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사지’에 가보지 못했다면 답사의 고수가 아닐지니.

영암사지(靈巖寺址) 이야기

검토 완료

김성후(intar)등록 2007.09.05 17:38

* 폐사지라도 다 같은 폐사지는 아니다

 

자기 스스로 아니면 남에 의해 답사의 고수라고 하는 사람들은 폐사지를 좋아하거나 좋아하는 척해야 한다. 답사객의 가슴 속에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담겨있지 않던가? 폐사지야말로 자신의 유식(有識)함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쉽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곳은 폐사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 폐사지에서 자신이 얼마나 알고 느끼는가에 대한 반성이 없더라도 말이다.

 

답사의 초보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한다. 폐사지는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는 내용이 부실하다. 좀 더 이력이 붙어 중급 정도의 답사자들은 답사지에 대한 신화나 전설, 역사나 기록 등에 비추어 이야기해주면 좋아한다. 폐사지는 여기에다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주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이 적기 때문에 과거의 어느 시대로 돌아가 그에 맞추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기에 폐사지를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는 스스로 답사의 고수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다.

 

(사진 1, 영암사지 전경)

 

폐사지라도 다 같은 폐사지가 아니다. 누가 언제 무슨 까닭으로 세웠으며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 알 수 있는 폐사지가 있는 반면,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겨우 몇 줄의 기록으로 과거를 새롭게 재구성해야 하는 곳도 있다. 경남 합천의 영암사지는 후자의 전형으로 답사의 고수인 척하려면 반드시 찾아가봐야 할 곳이다. 


 

* 영암사지와 관련한 자료

 

보통 영암사지와 관련된 자료로 무엇이 있을까 싶어 답사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1023년에 만들어진 영암사 적연(寂然)국사 탑비문 밖에 없다고 한다. 비문을 찾아서 읽어봐도 영암사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고 스님께서 국사(國師)로 개성에서 활동하다 이곳 영암사로 은퇴한 뒤 열반에 들자, 그의 부도를 모시고 생애를 기록한 내용이라 실제 영암사의 탄생에 관한 자료는 없는 셈이다. 하지만 최근에 영암사와 관련한 자료가 몇 몇이 더 나옴으로 인해 영암사와 관련한 시절을 조금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진 2, 영암사지 귀부)

 

현재까지 알려진 영암사와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자료는 강원도 양양의 사림사(沙林寺) 홍각(弘覺)선사의 비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비문 또한 완전하게 남아있지 않고 일부만 존재하는데 그 기록을 보면 “(?)年 後於靈巖寺 修正婁月”라고 하여 “홍각선사는 영암사에서 몇 달 동안 선정을 닦았다”라는 기록이다.

 

홍각선사의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17세에 출가하여 법랍 50년이 되던 해인 헌강왕 6년(880)에 입적했다고 하기에 역으로 출생년도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813년이 된다. 그럼 810년경에 출생하여 830년 전후에 출가한 뒤 840년 전후로 영암사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나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9세기 중반 즉 850년 이전에 이미 영암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영암사라는 직접적인 이름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경남 산청 지곡사(智谷寺) 진관(眞觀)선사의 비문에 보면 “선사는 918년 영암산 여흥선원(靈巖山 麗興禪院)에서 법원(法圓)대사를 친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여흥선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옛날에는 절의 이름과 지명인 산의 이름을 같이 부르던 경우가 많으므로 영암산을 영암사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특히 지곡사와 영암사의 거리가 아주 가까우므로 이 상상이 그리 허황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어서 앞에서 말한 적연국사 비문이 있고 그 다음으로 인동(仁同 , 현재 경북 칠곡)의 선봉사(僊鳳寺)의 대각국사비문이 있다. 대각국사 의천이 입적한 뒤 그의 부도를 선봉사에 모셨는데 그 부도비의 비문 음기(陰記)을 보면 영암고달(靈巖高達)이라는 글이 나온다. <역대고승비문>(이지관 역, 가산문화사)의 번역을 보면 “거돈사 원공국사의 신측(神則)과 영암사 적연국사의 고매(高邁)한 달경(達境)과  ~~”라고 되어있다.

 

이런 기록에 비추어볼 때 영암사는 최소한 850년 이전에 설립되어 있었으며 고려 초기까지 그 사세가 아주 번성한 절임을 알 수 있다. 영암사의 매력은 이렇게 크고 번성한 절이 언제 무슨 까닭으로 사라져버렸는지 그 기록이 없어 답사객을 혼돈에 빠뜨린다는 점이다. 결국 영암사의 멸망 또한 상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영암사는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없어 그 이전에 폐사되었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추파 홍유(秋波泓宥, 1718-1774)라는 스님의 추파집(秋派集)에 “黃梅山 古英俊國師居 其下禁有靈巖寺舊墟(황매산 옛날 영준국사(적연국사의 諱)가 머물던 영암사 옛터가 그 아래 있는데...”라고 되어 있어 18세기 이전에 영암사는 폐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영암사지가 보여주는 것들

 

영암사지를 찾아 나서면 그 흔적만으로도 내가 잘못왔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가장 먼저 멀리 황매산 모산재의 화강암이 우리를 반겨준다. 붉은 색감을 가진 화강암에 검은 흔적은 마치 겸재 정선이 붓을 휘둘러 금강산을 묘사한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일단 산세에서 한 수 접어주어야 한다.

 

(사진 3, 모산재 전경)

 

그리고 영암사지를 찾아서 올라가면 가장 먼저 커다란 석축을 만난다. 신영훈 선생은 <한옥의 조형의식>이란 책에서 이 석축의 기법이 아주 우수함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석축이 둘러싸고 있는 규모와 수구(水口)에서 불국사와의 동질감을 느꼈다. 영암사지의 규모를 감히 불국사에 비유하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사진 4, 발굴 전 영암사지 수구, 사진 5, 정리된 영암사지 수구, 사진 6, 불국사 수구 : 옆으로 나란히 사진 배열 요망)

 

석축을 돌아서 올라가면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와 쌍사자 석등을 만난다. 제법 싸돌아 다녔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 대단한 인물인양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편인데 여기서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고 말았다.

 

(사진 7, 무지개다리와 쌍사자 석등, 사진 8 삼층석탑 : 옆으로 나란히 사진 배열 요망)

 

그리고 아래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있고 금당터로 올라가면 기단부의 사자와 소맷돌의 가릉빈가를 만난다. 기단부의 사자를 삽살개가 아니냐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이 귀여운 모습에서 어금니가 드러난 것이 보인 이후로 사자로 인정하고 말았다.

 

(사진 9, 기단부의 사자, 사진 10, 소맷돌의 가릉빈가 : 옆으로 나란히 사진 배열 요망)

 

뒤로 돌아 올라가면 부도비의 귀부가 2기가 나란히 있다. 하나의 귀부는 문양이 흐릿하지만 하나는 그 문양이 뚜렷한데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비석을 세우는 자리에는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모양의 쌍어(雙魚) 문양이 있고, 등 뒤의 귀갑문에는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아마 이렇게 화려한 귀부는 쉽게 찾을 수 없지 않나 싶다.

 

보이는 것이 이 정도이니 보이지 않는 것까지 상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라면 진정 영암사지는 꿈의 답사지가 아닐까 싶다. 

 

2007.09.05 17:3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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