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보다 부유하게

참을 수 없는 문국현 생각

검토 완료

이재천(fernway)등록 2007.11.05 18:01

딜레마에 빠져 사람들을 웃기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단체 모임에서나 혹은 만나는 지인들에게마다 진지하게 묻는다.
 

“혹시,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문국현에 대한 글 읽어보셨어요?”
 

“아니요?”라는 그들의 대답에 대뜸 맞추는 나. “다행이군요.”
 

한참 진지하게 물었던 것에 비추어 내 대답은 순간 사람들을 혼란시키면서 웃음을 터트리게 만든다.

 

나는 ‘대통합민주신당’(민주신당)의 당원으로 작년 지방선거가 끝난 뒤 반한나라당, 비한나라당의 민주평화개혁세력의 대통합이 아니면 대선을 이길 수가 없다라는 대명제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민주신당에만 촉각을 맞추고,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대통합정당에서 대통령을 만들어야 한다는 공동의 사명감을 가지고 대선 정국을 지켜보며 살고 있다.


문국현, 결코 모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작년 후보 물망에 오른 이후 올해 범여권의 대통합 물살에서 그 이름이 거의 뜨지 않았다. 시민사회측 후보라고 알려진 사람이지만 시민사회 대표라는 사람들이 대거 대통합신당에 밀고 들어올 때도 문국현 그 사람을 후보로 추대한다거나 하는 말들 또한 없었다. 그래서 결코 만만치 않은 대선판에서 이 사람도 고건 전 총리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처럼 자가 도태한 것이려니 하고 편하게 넘어갔다. 

 

나는 문국현 이야기를 보름 전까지는 읽기보다 듣고 살았다, 남편에게서. 남편의 이야기가 날이면 날마다 얼마나 열렬하고 흥미진진한지, 문국현은 여고생 두 딸이 있는 우리 가족의 중요한 화재가 되었다. 우리는 감동을 받고, 토론을 하고, 비전을 말했다. 그 어느 날, 남편의 한 마디. "문국현은 너무 늦게 나왔어"하며 탄식하는 소리에, 내가 "그 말 들으니 참 마음이 놓이네" 해가지고 아이들이 한바탕 웃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민주신당에서 후보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는 문국현 때문에 딜레마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들만의 리그’, ‘한나라당 후보 대통령 추인’과 맞설 ‘그의 전쟁’을 나는 아주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고,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승리를 꿈꾼다.

 

공부 못해 쳐진 자식 이야기, 에피소드라고?

 

말로만 듣던 ‘감동’과 ‘눈물’의 경험으로 나도 어느덧 공감 문국현의 대물결에 들어갔으니, 가슴을 울리는 그 사람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일하며 말하고 글 쓰는 사람으로 나에게 큰 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에피소드는 많다. 아니, 무궁할 것이다. 생각이 있고, 말 잘하는 사람으로 기업운영이라는 큰일을 해본 사람이 자신의 철학과 경험과 성과를 개념화하고 사건화하기로 한다면, 그리고 대통령 하기로 마음먹고 국민들에게 자신을 팔기로 작정을 했다면 그의 에피소드는 넘치고 넘칠 것이다. 그 중에 그냥 나를 울린 것은 그 말로만 들었던 ‘비정규직 딸’ 이야기 속에 묻어나는 부모의 고통이었다.
 

“공교육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과외 교육을 안 시켰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고,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조금 해서 대학은 갔지만 정규직이 될 만큼 잘 한 것 같지는 않아서….”
 

그 날의 우리 집 대화 주제는 자녀교육이었다.
 

“심상정이 그건 하나의 에피소드라고 말했네?”
 

남편이 말한다.
 

“심상정이라는 사람, 결혼 했어?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그 사람은 자식을 정말로 진지하게 키워보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네. 이 시대 속에서 자식을 어떤 사람을 만들 것인가, 이 시대의 부모로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 고통스럽게 선택해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아.”

