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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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신(papagoat)등록 2007.11.01 14:36
   지난 대선 때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한 인물을 찾아  줄을 댄 고급 공무원들이 있었다.  선거 결과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 경우,  지난  5년 동안  마음고생이 상당히 컸을 법하다.

   ‘분별이후 선택’이란 과정이 아예 없었다면 그런 고통을 피할 수 있었으련만----. 그래서  부설 거사는 ‘ 보아도 보는 바 없이 보고(目無所見: 목무소견), 들어도 듣는바 없이 들어서 (耳聽無音: 이청무음) 옳고 그름을 모두 끊어 버려라 (絶是非: 절시비)!’ 고 엄하게 타일렀다. 그래도 염려되어  ‘분별과 시비를 모두 내려놓고 (分別是非都放下:분별시비도방하), 단지 네 마음속의 부처에게 귀의하라 (但看心佛自歸依: 단간심불자귀의).’고 다시 강조한다.

   하지만 끊임없는 분별, 판단과 크고 작은 선택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보통 사람들(중생)의 숙명인가보다.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 중인 중학생을 예로 들자면, 아침에 ‘학교에 갈까 말까 ?’ 에서부터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할까? 말까 ? ’, 또 고등학교는 ‘인문계’로 할까 ‘실업 계열’로 결정할 것인가에 이르기 까지 삶 자체가 선택의 연속이다.

  크고 작은 이 모든 선택들을 한 줄로 모아 연결해 놓은 것이  한 인간의  course (진로, 과정)가 되겠다. 그리고  종교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그것을 ‘운명’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선택이 바로 내 운명이라면 ?  ‘내 운명( 삶의 과정)을 창조해내는 주체는 바로 내 자신이다.’ 는 뜻으로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따라서 나와 같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 ‘ 하나님이 내 앞 날을 이미 예비해두었다. 따라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산다.’며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수준으로 인간을 끌어내리는 분들을 보게 되면, 그리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서도 걸핏하면 ‘ 앞날의 운명을 미리 알아보겠다.’며 점쟁이에게 달려가는 습관에 빠진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게 되면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순간순간 선택한 내용에 따라 ‘말과 행동’의 형태로 나타난 결과를 , ‘아직 해탈(解脫)하지 못했기에 윤회(輪廻) 속에서 해매는 인간들이 짓는 까르마( 業:업 )‘라고 부른다.

  그리고  현재 이 순간 순간마다 선택들을 바르게 해서 착한 업을 지어나가면, 그 착한 업들이 계속 쌓여 이루어진 미래란 - 비록 해탈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나 - 천국엔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 악한 업을 지으면, 그 악업들이 쌓여져 이룬 미래란 당연히 매우 참혹한 지옥이 되고---.

   결국 ‘천국이냐?’ 아니면 ‘지옥이냐?’ 결정하는 주체는 ‘내 자신 밖에 존재하는 신’이 결정하는 일이 아니라,  ‘평소 어떤 종류의 결정을 하곤 했느냐?’라는 성향(흐름)의 문제이자 그런 선택 방향을 지켜온 내 자신이다 는  뜻이겠다.

   화가나 목사의 자녀는 부모의 대를 이어 화가 혹은 목사가 될 가능성이 높고 , 사기꾼이나 깡패의 자녀들은 어른이 되면 또한 사기꾼이나 깡패 테두리를 벗어나기 힘든 사례들을 주변에서 발견하곤 했다. 부모가 선택하는 방향을 어려서부터 옆에서 보고 배운 결과, 선택할 때마다 부모의 그 취향을 선호해서 따른 결과라 생각된다. 

   노예가 자녀를 낳아 그 자녀도 노예 신분을 물려받게 되면, 부모가 받은 천대 내용과 고통의 크기도 엇비슷하게 자녀에게 대물림되듯----  부모 된 자로써 악한 업을 지어가면 먼저 자신의 인생이 비참해지는 벌을 받고 뒤이어 자녀도 비슷한 내용과 비슷한 크기의 고통으로 비참해지기 마련인가 보다. 그 비참한 자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부모에게 덤으로 주어진 형벌이라 보아야 하려나?

   만약 부모의 선택 취향이나 내용을 객관적으로 보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 능력을 지녔다면, 부모와 똑 같이 될 참혹한 운명으로부터 이탈(離脫)이자 동시에 부모의 업으로부터의 해탈(?)이라 고 까지 후하게 불러줄 만하다.

    더럽혀진 연못을 맑게 하자면, 더러운 물이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하는 일이 우선이고, 그 다음 고여 있는 썩은 물을 맑은 물로 대체하는 것이겠다. 어린 나이에 출가(出家)해서 수녀나 신부, 스님이 되는 것도 바로 이와 비슷하다 하겠다. 부모의 때 묻은 선택 취향에서 벗어나는 것이자, 부모로부터 받아 간직해온 세속적 가르침대신 출세간의 맑은 가르침으로  대치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출가 과정이 없이 종교 지도자 역을 맡는 목사나 대처승은, 깊은 깨우침의 세계에 들어가는데 있어 어려움이 상대적으로 클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것은---.

    ‘ 부모나 조상의 나쁜 업(전생의 업)’에서 벗어나는 것 못지않게 여타 세상 지식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것들 역시 편견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성자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나의 가르침마저 결코 집착하지 말고 모두 버려라.’고 말했으랴!

   일반적인 부모나 선생들이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철저히 간직하라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업(운명)을 물려받아 똑 같이 되라는 뜻이겠다. 따라서 그 성자보다 못한 자신의 현재 모습을 겸손하게 되돌아보며 ‘그 뜻이 진정으로 바람직한지 ’ 엄숙하게 되짚어 보아야할 대목이겠다.

   두 아들이 외모에서부터 습관에 이르기까지 나를 그대로 닮았다는 말을 주위 분들로부터  듣곤 했는데---그 때마다,  ‘발가락이 닮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한 소설 속의 주인공 이야기가 떠올라 흐뭇하게 느꼈었다.  

  이제  그 생각을 돌려 , 두 아들에게서  나와 닮지 않은  모습을 찾으려 애쓰는 것을 보니, 지나간 내 삶의 여정도 선택에 있어서 오류(誤謬)가 그리도  많았나 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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