서를 통해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조례의 제정이나 개폐를 청구할 수 있다는 정도의 것으로 강제성을 띤 것은 아니다.
자신을 규제할 규칙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민주주의 원칙은 바로 법을 만드는 주체가 원칙적으로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현재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이 법안을 만들고 있지만, 이 과정에 국민의 의사가 있는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사학법과 같은 개혁입법은 국민의 지지가 매우 컸음에도 불구하고 정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개악에 개악을 거듭하고 있다. 국민주권이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정치엘리트에게만 입법권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한국에서 법은 국민 의사를 대변하고 보호하기보다, 소수의 엘리트지배를 정당화하고 고수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존재했던 입법권은 이제 주권자인 국민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의 직접적 주권 행사를 구현하기 위한 과제
그러나 국민의 의사와 괴리된 ‘직업정치인들’이 망쳐놓은 한국 정치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 직접민주적 요소를 도입한다 하더라도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① 대중지지를 바탕으로 한 독재 가능성
먼저, 여론의 직접 투입은 충분한 토의과정을 거치지 않을 경우 자칫 여론조작을 통한 왜곡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전체주의나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박정희 유신독재나 나찌의 독재도 국민투표를 통한 압도적인 지지로 정당화되었다는 점을 볼 때, 국민투표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나 독재는 국민투표 때문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독재세력이 국민투표를 악용한 것이다. 국민투표를 진행하지 않았더라도 독재체제가 형성되었으리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오히려 국민투표에 대한 두려움의 진짜 이유는 국민투표가 가지는 민주적 정당성이 독재권력을 정당화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민다수의 동의를 얻고 나면 유신독재든 나찌 지배든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어 이에 대한 저항의 정당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허나, 진정한 민주주의, 그리고 그 발전은 의사결정과정이 민주적이었다 하더라도 구성원의 잠재적 오류가능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집단적 결정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집단 결정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곳이라면 ‘진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어떤 결정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국민다수의 동의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민주적 문제제기는 여전히 정당하다. 오히려 집단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한번 내려진 집단적 결정에 대한 문제제기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민주적 발전을 가로막는다.
문제는 국민들이 이성적인 성찰과 판단에 근거하여 공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논의하기에 충분한 정보습득이 가능한가에 있다. 프랑스 헌법학에서는 나폴레옹 1세와 나폴레옹 3세하에서 국민투표가 악용되었던 경험에 기초하여, 민의에 의한 정치수단으로서의 국민투표를 레퍼랜덤(reférendum)으로, 민의에 의한 정치를 실질적으로 부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플레비시트(plébiscite)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즉, 투표 대상이 되는 법안을 의회에서 사전에 충분히 공개 심의하고, 공평한 선전기회를 보장하며, 국민에 의한 토론 시간을 보장해야 레퍼랜덤으로 기능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플레비시트로 변질될 가능성이 커진다.
아직도 우리 국민들은 공적인 문제에 관해서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으며 정부가 공적인 정보의 대다수를 독점하고 있다. 또한 작업장과 산업에서 고용주와 노동자 간에 정보 공유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럴 경우, 정보를 독점한 조직이나 단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여론조작을 꾀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으며, 정보에 접근할 수 없는 이들은 이들의 선동에 상당히 취약해 질 수 있다.
문제는 정치적 의도를 가진 이들이 정보를 통제하고 민의를 왜곡하는 것에 있지 국민의 정치수준 미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은 이미 수세기에 걸친 정보화의 흐름에 의해서 의식과 정치에 대한 안목이 증대되었고 인터넷을 비롯한 방송매체의 도움으로 현실에 대한 정보도 더욱 용이하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직접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정보의 민주화’가 진행되어야 하며, 특히 국가 중대사에 대한 국민투표 시, 관련된 모든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는 것이 법제화되어야 한다. 또한 여론조작 등의 시도에 대해서는 엄중한 법적 책임을 묻고 다양한 주장이 공평하게 제시될 수 있는 심의(deliberative)의 장이 만들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② 심의민주주의와 결합문제
앞의 문제와 연동된 것으로써 최대한 왜곡 없는 민의의 수렴을 이루기 위해서는 깊은 심의를 통해 집단적 의사를 결정하는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와 결합해야 한다. 어떤 형태가 그 운영에서 국민의 직접적인, 혹은 간접적인(명령적위임이라는 의미에서 간접) 참여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인지, 또한 지역정치공동체 간의 의견 대립을 어떻게 조율하여 국가수준의 의사결정으로 만들 것인지 등에 대한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국가 수준의 의사결정 과정을 전자민주주의와 결합시켜 볼 수도 있다. 물론 사이버 공간은 그 즉흥성으로 인해 의사결정의 질이 떨어질 수 있고, 세대, 빈부, 지역, 활용도 등에서 나타나는 정보격차(digital divide)가 새로운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럼에도 웹 2.0의 발달로 쌍방향적인 의사소통의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해체하고, 자기 교육적 효과와 자기지배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을 성숙시켜 새로운 공공담론의 장을 열어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통제된 위임권력이 국가수준의 심의민주주의를 구현해 나가더라도 이 과정이 폐쇄된 공간에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자민주주의가 결합되어야 한다. 이는 온라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보왜곡과 여론 조작을 어떻게 극복하고, 국민의 직접 참여를 뒷받침하게 만들 것인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③ 국민적 갈등 첨예화의 문제
첨예한 사회적 갈등과 관련된 의제일 경우, 승자독식의 의사결정 방식이 오히려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거나 소외된 소수자집단의 불복 문제 등이 불거질 수 있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직접민주주의에서만이 아니라 대의민주주의체계 아래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이념적 갈등은 점차 가열되고 있으나 이런 현상은 그동안 억눌려 왔던 사회적 갈등이 공식적으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장통과 같은 것이다.
사회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야에 대한 결정을 의회체계 내부로 제한시켜 놓는다고 해서 심의민주주의를 통한 타협과 양보의 정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타협과 양보를 위해서는 정당제도가 사회적 균열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어야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에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첨예한 사회적 갈등 때문에 국민의 직접적인 정치참여가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불균등적인 의회체계가 국민 다수의 의사와 ‘무관한’ 정치적 타협을 계속하는 것을 합리화 시켜주는 주장이 될 수 있다. 직접정치를 진행하는데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현 대의제에 비해 더욱 심각하다고 할 만한 근거는 부족하다.
다수결로 인해 선택되지 않은 소수의견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특정 성격의 민주주의 문제라기보다 민주주의 일반의 문제라는 점에서, 성숙한 민주의식 함양을 위한 대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주권을 가진 평범한 국민이 실제 주권을 행사해야
현재 한국의 헌법체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주권은 국민이 가지고 있으나 그 행사는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파병 문제에서, 한미 FTA 체결 문제에서, 그리고 이랜드 사태와 같은 국가적 문제에서 항상 국민의 의사는 ‘참고사항’일 뿐이었다.
규모와 의제의 범위가 확장된 현대 민주정치에서 대표자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과거 아테네 민주주의와 같은 직접민주주의는 매우 소규모로 조직된 지역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그 실제 원칙에 근접한 방향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 여러 나라들은 지방적 수준만이 아니라 국가적 수준에서도 국민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다양하게 보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도,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굳건한 세계관을 소유한 소수의 직업정치들에게 모든 정치적 결정권을 맡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중요한 문제는 국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체계를 모색해야 할 때가 되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공권력이 일방적으로 사회적 강자편을 들고 있는 이랜드 파업과 같은 사태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일상적으로 ‘행사’될 수 없다면, 지갑 안에서 꺼내 쓸 수 없는 지폐와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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