 

부모가 초기 교육 과정에 있는 자식을 챙긴다는 것은 거의 비슷하다. 물적으로는 과외와 특기 교육에 투자하고, 심적으로는 똑똑하고 잘난 아이 만든다고 아이를 기죽인다고 생각하는 어떤 일도 안 한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 셋을 학원에 보내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도록 아이들이 뛰어다닐 수 있을 때부터는 무섭게 달구고 키웠다. 학원을 보내지 않은 것은 경제적 이유와 함께 학교 선생 말을 안 알아듣는 아이가 학원 선생 말은 알아들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아서였고, ‘사람 어려워 할 줄 알고 귀한 줄을 아는 아이’로 키우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에 대해 민감하게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그렇게 벌벌 떨면서 챙김을 받아본 적이 없이 큰 아이들은 공부에서나 특기에서 그리고 자신감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보냈다. 드러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침마다 지옥에 가듯이 학교에 갔다가 인간의 모든 기운이 다 빠져간 듯 돌아오는 소위 ‘부적응아’도 있었다.

 

긴장과 경쟁이 아닌 평안과 평화의 꿈

 

문국현 이야기에 앞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세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사람 자식을 만들자는 거야, 아니면 바보 병신을 만들자는 거야”하며 몸서리를 치며 가공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미래를 담보한다는 심정으로 아이들을 공부로나 특기로 몰아 부칠 수가 없었다. 사랑하며 소중한 내 아이들의 영혼을 생각할 때 결코 그 아이들을 경쟁적으로 비교하고 경쟁의 대상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들 앞에서 경쟁과 비교의 언어를 써본 적이 없다. 나는 내 아이들의 삶과 환경을 놓고 내가 평생을 살면서 느꼈던 문제들을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본질적인 삶의 태도와 방식의 문제였다.
 

내 가슴에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처럼 늘, “이렇게 냉혹하고 잔인한 흐름 속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라는 외침이 있었다. 내 아이들의 존재는 비로소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만들 것이었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매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나의 이성과 지성, 그리고 스스로 지니고 있는 철학과 인격의 일관성 혹은 모순들이 드러날 것이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고 믿게 해주고 싶은 것은 결코 경쟁과 긴장이 아닌 평안과 평화였다. 인간에 대한 믿음, 이 세계는 안전하고 믿을만하여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안정감을 나는 아이들이 갖기를 바랐다.

 

세 아이가 초등학교에서부터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가는 모두 합해 삼십 년이 넘는 시간과 과정 속에서 우리 부부는 치열하게 느끼고 간단하게 선택하곤 했다. 그것은 거의 뭘 하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돈 들어가는 일은. 주변 사람들은 은근히 나를 심나해 했다. 자기들도 나처럼 하고 싶지만 세상과 현실을 보면 결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경쟁 사회에서 도태해? 아무려면 못 먹고 살 세상이겠냐, 내가라도 데리고 살지.”
 

내 자식들을 방거청이 만들겠다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아이들의 인간적인 능력 -섬세하고 민감하며 다정하고 따뜻하고 또 정의로운 (이것은 다 엄마로서 보는 아이들의 심성이다)-으로 이 아이들은 세상을 잘 살아낼 것이다라는 믿음과 희망을 나는 가져야만 했다. 그리고 어느덧 아이들은 세상의 행․불행의 잣대에 휘돌리지 않을 내적 힘이 나이와 함께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보았고 믿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히 날마다 행복했다. 내가 아이들의 인간성을 그대로 믿은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민과 동정으로 가득 차 있는 아이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배를 잡고 웃다가 눈물을 흘리다가 한다.

 

문국현은 존경받는 가장 아니면 독재적인 가장

 

다시 문국현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를 흥분시켰던 것은 ‘BMW'이야기였다. (여기에서도 나는 남편의 말 전하는 능력을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똑같은 말을 내가 글로 읽는 것과 남편으로부터 전해들을 때 이해와 감동을 천양지차로 만드는 사람이다, 원래.) 나는 비로소 가난과 내핍의 상태, 그리고 절약과 근검의 의무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충격과도 같은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문국현 그 사람은 존경받는 가장이거나 지독히 독재적인 가장일 거야.”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문국현의 경영 능력, 기업가 정신을 인정하자면, 비로소 우리나라에 경제정의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들지만, 그의 에피소드에서 엿볼 수 있는 실천적인 삶이야말로 내가 오랜 동안 가지고 있었던 화두를 풀 수 있을 사람이라는 흥분이 밀려 왔다. 바로  소비와 경쟁이었다.


