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에서 꼬맹이 정조의 연민, 영조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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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근(ears)등록 2007.09.25 17:33

드라마 이산 3회에서 영조가 꼬맹이 정조에게 임금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묻는다. 꼬맹이 정조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애를 쓰다 백성들이 올린 언문 상소를 모조리 읽고 백성들이 먹는 음식을 그대로 먹는다.(영조도 그런 식으로 먹었다. 그래서 오래 살았는지도)

하지만 꼬맹이 정조는 답을 찾는데 실패하고 결국 폐위될 위기에 처한다. 그 과정에서 정조가 동궁에 배정된 내탕금을 한꺼번에 다 써버렸다는 사실까지 드러나 꼬맹이 정조는 더더욱 곤경에 처한다.

 

위기의 순간 영조는 꼬맹이 정조가 돈을 쓴 용처를 알아내고 진노한다. 알고 보니 꼬맹이 정조는 그 돈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쓴 것이 아니라 곤경에 처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쓴 것이었다.

 

영조가 낸 문제를 풀기 위해 백성들의 언문 상소를 모조리 읽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위급한 상황을 알아버리고 견위치명의 정신으로 돈을 푼 것이다. 영조는 그 자초지정을 파악하고 진노한다. 주위에 시립한 관원들에게 ‘너희들은 뭘 했길래 이런 사안이 나에게 전달이 안 된 것이냐!’고 따진다.

 

언관 : “언문상소는 그 문장이 조잡하고 해독이 불가능한 것이 많아...”

영조 : “한심한 놈 소위 언관이란 것들이 백성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걸 자랑이라고 떠드는 게야! 지금 당장 상소를 받은 언관을 파직하고 관계된 자를 모두 잡아들여라!”

 

추상같은 불호령이 떨어진다. 꼬맹이 정조는 위기를 넘긴다. 비록 답을 내지 못했으나 꼬맹이 정조는 이미 그 답을 몸 안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채제공은 그 답을 이렇게 말한다.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그것은 저들을 긍휼(矜恤)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것은 왕의 근본 도리이기도 하거니와 공직자 일반의 도리이기도 하다. 명나라 때 해서는 공직자가 되는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또 하나는 백성들이 핍박당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마음.

 

옛날에 김용옥 씨가 논어를 해설하면서 ‘공자왈, 나는 화가 나면 밥 먹는 것도 잊고...’ 이런 식의 말을 했었다. 그때 누군가 신문에다가 ‘아니 대성현이신 공자가 화를 내다니’운운하는 글을 실었었다. 그때 얼마나 황당하던지. 화를 내는 것은 사리사욕 때문일 수도 있지만 대의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대의를 위해 화를 내지 못하면 치자의 자격이 없다.

 

치자라는 게 옛날엔 지식인 집단이었다. 지식인이 곧 양반 사대부고 예비 공직자 집단이기도 했다. 그들에겐 당연히 분노가 필요했다. 올바르지 않은 것을 보고도 허허허 하고 있으면 치자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진중권 씨가 방송 토론 중에 ‘꼭지가 돈다’라고 표현한 것을 가지고 평론가가 어떻게 그런 감정적인 언사를 하냐고 비난하는 말들이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진중권 씨는 자신의 판단에 대중파쇼적인 행태를 보고 그것에 분노한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니,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한다면 ‘아니 대성현이신 공자께서 화를 내시다니’운운하는 뚱딴지같은 시각과 동급이 된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왕과 선비를 넘어 인간의 기본 도리이기도 하다. 유교에서 추구하는 인간다움의 정수가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측은지심. 이 마음이 없는 자는 금수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측은지심이 발전해 인(仁)이 된다. 인을 안으로 닦으면 성인이 되고 밖으로 발현하면 치자가 된다. 내성외왕의 이치다. 물론 이 두 개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함께 동반한다. 무릇 군자는 인을 닦아 저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아선 안 되고 반드시 백성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념이다.

 

유교는 하늘을 인(仁)하다고 친다. 치자는 하늘을 대리하는 자다. 그러므로 치자도 인해야 한다. 그 인함이 경덕보민(敬德保民)으로 발현된다. 그것이 바로 천명이다. 이것을 잃으면 왕이든 황제든 언제든지 갈아치워도 반역이 아니라고 했다.

