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은 해체되어야 하는가?

학생들 인권 보장되어야 하지만, 그러기에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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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숙(minuet)등록 2007.11.16 10:27
학생들 인권!! 무조건 보장되어야 한다. 백번 천 번 맞는 말이다.
그 당위성이 너무 확연 함에도 실제생활에서 실천이 잘 안 되고 있을 때는 그 만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 역시 너무나 많음을 반증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명색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고 연쇄 살인범이나 성 폭력범 등의 사형수도 인권이 존중되어야 하는 마당에 아직 미성숙한 , 자라는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아닌가? 학생들이 잘못하면 뭘 얼마나 잘 못 하겠는가?

학교는 교육하는 곳이고 그 교육적 감화를 통해 학생들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 된 것이다. 교사 역시 학생들이 있기에 직장이 있고 그 존재 이유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신 자유주의’ 하의 교육논리는 교육도 상품이며 고객이 왕이고, 교육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에게 늘 서비스하는 친절한 사명감이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하거늘 장래 우리의 희망이자 국가의 동량이 될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체벌을 가하거나 폭언을 하고 수치심을 주다니 세상의 변화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한심한 교사들도 많고, 인성부(이전의 학생부)에서는 아직까지 후진적인 체벌을 사용하고, 두발이나 복장을 규제하여 학생들을 억압 하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 일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다 한번 씩 학교문제를 접하는 사람들은 학생들의 인권을 원론적인 면에서 주장 할 수 있고, 그 원칙을 위배 할 경우 교사와 학교를 무더기로 매도하여 언론과 인터넷에 비난하는 글들을 무차별적으로 도배를 할 수 있겠지만 매일 학교에서 생활하는 학생들과 시간마다 수업을 들어 가야하고 학급을 운영해야 하는 교사들에게는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국가에서 ' 인권'은 모든 구성원을 대상으로 보장되지만 실제에 있어서 사회 일반의 인권이 소수 노약자, 여성, 장애우등 불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제도적으로 보장 해주어야 한다는 측면이 강하고,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인권문제가 크게 부각되거나 문제시 되지 않는 것처럼 학교 역시 인권문제가 불거지는 경우는 주로 ‘학교 부적응아’ 들이 그 대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모사별, 결손가정, 이혼과 재혼 , 빈곤가정, 아동의 나이나 특성을 생각지 않고 너무 엄격하거나 허용적으로 혹은 방치하면서 키운 잘못된 양육방식 등 공격적이거나 충동적, 주의산만 하거나, 정서장애 등 이미 가정에서부터 문제를 지니고 나오는 아이들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매 맞고 자란 아이들의 경우는 치명적인 문제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먹이고 입히는 뒷바라지로 그치고 ‘정신’이나 ‘생각’을 길러주지 못한, 혹은 책을 가까이 하지 않은 결과 이미 기초학력이 부진해서 제 나이의 교육과정을 수행 해 낼 수 없는 아이들. 혹은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는데 무리한 조기교육으로 학업에 흥미를 잃거나 학업에서 성취감이라고는 느껴본 적이 없는, 초등시절부터 부모로부터, 교사에게 공부로 인해 구박 받아서 “공부”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픈 ‘학업안티’

그도 저도 아니면 “학교”라는 조직자체가 감옥 같고, 싫지만 중학교는 의무교육이다 보니 자퇴를 할 수도 없어서 매일 다녀야 한다는 것, 등교시간이 있고, 교복이 있고, 수업 시간을 지키고 수업을 들어야 하고 수업 시간 중에 군것질을 못 하게하고, 화장이나 귀걸이도 못하게 하며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없고, 교시들 간섭과 통제를 받아야한다는 것이 싫은 아이들, 또 하다 못해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 튀고 싶은 학생,

그 무엇이 문제가 되었든 간에 그러한 유형의 학생들은 기성사회나 원래학교 목적에 부합하는 학업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우리 학교의 경우 총 1720명 학생 중, 별 문제 일으키지 않고 특별 한 일 없는 경우 학부모에게 전화 한번 할 필요 없이 진급 해 올라가고 졸업해서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늘상 교무실 앞에 불려와서 교사와 말씨름을 하고, 학부모를 부르고 하는 학생의 수는 50여명 남짓하다. 일학년은 좀 수가 적고 3학년은 그 숫자가 늘어난다.
남녀 숫자는 양성평등의 결과인지 아니면 여학생들이 사춘기가 좀 빠른 편 이라 그런지 남학생들에 비해 더 말썽을 피우는 편이다.

