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부른 세계화광풍 탄생 비화

한나라당은 독재세력이 아니라 세계화세력이다

검토 완료

하재근(ears)등록 2007.11.26 08:26

 1994년 11월 15일 인도네시아의 보고르에서 자카르타로 가는 고속도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제2차 정상회담에 참석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승용차 안.

 


  □ 김영삼 대통령 -

 “어이 한수석, 이제 정말 국경 없는 시장이 열리는가 봐. 보통 일이 아니야.”


 □ 한이헌 경제수석 -

 “예,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도 개혁에 중요한 한 줄기입니다. 요새 국제화, 세계화를 모르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 김영삼 대통령 -

 “그래 그래, 연말까지 우르과이라운드 협상안 비준도 받아야 하고 말이야. 돌아가면 준비를 단단히 합시다. 미리 생각 좀 해둬요.”

 


 다음날(16일) 자카르타에서 호주 시드니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기 안, 김영삼 前 대통령이 갑자기 수행비서관회의를 소집합니다.

 


□ 김영삼 대통령 -

 내일 아침 기자간담회가 예정돼 있지요. 뭐 기사거리가 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 정종욱 외교안보수석 -

 “각하, 내일 특별한 뉴스는 없고 조금 쉬어 가는 일정입니다. 그냥 편안하게 간담회를 하시지요.”

 


 그러나 기자들과 만날 때면 ‘어떻게든 기사거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기사거리를 도출하기 위한 비서관 회의를 지시합니다. 물론 창졸간에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나올 리 없지요. 잠시 후 김영삼 前 대통령이 한이헌 경제수석을 호출합니다.

 


 □ 김영삼 대통령 -

 “어제 우리가 얘기한 거 말이야. 세계화라고 했나 세계시장이라고 했나, 그것을 경제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면 어떨까.”


 □ 한수석 -

 “예, 세계화로 정리해보겠습니다.”


 □ 김영삼 대통령 -

 “내일 기자간담회 때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해보세요.”

 


 한 수석은 즉시 청와대 경제비서실에 "세계화를 경제와 접목시켜 결과를 내일 새벽까지 호주로 보고하라"는 특명을 하달합니다.

 


 당시 국내에 남아 있었던 박관용 대통령비서실장의 기억.

 


 “출국하실 때까지 세계화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 ‘세계화’라는 말을 전해 듣고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부랴부랴 비서실과 경제기획원에 연락해 준비를 시켰지요.”

 


 한국 관료들은 단 하룻밤 만에 국가의 새로운 정책기조를 짜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줍니다. 보고를 받은 한 수석은 한 호텔에서 17일 새벽 5시까지 작업해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선언을 위한 자료 제작을 완료합니다.

 


 17일 아침 김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이른바 ‘시드니 구상’을 발표합니다. 당시 어수선한 국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정치적 노림수가 깔려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각에서 제기됩니다. 그러나 일단 발표된 세계화 구상은 자체 동력을 가지고 이후 김영삼 정권의 정책 방향을 결정짓게 됩니다. 삼성자동차가 생기고, 현대에 대한 규제가 풀리고, 재경원이라는 공룡부처가 생겼습니다. 세계화에 대응해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김종필 당시 민자당 대표는 세계화를 이유로 날아갔습니다. OECD에 가입하고 금융자유화, 개방이 감행되었습니다.

 


 “준비 안 된 OECD 가입으로 한국이 해외 투기자본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 정용석, 단국대 -

 


 세계화는 마치 박정희 정권 때의 ‘잘살아보세’ 새마을운동처럼 김영삼 정권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됐고 세계화라는 주문은 만사를 형통시키는 국정 운영의 키가 됩니다. 감히 세계화에 저항하는 자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세계화는 무소불위의 주문이 되어 한국사회를 전면적으로 재편했습니다.

 


 물론 이것을 김영삼 대통령의 즉흥적인 아이디어로만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화는 개발독재에 넌덜머리를 내던 국민들에게 변화와 자유화라는 꿈을 제공했습니다. 국민은 정말로 세계화를 통해 우리에게 자유와 경쟁력이 생길 줄 알았습니다. 이미 김영삼 정부 이전부터 자유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김영삼 정부 들어선 광풍이 되고 있었습니다. 금융자유화는 이미 93년부터 감행되었습니다. 단지 그 구호가 이렇게 졸속으로 정해졌다는 것이지요. 이 사건의 맹목성과 졸속성이 90년대 이후 자유화 개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994년 9월 16일. 서울 하이얏트 호텔. 한국경제인동우회장. WTO 체제와 우리 산업의 경쟁력 강화안 발표.