소비 욕구와 과시 욕구라는, 비본질적이지만 인간이라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런 욕구를 의지적으로 통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더욱이 부자들, 특히 부자 가족들이 절제를 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더구나 돈이 인격과 자존심이 되어버린 우리나라 같은 사회에서는 말이다.
 

문국현의 ‘BMW' 일화는 문국현이 졸부가 된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 세계적 감각의 기업가답게 합리적이고 평이한 가정경제를 꾸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여기에서 문국현은,  “상류층에게 있어서 사회적 책무와 감정의 이끌림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는 행동” 이라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나는, 문국현을 알지도 못하고 그것도 주로 전해 듣기만 했다면서도 두 개의 에피소드를 놓고 그를 찬양해마지 않고 있다. 거기에 나는 그 동안 정치 비평과 정치인 비판을 무수히 써 댄 사람이다. 전체를 모르면서도 이 두 가지 에피소드만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동을 하는 것은, 그 조그마한 것으로도 감동할 수밖에 없는 사회 속에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변명을 하고 싶다. 우리 사회의 정치 지도자, 그리고 기업인들이 조금만 달랐으면, 나나 다른 사람들이 이토록 ‘문국현, 문국현’ 하면서 찬양하는 사회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우리나라는 가장 천박하고 위기 상태의 가치의식을 가진 나라로 전락해버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물질만능. 나는 ‘부자 만들어 주겠다’ 라는 것이 대선 주자의 공약이 되던 작년 가을 이후 부자 정치를 깰 무엇인가가 이번 대선에서는 나와야 된다고 간절히 바랐다.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망할 것이다라는 위기의식이 깊이 사무쳤다. 막연한 바람으로 정신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도 했다.
 

그래서 지난 겨울엔 다시 간디를 열심히 읽으며 간디에게서 해답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경제가 아닌 철학으로 풀어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간디 때의 인도보다는 그래도 낫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철학적인 가치관의 논쟁이 선거라는 현실의 문제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경제 문제, 먹고 사는 문제, 잘 사는 문제에 모든 것이 맞추어져 있었다.
 
국민을 한없이 궁핍하게 만드는 사회

 

우리나라는 진즉 양극화한 사회경제 문제가 노정되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대적 빈곤의식에 거의 잠식되어 버렸다. 자녀교육에서는 외국 언어연수를 보내지 못하면 가난한 집안이 되었고, 구매력으로는 홈쇼핑에 나오는 것은 살 수 있어야 먹고 산다고 할 수 있는 집이 되었다. (나의 이런 관점은 엄밀한 기준에서 빈곤층에게는 결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꼭 말해야 할까?)

 

그러면서 나는 더 비싼 것을 더 많이 사고 더 많은 돈을 쓰고 살면서도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빈곤의식과 궁핍감의 근원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은 홈 쇼핑 채널을 통해 구매를 부추기는 세계의 부자들에게 이미 볼모가 된 사회였다. 경쟁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은 건전한 가정경제를 유지할 수 없을 규모의 사교육비 지출을 당연시하면서 더 많은 수입이 필요했다. 그리고 과학과 위생, 건강과 아름다움, 장수와 노년대비라는 신화에 잡혀 홈 쇼핑을 통해 선전해대는 온갖 상품들을 구매하느라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러니 금융이나 부동산, 증권으로 수입을 늘일 수가 없는 집의 남편은 부수입을 올리기 위한 수단을 강구해야 하고, 부인은 집에서 자녀 돌보고 살림만 하는 것에 죄의식이 들어 얼마라도 돈벌이 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이 몰려 버렸다. 너무도 필요한 것이 많아 더 많이 벌긴 하지만, 그 안에 행복과 자족은 점차 사라졌다. 사람들은 쉴 짬이 없는 것이다. “노예는 쉴 틈이 없다”라는 그리스 속담이 있다. 노예가 행복할 리가 없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조금도 놀랍거나 이상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소비 사회는 무언가 소비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자극하고 이용하지 않고서는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고를 통해 세계의 부자들은 ‘이전 것보다는 새로운 것, 모자라는 것보다는 남는 것이 더 좋은 가치’ 이고, ‘인간은 원하는 것을 구매함으로써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세뇌시켰다. 그러니  ‘부자 만들어 준다’는 대통령이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는 나라다, 우리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 경쟁하는 한편 소비도 경쟁하는 이런 나라가 과연 유지될 수 있을까. “필요에 지배당하는 삶은 노예제도와 같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사비나 리들, 바바라 슈베더 자매는 한 책에서 “우리가 훌륭한 그리고 고분고분한 소비자가 되는 것, 즉 원하는 것을 생각 없이 구매하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성숙하고 독립적인 성인으로 발전하는 데 방해가 된다”라고 했다. 의존적이고 미성숙한 국민들이 많은 사회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바로 이렇게 국민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에 따르면 ‘거머리 같은 국가들의’ ‘도둑 정치인’(테크노크라트)들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국민을 경쟁시킨다. 물건을 팔아먹기 위해서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보다 더 노골적인 분석이 있다. 리들, 슈베더 자매는, “우리 사회는 그 구성원을 가능한 한 미성숙한 상태로 남게 만들고 싶어 한다.” 

