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대선은 어떤 당도 흥행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어느 당의 대선후보선출은 한 자리 숫자에 그치는 선거인단 참여율로 선출되거나 보궐선거보다 낮은 지지로 당선되기도 했다. 이렇게 흥행을 일으키지 못한 채 민심은 부유하고, 대권을 쥐겠다는 후보자들의 권력욕만 난무한 선거 판에서, 누가 진짜 경제를 말할 수 있는지, 우리가 희망하는 생활을 보장해 줄 후보가 누구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쏟아지는 후보들의 발언 앞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우리의 고민은 오리무중 속에 더욱 커져만 간다.
사실, 정치가 멋스러운 여유를 잃은 지 오래라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정말 국민의 희망을 만드는 정치는 없을까. 최근의 정치가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유는 정치권 안에 있는 사람들만의 폐쇄적인 관심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한 까닭이 클 것이다. 대의정치가 본래 기능을 잃었다면 첨단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방식의 표현방식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움직이면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모바일의 가능성이 새롭게 눈길을 끈다.
너무 명쾌한 논리로 지배되는 세상은 멋과 여유가 없다. 삶의 여유는 수묵화의 그림으로 치자면 여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리라. 수묵화의 멋은 색을 어떻게 쓰느냐 보다는 여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한층 품격 높은 멋을 만든다. 여백은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창조적인 해석의 여지를 넉넉하게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정치적 논제들을 단순명쾌하게 해결하려는 논리는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이진법식 논리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Yes 아니면 No, No 아니면 Yes의 순환구조로 열거될 수 있으니 말이다. 예컨대 그림이 색 아니면 선처럼 보이는 단계를 넘어서 여백을 읽을 수준으로 진입하는 복잡한 이진법이라면 양상은 달라질 것이다. ‘컴퓨터에는 변증법이 없다’는 다니엘 벨의 말이 바로 그런 의미다. 평면적인 이진법 안에는 여백의 맛이 촘촘하게 숨어있듯이 사이버네틱스의 이진법은 복잡한 생명계 양상으로 승화되면서 창조적 멋을 끌어낸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Yes) 아닌 것 같기도 하고(No)’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서구의 변증법이나 형식논리의 참·거짓의 판단으로 익숙해져 여백을 살려내는 판단에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활 속의 여유는 여백의 가능성 속에 숨겨져 있다. 서양화에서처럼 빈틈을 없애야만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에서는 여유를 만들 수 없다. 빈틈이 많을수록, 변화의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입체적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공생의 여유가 생긴다.
‘긴가 민가’는 일찍이 동학사상 속에 있는 ‘불연기연(不然其然)’논법의 다른 표현이다. 동학의 논리인 셈이다. “그렇지 않은 것(其然)과 그런 것(不然)”으로 풀이할 수 있는 ‘불연기연’은 여백의 맛을 감칠 맛나게 구성하는 우리식의 표현법이다. ‘불연기연’은 생각의 여백을 가장 많이 만드는 사고기술이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상상 속에 펼쳐지는 ‘긴가 민가’의 통합적 논리는 동양화의 여백의 미와 같은 것이다.
명쾌한 논리 지배하는 사회 '멋과 여유' 상실
다양성 존재한 현대 '긴가민가' 역동적 창조
근대 과학의 귀납적 사고는 여백의 맛을 차단한다. 결단이 우유부단하게 끝난다면 다음 일을 추진하는 데 심각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동학의 ‘긴가 민가’식의 판단은 커다란 장애물일 수 있다. 변화무쌍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연관하여 판단해야하는 오늘날에 가장 적절한 사고방식은 오히려 긴가 민가식의 ‘불연기연’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남북 상황, 진보와 보수의 갈등 등을 한꺼번에 통찰할 수 있는 정치적 해결방식은 지배와 피지배관계가 아니라 ‘긴가 민가’식으로 함께 살 수 있는 생명적 통찰이지 않을까.
자연현상 하나하나에는 ‘불연기연’ 방식이 아닌 것이 없다. 식물은 죽음과 삶이 공존해 있다. 나무에는 자아적인 생과 타자적인 죽음이 힘의 관계로 유지되면서 생명의 질서를 만들어 주기에 그렇다. 자기 긍정과 자기 부정이 대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면서 존재하는 것이 자연의 세계인 것이다. 해가 뜨고 지는 일에도, 동물의 생사 속에도, 불연기연적인 공생논리는 엄연한 법칙으로 숨어 있다.
본래 우주는 한 덩어리의 생명체이므로 살아서 부단히 자라는 것이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낡은 부분은 소멸하고 새로운 부분이 생겨서 계속 변화 발전하는 것이다. 양지 식물인 소나무가 죽은 가지와 살아있는 가지를 동시에 안고 살면서도 수백 년의 삶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나무는 죽음과 삶을 함께 안고 살아가는 게 특징이다. 한 쪽의 가지가 죽지 않으면 새로운 가지는 생겨날 수가 없다. 새로운 가지는 대부분 햇빛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오래된 가지가 햇빛을 가리면 새 가지는 생존할 수 없는 조건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동학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한 세기 반이라는 세월이 흐른 동학사상은 낡은 정신사의 한 쪽쯤으로 이해되기 싶다. 죽창을 들고 곡괭이로 봉기한 농민봉기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 우리들의 선입견이 150여 년 전 등장한 동학을 사상으로써 얼마나 평가할까 싶은 노파심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백의 미를 살리는 ‘불연기연’ 안에서 동학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가온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선생이 지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접하고 나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 물론 오랫동안 붙잡고 온 친밀도 때문에 신선한 느낌을 갖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연구결과를 통해 가늠할 수 있듯이 농민봉기를 넘어 그 정신적 근간을 들여다보면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다.
필자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사상으로서 동학을, 유비쿼터스 사회의 정신적 핵심으로서 우리들 삶의 여백의 멋을 살릴 수 있는 정신적 가치, 또는 기술적 가치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기존의 종교사상적인 측면과 근대운동사적인 측면에서 다룬 내용을 넘어 사이버사회에서 다양하게 연동되는 ‘긴가 민가’의 역동적 창조성으로 풀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주간지 [광주SUN]에서도 볼 수 있씁니다.
2007.10.19 1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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