이 숫자의 학생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지고 ‘인권’을 따져야 하는 문제가 나오는 것이지, 그 이외의 학생은 두발이나 복장 같은 단체 지도 이외에는 특별히 인권 운운 할 부분이 별로 없다.(물론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이 학생인권이나 학생자치 부분에서 만족스럽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일상의 학교생활 중에서 학교 부적응 학생들의 인권을 학생본인들의 어떠한 언행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지켜주려 하면, 교사를 포함하여 그 이외의 대다수 학생들의 교수-학습권은 지켜질 수 없다.

학교가 사회의 공기(公器)로서의 역할 중에  학습 하는 곳이란 부분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아니래도 아이들은 학교를 학습하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그냥 유치원처럼 “학교라는 울안에서 보호(감시) 받으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노는 사회성을 길러주는 정도. 거기다 좀 더 보태면 공감대가 같은 또래와 함께 하루 종일을 보내면서(결과적으로는 3년) 체육대회를 하고, 수련활동이나 수학여행을 함께 가고 학교 축제를 하는 곳이란 의미 정도가 있을 것이다. 

그나마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다녀야 하는 곳이란 기능이 있기에 유지되는 것이지 상급학교 진학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생기거나, ‘의무교육’과 같은 강제성을 띠지 않고 학생이나 학부모가 선택 할 수 있는 방법을 허용한다면 학교란 기관은 거의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고대나 중세처럼 혈통에 따른 신분이 유지되는 사회도 아니고, ‘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국가지만 능력에 따른 차별은 인정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성별이나, 피부색깔 같은 자신의 의지 밖에서 결정된 것에 대해 차별 받지 않는 다는 것이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행동을 어떻게 해도 차별 받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학생이면 아동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가 가는 행동 정도는 구분 하고 자제 할 수 있어야 하고 , 집단생활 속에서는 하고 싶지만 못하는 것도 있을 수 있고,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도록 훈련하는 곳이 학교인데 의외로 그렇지 못한 학생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어쩌다 실수로“ 가 아니라 이미 나쁜 행동이 상습적으로 몸에 배어버린 학생들
아직 어린학생들이지만 자신의 나이로 어느 정도 사리분별이 가능하고(초등학교 저학년 바른생활만 배워도 기초예절이나 질서, 공중도덕 생활에서 잘, 잘못은 거의판단 할 수 있다고 본다.) 자신의 의지로 노력해서 고쳐질 수 있는 행동은 고치도록 지도해야하고 자신의 잘못된 언행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주는 것이 제대로 된 민주시민교육이고 인권교육이라 생각한다.

이미 1997-8년부터 시작하여 2000년 초반까지 한창 세간에서 ‘교실붕괴’ ‘ 학급붕괴’라는 말과 함께 그 실상이 소개되면서 이전 산업사회에서 획일적이고 관료적인 “공장”형의 학교에 다니던 기성세대로서는 감히 상상 할 수 없는 학생들의 학교생활로 인해 충격을 주었다. 더구나 매일의 일상은 산업사회를 지나서 이미 탈 대중화 사회를 살고 있으면서 “전문직” 이나 “노동직”이라는 교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교사상인 ‘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혹은 군사부일체’ 같은 “성직자”적인 교사상의 개념에 머물러 있던 한국사회 통념상 그러한 현상들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인터넷을 하면서 몇 개 국어로 대화나 채팅을 하는, 전 세계를 넘나드는 시대를 살고 있는 변화된 학생들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 못하는 구태의연한 기성사회의 요구가 문제이기도 할 것이고, 과거와 전혀 다른 경험과 사고방식을 갖는 신세대 학생들에 대한 체벌의 관행과 교사 학교체제의 경직되고 권위주의적인 자세도 문제일 것이다.
또 이미 “교육받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해야한다”는 본질적 접근의 교육이기보다 무한한 입시경쟁 체제에서 ‘잘 먹고 잘살기’ 위한 수단적이고 도구적인 교육에 열을 올리는 학부모의 요구와 그에 편승한 사교육 시장,
그러한 현상을 부추김으로써 상업적 이익을 챙기고 있는 사학과 언론을 비롯한 교육을 빙자하여 돈벌이에 열을 올리고 있는 많은 보이지 않는 자본들 .

“학교”라고 어디 섬으로 뚝 떨어져 있지 않고 그 사회속의 “작은 사회”이다보면 현대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를 학생들 역시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마련이다.