 

이명박이, “기업도, 교육도 경쟁해야 한다. 이 원칙에는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부부 두 사람만 해도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경쟁의 이명박식 실천방식을 박근혜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불법과 비리와 거짓말’이 아니겠는가?

 

‘경제만 아는 문국현’이라는 말은 과연 성립가능한 표현인가?

 

철학서에 ‘부자 되는 인간의 기본적 사고’라는 것이 있을 수 없듯 정치영역에서도 물질적 가치관을 신봉하는 구호가 나와서는 결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치인은 국민들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권리와 이익을 신장시키기 위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내야 하지, 빈부의 차이를 가치로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비를 경쟁적으로 부추기는 그런 흐름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길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공격할 수 있는 대안이 없었다. ‘세계화의 덫’, ‘세계화의 두 얼굴’(원제는 ‘세계화의 간극’인데 세계화가 양면성이 있는 것처럼 제목을 붙였다.) 같은 세계화의 문제들을 잘 파헤친 책들이 적지 않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경제정책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정치인은 민노당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세계화의 이념과 흐름을 부정하는 것은 고립주의자, 패배주의가, 비현실론자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진 듯, 모든 정책의 대전제는 세계화였다. 세계화는 길이요 진리가 되어 세계화 앞에서는 그 어떤 똑똑하고 싸납다는 정치인도 물러지고 유연해졌다. 
 

또한 그동안 대통령이나 장관, 정치인들이 중소기업을 살린다는 말은 누구라도 했으나 대책은 하나도 없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경제에 문외한이었던 것이 문국현의 출현으로 드러났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열린당의 경제정책들이 모두 비슷비슷한 것이 경제 전문가가 없었던 이유였다. 신자유주의 흐름에 정면 도전하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문국현이었다. 
 

이 사람의 메시지는 크게 울린다. 그만큼 생생하다. 이명박에 맞서 그는 우리나라의 발전방향에 있어 아주 생산적인 논쟁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나는 믿게 되었다. 이번 선거에서는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핵심이 될 것이라고 나는 기대하고 기대한다.

 

문국현은 ‘경제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경제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이라면 그를 믿게 된다. ‘문국현은 경제만 안다’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의 중소기업 이야기, 비정규직 이야기가 경제만의 이야기인가?  지식노동자를 말하는 것이 경제만의 이야기인가? 이것들은 다 사람 이야기 아닌가?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일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교육을 마친 젊은 남녀들을 그들의 가치와 능력보다 너무 낮게 인정하는 사회, 특히 젊은 남성의 경우, ‘스스로 가정을 만들고 최소한 일부분이라도 가족을 부양하고 싶은 소망’이 좌절당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무슨 희망이 있다는 말인가. 이런 단순하지만 전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사회의 기능을 전반적으로 마비시키고 쇠퇴시켜 결국은 파멸(전쟁이나, 폭동)로 몰아갈 고용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인간적으로, 현실감 있게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 문국현이다. 
  
"현실 민주주의의 탄생은 경제가 발전할 때만이, 그리고 평등의 정신이 정치철학뿐만이 아니라 경제의 기본이념으로 자리 잡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얼 쇼리스 같은 사람들의 이런 주장들이 진보주의자들의 관념에 불과하여, 어느 국민도 동감하지 않은 채, 구석의 한  목소리, 책 속의 한 구절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정치인이 주장하여 정치영역에서 정책으로 채택되고 실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비로소 문국현을 통해 보았다. 내가 문국현을 생각하는 것은 대통령의 가능성을 넘어 정치 패러다임, 우리 국민들의 가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사람으로서이다.

