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라고 제대로 부르자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종교적 병역 거부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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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우(ltw96)등록 2007.09.20 08:34

소위 "종교적 병역 거부"라는 언어를 들먹이면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회적 반동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는 국방부의 종교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안이 확정되면서 더욱 거세지고 있다. 혹자들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 심지어 진보적 사회-종교단체중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 대신에 종교적 병역거부라고 하는 것은, 이 사회가 얼마나 몰상식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가는가에 대한 단편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양심"이라는 말의 뜻이라도 제대로 찾아보고 "양심적 병역거부가 아니다"라는 논지를 펴라. "양심"의 정확한 뜻은 "도덕적 행위 또는 지조(志操)의 선악에 관계되는 범위 내에서의 전인격적(全人格的) 의식 또는 심정 (두산백과사전)"이다. 전인격적 의식이지 전 사회적 의식이 아니며, 전 국가적 의식은 더더욱 아니다. 개인 안에서 도덕적인 행위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바로 양심이다.

 

하지만 이 몰상식한 대한민국 사회 - 대학 졸업자가 80%에 육박한다는 -에서는 양심을 정말 기묘한 단어로 바꿔버린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을 할때 가장 많이 나오는 반박이 "그러면 군대 간 사람들은 모두 비양심적인 사람이냐"라는 논쟁이고, 이 논쟁이 지금까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종교적 병역거부자","정치적 병역거부자"로 만들어버렸다. 기본의 뜻을 상당히 좁고 부정적인 뉘앙스를 뜻하는 단어로 가둬놓고, 여기에서 사회적 왕따를 시작한다.

 

"그럼 군대 다녀오면 양심없는 사람이냐?"

"아니오, 그것도 당신의 양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 뒤에는 아직까지 군대 중심의 사회적 획일화를 바라는 군부독재의 후예들과, 그들로부터 헤게모니를 상속받은 군부독재의 충실한 변견들이 있다. 국민들이 자신들(정치권-사회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졸부들)의 뜻에 충실하게 복종하도록 만들어놓은 징병제라는 폭거를 사회보편적인 양심으로 치장해 놓고, 그 "한국식 양심"을 거부한 사람들이 "양심"이라고 달고 다니니까 아니꼬운듯 "양심"이라는 단어를 독점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 흡사 "한국적 민주주의"가 판쳤던 70년대와 닮지 않았나? 민주주의라는 "정치의 정의"는 보편타당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여러 사람이 누리는 귄리와 의무이고, 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까지 "한국식"을 찾아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방법론적 다양성을 획일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는 군화발로 그 "획일화"에 성공했다. 너무나 효과적인 양심에 대한 제약방법을 얻었다고 하는게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타당한 한국식 양심"을 상속받은 "군대 다녀온 남자"들과 "그 양심의 동지"들을 이용해서 "진짜 양심적인 사람들"에게 집단혐오를 보내는 방법으로 개인의 양심을 통제하고, 더 빨리 "사회가 양적으로 발전하는" 방법을 사회가 택하기 시작한다. 어째서? 그들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방법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사회가 자신들이 상속했던 이념을 가져왔고, 그 이념은 토론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단지 양적 성장만을 목적으로 하는 절대적 영도주의의 사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진보의 직무유기, "종교적 병역거부자"

논쟁 피하지 말고 양심의 자유를 당당히 주장하라

 

이 논쟁에서 또 하나 의아한 상황은, 진보를 자임하는 세력 역시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단어에 염증적 기피를 보인다는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언어 자체에 대해, "불필요한 논쟁을 피한다"는 말로 병역거부 동기를 분화해서 "종교적",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시작 한 것은 바로 "병역거부 논쟁의 중심에 서 있지 않던" 진보세력이다.

 

어느 성명문 끝에 별 중요하지 않은 어두 어미 좀 고쳐서 논쟁이 수그러둔다면 그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양심이라는 단어는 절대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우리가 그 길을 피해서 일보 전진한다는 것에만 의의를 두어야 하는가? 그렇게 일보 전진하면, 그 "종교적"이 아니여서, "정치적"이 아니여서 "양심"을 굽히지 못해 소외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일단 지금의 종교적 병역거부자에 한정한 사회복무제도는 사회가 드디어 국가 이외의 양심에도 눈을 돌렸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이다. 집총거부자에 대해 국가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인정하고, 사회적 시선으로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사회의 집단적인 광기를 수그러뜨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헌법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타인의 양심과 자신의 양심이 꼭 일치할 수는 없다. 어느 이는 산 한가운데에 도로 내고 터널 뚫어서 사람이 다니기 편하게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또 다른 이는 그것을 맹렬히 반대하는 경우도 많다. 사상의 자유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이는 토지의 개인소유에 반대하는 이도 있고, 어느 이는 이를 찬성한다. 수많은 양심과 양심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에서 정치라는 협의체를 통해서 각각의 양심을 조율하는 것이 바로 민주사회이다.

 

이러한 민주사회에서 양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더 보탤 말 없는 "독재"다. 이러한 독재체제를 계속 가져갈 것인가, 한발이라도 독재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주사회로 한걸음 나아갈 것인가는 개인의 양심을 사회에서 얼마나 질타 없이 바라보는가일 것이다.

 

양심에 대한 제한은 그 양심에 따른 행동이 타인에게 손해를 입혔을때만 해당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법에서 정하고 법원에서 판결한 수준의 사회적 처벌을 기꺼히 감수하고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법에 의해 현역보다 더 무거운 중책이라고 여겨져 내려지는 형벌이다. 이들은 현재 전과기록으로 인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타인의 양심에 손해를 입혀서(지금과같은 강제적 처벌을 해서) 자신의 양심이 완성된다고 믿는 것은 흡사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재에서의 나치스들과 같은 생각이다. 그들은 게르만 유일주의를 주장하고, 타민족을 배척하는 것 만이 게르만주의를 완성하는 길이라고 굳건하게 믿어왔으며, 이러한 생각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개인의 수많은 양심이 모이지 않으면, 아니 애초에 국민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가 있을 수 있는가? 국가와 국민은 사회적 계약에 의한 관계라는것은 17세기 루소의 사회계약설 이후 지금까지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사회적 광기를 멈추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국민의 의무를 평등히 수행할 수 있을지 생각하자.

 

민주사회에서의 개인의 양심은 국가를 성립하기 위한 절대적 필요충분조건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09.20 08:34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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