[ 학생의 요구와 관심을 오직 입시에서의 성공이라는 하나의 목표로만 몰아가는 교육현실 아래서 어떻게 공부 못하는 학생이 건강한 인간으로 버틸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그들에게 교칙을 준수하고 예의를 지키라고 강요 할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어느 구석에서 교사가 스승으로 존경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가?
결국 학생들은 사회가 가르쳐 준대로 자신이 알고 있는 방식으로 부모에게 저항하고, 교사에 저항하고 학교에 저항한다. 자신들의 부모가 평소 가르쳐준 대로, 자녀의 자율성을 무시하고 부당하게 강요한 만큼 교사와 학교에 대처한다.
부모와 학교가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조건에서에서 부모와 교사의 훈계는 쇠귀에 경 읽기 이다. 유인이 없는 채찍은 효력이 없고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곳에서 ‘예의’를 지키라는 말은 공허하다. 복종해야 할 명분이 뒷받침되지 않는 통제는 무력화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학교에서 담배 피우고, 학교에 무단결석하는 학생을 통제 할 수 없으며 교사가 수업 중에 잡자는 학생을 깨워 일으킬 수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학교가 무너지고 있는 징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출처: 한겨례21 ‘ 학교가 무너지고 있다. >

위 글은 성공회대 교수인 김 동춘씨가 이미 1999년에 쓴 글이다.                        
물론 ‘교실붕괴’가 어느 시점부터라고 꼭 집어서 얘기 할 수 없을 만큼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겠지만 그 용어가 나타난 이후 10년 가까이 흐르는 동안 우리학생들의 학교생활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더 나아졌겠는가?더 나빠졌겠는가?
유행처럼 한 바퀴 돌고 제자리를 잡기 시작했는가 아니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가?
공교육의 현재상황은 더 나빠지고 확산되었으며, 단계가 더 내려가서 초등학교 고학년에 까지 이르게 된 것 같다.

좀 나아졌다면 자녀들의 학교생활에 대한 이해가 좀 늘었고, 교사들의 학교생활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정도이다. 물론 이것만 해도 대단한 발전이다. 학생사안을 두고 교사와 학부모의 오해의 소지를 많이 줄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심각성에 때문에 도교육청을 비롯한 교육기관, 학교관리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애는 쓰지만 실제 그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은 하지 못하고 있는 입장이고, 교사들 역시 하루에 정해진 정규교육 과정을 해 내기에도 벅찬 입장이다.
경남지역은 상담센터나 청소년 관련 유관기관과의 네트워크 역시 아직 시작단계라 거의 실험단계라 할 수 있지만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이 좋은 대안을 모색 해보고하 하는 의미에서 다년간 교육경험과 인성교육부 “문제 학생 상담” 업무를 통해 ‘붕괴된 학급’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몇 가지 시도와 학생사안 발생을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방법을 소개 해 보고자 한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문제가 있거나 부적응한 학생들에게 제일 힘든 일은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자기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들에 의해 “쟤는 어쩔 수 없이 구제불능이야 라든가” “ 엄마와 선생님 애를 먹이는 나쁜 아이” 등 ‘낙인(라벨링)’이 찍히는 일이다. 그 과정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자기 자신조차 그런 아이라는 걸 당연시하고 그 낙인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 사고와 행동의 변화를 가져 올수 없는 최대의 걸림돌이라는 것을 알기에 본인이 생각하는 “문제”가 어떤 것인지를 먼저 밝혀두어야 할 것이다.

건강하고 건전한 학창생활이란 언젠가 독립된 성인이 되려는 시점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할 수 감당 할 수 있는 정도의 학업능력을 길러야한다는 것, 일단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기성장을 위해 건전하고 바람직한 위에, 자기가 속한 사회에 보탬이 되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체나 정신을 망가뜨리거나 파멸시키는 일(음주, 흡연, 중독성게임)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소지를 지닌 점들을 “문제”로 본다고 말할 수 있다.  

앞으로 소개할 학생들의 생활을 접하고 “낙인” 찍지 않기를 바라며, 어쩌면 그 학생들이 학교체제에 별 저항 없이 자란 학생들보다 어떤 부분에선 더 창의적이고 특별한 재능을 발휘 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고 속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만 현재까지는 자존감도 다소 낮을 수밖에 없고, 자신들의 능력이나 행동이 학부모나 학교의 요구에 맞출 수 없다보니 인생의 중요한 청소년기를 허비하면서 겉도는 듯이 보이기에 하는 구분임을 전제로 한다.

또 학교생활을 별탈없이 하고 있다거나 “학업성취”가 높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사회양극화를 반영 하듯이 우수한 학생들은 또 우수한 대로 바람직하지 못한 많은 면을 나타내고 있어 그 아이들이 다함께 조화를 이루며 동시대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가 되는데 그 문제는 또 다음에 언급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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