 

아무나 절대 부자 될 수 없는 나라, 그러나 이명박보다 부유하게

 

국민을 부자 만들어 준다는 부자 대통령 후보 이명박이 부자가 된 방법은 박근혜의 또 다른 말을 빌리면 탈법과 투기와 조작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부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노교수님이 가끔 하시는 말씀이 있다.
 

“사실, 착한 사람은 왜 착하냐, 나쁘게 쓸 권력이 없어서 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꼭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 이명박을 미워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알아두기를 나는 바란다. 그렇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명박이 부자가 된 것은 그렇게 쓸 수 있는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이명박을 좋아한다고 해서 결코 부자가 될 수는 없다고. 

 

그레고리 블라토스라는 사람은 탐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 내렸다.
 

“다른 사람에게 속한 부동산, 부인, 사무실 따위를 빼앗아 자신의 이익을 얻는 것, 또는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당연히 갚아야 할 것, 지키기로 한 약속이나 갚아야 할 돈, 좋은 평판이나 명성에 대한 존경을 거부하는 것.”
 

지금 우리나라 부자들이 쓰는 돈을 보면 바로 탐욕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부자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지 않을까? 합병을 하고, 투기를 하고, 이자 수입에 의존하고, 세금을 떼먹는다. 이명박은 박근혜의 주장이 다 거짓이라고 하니, 이 탐욕의 정의 가운데 적어도 ‘좋은 평판이나 명성에 대한 존경을 거부하는 것’ 하나만큼은 그에 들어맞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명박의 부유함이 부럽고 그가 부자 만들어 준다는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정말 할 말이 없다. 

 

경쟁적인 사고는 자기 성찰이 불가능하다. 경쟁을 좋아하고 권력의 힘으로 경쟁을 부추기는 지도자는 결코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성찰적 사고의 윤리적이고도 지적인 힘을 망각한 국가가 앞으로 얼마나 더 번성할 수 있을 지는 두고 볼 일이다. 특히 그런 나라가 세계적으로 지도적인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심히 의심스럽다.”는 얼 쇼리스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성찰적 사고의 윤리적이고도 지적인 힘’을 망각한 지도자가 과연 어떻게 국민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인지. 나는 국민을 한없이 가난하게 만드는 소비사회의 경쟁구조를 거부할 수 있는 내적 힘이야말로 이명박보다 부유한 자신을 만든다고 믿는다.

스스로 한없이 결핍을 느끼는 지금 한국 사람들이 거치없이 선호하는 가치관에 편승하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장사다. 이에 반격하고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민주주의, 통일, 평화, 개혁, 공동체, 환경, 여성 등의 기존의 정신과 이념을 나열해서 반복하는 것은 전혀 학습효과가 없다. 감동을 주는 정치를 하겠다고 말한 정치인치고, 그 사람 말을 들으면서 감동했다라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쉽게 감동하는 한국 사람의 정치인 보는 눈은 지독히도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러니 아무리 현실정치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념적인, 그리고 정신적이고 이상적 가치가 없고서는 국민을 감동시킬 수 없고, 창조적 에너지가 나올 수 없다.

 

정신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의 화두,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나는 문국현을 통해 엿보았다. 우리 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나의 위기의식은 거창하게도 철학하는 대통령을 염원하게 만들었지만, 해답은 다른 데서 주어졌다. 철학하는 대통령은 아니더라도 경제를 제대로 아는 인간적인 대통령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철학이라는 것을 이상과 관념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이라고 했을 때, 문국현 그 사람도 철학을 하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으랴.

 

정치인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치도 일종의 시장인데 검증받지 않은 상품이 마케팅 잘 되는 일은 별로 없다. 정치시장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다."
 