 

꼬맹이 정조가 바로 이 보민의 가치를 머릿속 지식이 아닌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던 것에 영조는 흡족해 했던 것이다.(적어도 드라마에서는) 정조가 나중에 장용영(壯勇營)등을 조련하는 것을 보면 ‘분노’하는 마음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영조가 언문 상소를 묵살한 대신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드라마상의 장면도 그런 분노를 잘 표현했다.

 

우리나라는 지금 공직자 되기를 희망하는 젊은이들이 산처럼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불의부정에 분노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공무원을 희망하는 이유는 단 하나, 사리사욕이다. 이 척박한 세상에 자기 하나 안전하게 살겠다는 사리사욕으로 공직이 채워지고 있다.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 것이다. 영조가 다시 돌아오면 한탄할 일이다.

 

대학서열체제는 모든 아이들에게 자기 하나 일류대 가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사리사욕을 세뇌한다. 정부나 언론사는 각종 입시보조 서비스 경쟁을 통해 그 사리사욕을 끊임없이 고취한다. 망조가 들고 있다.

 

대통령 이하 수많은 관료들, 지도층 인사들이 우리 경제 좋다는 말들을 했었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도 그럴 수 있었을까? 전두환 때보다 양극화 상황이 더 악화됐다. 독재시절보다 더 살기 힘든 나라가 됐다. 미국 경제 좋다고 떠벌리는 미국 백인들은 긍휼은커녕 흑인들을 사람으로도 안치고 있다. 한국 경제 좋다는 사람들은 한국 백성을 사람으로 치기는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지방 전체가 날로 황폐화하고,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인간이하로 살아가야 하고, 자영업자의 상당부분, 그리고 전체 기업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이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경제가 좋다고 자신 있는 말하는 공직자에게 영조는 뭐라고 했을까?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주식을 사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자기 자식은 미국에 MBA 유학을 보낸다. 또 서비스업과 금융업을 발전시키겠단다. 주식을 살 수 있을 만큼 자산을 쌓아놓고 있는 국민은 얼마나 되며, 실제로 주식을 산다 해도 그 소득이 용돈 이상의 것이 될 국민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돈놀이 금융소득을 권장하는 것은 허깨비 놀음이다.

 

서비스업과 금융업은 아무리 발전해도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안 된다. 그저 미국에 유학한 몇몇 고급인력에게나 억대의 연봉을 안겨 줄 뿐, 대다수 국민은 허드렛일 서비스나 하게 된다. 국민에게 필요한 건 서비스도 아니고 주식투자도 아니다. 안정적인 일자리와 소득이다. 그럴려면 제조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미 강력한 경쟁력을 보유한 재벌 말고 유치분야 제조산업 육성을 위해 우리 정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한미FTA와 서비스업, 금융업 귀신에만 홀려 있는 것 같다.

 

제조산업 육성이 난제이긴 할 거다. 우리가 여기서 제조산업을 더 발전시키면 선진국이 되는 건데 2차 대전 이후로 선진국이 된 후발주자는 지구상에 단 하나도 없으니 쉬운 일은 아니다. 당장 이런 결과물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긍휼히 여기는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언문상소는 치워 두고 사대부가의 한문 상소만 중시한 언관을 영조는 파직했다. 우리나라는 지금 상위 20% 집안들 사이에서 연일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그들이 한국사회 언로를 장악하고 있다. 대통령과 관료들은 그들의 말만 듣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2000년대 들어 파탄상이 명확해진 상황에서 어떻게 경제 좋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가?

 

난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 그룹 출신이다. 그곳이 내 준거집단이다. 그 냄새가 너무 짙어 다른 곳에선 날 경원시한다. 한국은 무엇보다도 배반자를 가장 싫어한다. 난 내 준거집단에게 배반자가 될 수밖에 없다. 파탄을 파탄이라고 하는 순간 배반자가 되었다.

 

하지만 언문상소를 보라. 주위로 시선을 돌려 백성들을 보라. (나를 포함한)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이 나라가 지금 파탄지경임을 모를 리 없을 터. 그렇다면 참여정부를 계승한다고 자임하는 사람일수록 지금 대죄를 지은 심정으로 국민 앞에 고개 숙여야 한다.

 

그런데 절대로 자기들은 잘했단다. 국민이 무식해서 세상이 좋아진 걸 모른단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정권을 긍휼히 여기고 있다. <화려한 휴가>같은 영화를 다시 들고 나오는 걸 보면 이들이 지금 얼마나 한가한 정신상태인지 알 수 있다. 꼬맹이 정조든 분노한 영조든 다시 나와야 할 판이다.

2007.09.25 16:3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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