민주신당의 대선 주자였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문국현 후보에 대해 한 말이다. 일단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토를 아니 달 수가 없으니 나는 그 사람이야말로 정치모독을 해온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을 열광하게 만드는 문국현, 감동의 물결을 이룬 사람 문국현도 정치시장판, 그것도 대통령 선거판에 자기를 던졌으니 검증이라는 이름의 비판과 비난, 약점이 그의 감동적인 일화와 창조적인 스토리텔링의 뒤에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말 되는 것은 조직과 정치적인 뒷받침, 정치인으로서의 검증과정이 없었다는 점이다.

 

나는 문국현 후보가 정치권을 부정하는 것이 도를 넘지 않기를 바란다. ‘문국현 발(發)’ 정치개혁을 바라기에는 우리는 이미 노무현 학습효과를 거쳤다. 소위 '정치개혁'의 실험은 권력획득의 또 다른 이름으로 판명되었는데, 문국현 후보 자신이 그렇게 거리감을 두고 싶어 하고 ‘재래식 정당’이라 폄하해 마지않는 사람들에 의해 말이다. 지금 시대에 혁명은 불가능하다. 정치의 발전은 세대간, 계층간의 통합 속에서 점차적인 발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무리 기존 정치권이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정치권을 부정하고 정치판에 뛰어들겠다는 것은 소수의 지지자만을 만들어 내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그의 정치인 비하와 정당 매도의 선은 국민들의 가려움을 긁어주고, 분노 혹은 절망을 공감하는 선까지이면 좋겠다. 이제껏 한국 정치는 정치인과 당원, 국민이 만들어 낸 그 모든 수준의 평균치일 따름이다.
 

앞에 언급했던 노교수님의 말씀을 하나 더 옮긴다.
 

“정치인이 어디서 나오나요? 달나라에서 날아왔나요, 아니면 유권자들 속에서 나왔나요? 어린아이들 중에서는 어린아이가 나오고 어른들 중에서는 어른이 나오지요. 단샘에서 단물 나오고 쓴샘에서 쓴 물 나오고요.”

 

일반 국민이 아닌 정치인 문국현의 정당과 정치인 비판은 정치인이 없는 정치, 정치 부재의 정치를 말하는 모순을 안고 있기도 하다. 이를 달리 말해 독선이라고 할까? 기실 정치인의 집이라 할 수 있는 정당의 반정치성에 대한 국민의 반감과 혐오는 극에 달했기도 하다. 최장집 교수 역시, “사회적 요구에 기반을 둔 정책대안을 거부”한 정당들은 “정치계급의 쟁투장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말았다”고 퍼붓는다. 그럼에도, “현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대안은 정치일 수밖에 없다”고 하니 이 말에 힘입어 사회의 발전을 추구하는 우리는 다시 정치의 이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치인들에게는 장(場)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정치의 장의 고유의 가치 - 즉, 정치인으로서의 존재 이유, 사회적 소명, 정당하게 존경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명분 등 -가 있으며, 그것들로 인해 희생적이고, 헌신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이 그래도 이러한 정치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고건 전 총리가 출마 포기를 했을 때, 국민이 하나 볼 수 있었던 것은 정치는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희생은 정치인들에게 주어진 자질이지 행정가의 자질은 아니었다. 거기에 학자 또한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다. 다행스럽고 감격스럽게도 문국현 후보는 국민과 함께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나는 진정 문국현 후보가 끝까지 국민과 함께 있어주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국민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그의 말대로 국민의 뜻을 먼저 최대한 잘 살펴봐주기를 바란다.
 

문국현 후보 자신의 정치인 비판이 힘을 얻기를 바란다면, 그가 비판해마지 않는 정치인들의 행동들을 제발 그 자신만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존 정치인에 대한 비판보다는 정치인들에게 있는 좋은 자질과 능력을 끌어내어 창조적으로 기여할 수 있게 만드는 리더십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의지나 동기가, 다 도토리 키재기 하는 후보 판이고 내가 훨씬 더 유능해서가 아니라 정말 참을 수 없는 국민 사랑, 못 가진 자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연민, 외면할 수 없는 국가에의 봉사 의지 때문이라면 그는 가장 나중에 나왔지만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은 누가 국민을 진심으로 위하는지 다 보고 있다. 살신성인의 국민 사랑의 정신이 문국현 후보의 승리를 가져다주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고글은 전북 인터넷 대안 신문 '참소리'에도 실습니다.

2007.09.16 14:50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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