 


 “중소기업 고유업종과 단체수의계약 등 정부의 중소기업 보호 및 지원 제도는 마약과 같은 부작용을 낳아 기업체질만 약화시켰습니다. 우리 경제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이러한 중소기업 보호, 육성책의 폐지가 불가피합니다.”(박운서 통상산업부 차관)

-최원룡, 중소기업죽이기, 1995-

 


 그 자리에 있던 (대기업 아닌) 중견기업인들은 경악했다고 합니다. 딱 한미FTA로 취약산업 경쟁력 키우자는, 스크린쿼터 폐지하자는 재경부의 논리입니다.(자유무역 상황에서 우리 영화사는 미국 영화사에 비하면 중소기업) 경제, 통상계열 관료들이 이 때 이미 정신이 별나라로 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차 10여 년이 흐른 후 중소기업 몰락을 부를 자유화 개혁입니다. 경쟁력을 향상시킨다는 명목으로!

 


 '중소기업죽이기'라는 책에선 박정희 대통령이 했던 것처럼 청와대가 부품 국산화 회의를 주도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골치 아픈 국가개입보다 손쉬운 자유화개혁을 선택했습니다. ‘정부가 개입하면 부패가 생길 수 있으니, 모든 것을 시장 자율에 맡기자.‘ 이 얼마나 편리한 생각입니까.

 


 2000년대 파탄상까지 넘어올 것도 없이 김영삼 정부 기간 동안에 벌써 사상최대의 중소기업 부도사태가 벌어집니다. 이미 이때부터 은행은 중소기업, 제조업 대출을 줄이고 민간 소비 분야 담보 대출을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자유화 파탄은 IMF 이전부터 닥쳐왔었던 겁니다.

 


 국민은 자유라는 것이 결국엔 강자만을 위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경쟁력도 기존의 강자들에게만 생긴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부자, 강자들은 세계화로 자신들에게 가해지던 규제가 풀리므로 대환영이었지요.

 


 1994년 11월19일. 호주 시드니에서 국정지표로 세계화를 제시한 뒤 귀국하는 비행기 안.

 


 □ 김영삼 대통령 -

 “국경 없는 세계화 시대 아니오? 국가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면 삼성의 승용차사업을 허용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한 수석 생각은 어떻소?”


 □ 한 수석 -

 “그렇습니다, 각하. 세계화를 하려면 외국기업이 한국에서 공장을 짓겠다고 할 때 환영하고 도와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업이 공장을 짓겠다고 하는 것을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얼마나 무서운 대화입니까. 이후 지금까지 13년 민주화 개혁 역사를 형성한 사고방식이 이 안에 들어있습니다. ‘자유화’ 이 한 마디 말입니다. 과거에 맨 주먹으로 맨 땅에서 국제경쟁력 있는 대기업을 일굴 때도 결코 방기하지 않았건 국가의 규제가 ‘세계화’ 주문에 풀린 것입니다. 국가가 경제활동에 개입해 통제하는 것을 그만 두고 자유롭게 기업활동하도록 하자는 사고방식입니다.

 


 외국공장이 한국에 공장 짓겠다고 할 때 환영한다는 것이 결국 외국자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 맹목적 개방의지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리고, 벌써부터 역차별론이 나옵니다. ‘외국 기업도 마음대로 하게 해주려는 판에 한국 기업을 규제해서야 되겠느냐‘라는 것이지요. 한미FTA에 대비해 사학개혁을 멈추고 사학에 자율성을 달라는 사학재단들의 논리가 이때 국가시책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삼성자동차를 반대해왔던 주무부처 장관인 김철수 상공자원부 장관은 일방적으로 통보만 받았다고 합니다. 상공부는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의 개발을 이끌었던 부처입니다. 시장부족과 경쟁과열을 들어 반대논리를 폈던 상공자원부 관료들은 허탈에 빠집니다. 이 사건은 관료들의 보신주의, 복지부동을 재촉하는 결과를 빚었다고 합니다. 거대재벌을 대놓고 반대해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진리'를 확인한 것입니다.

 


 세계화, 즉 자유화 개혁이 마치 민주개혁인 것처럼 오인된 것은 현대에 대한 대선 보복이 중지된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1992년 12월26일. 여의도 민자당사.

 


□ 정세영 현대그룹회장 -

 “주 주 죽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형님(정주영) 고집이 워낙 세서... 온 집안이 (정계진출을) 반대했는데도... 그리 됐습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 -

 “기업인은 기업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리고 현대 그룹 임직원 20여 명 구속, 100여 명 입건 사태가 이어졌습니다. 정주영 전 회장이 대선에 출마한 것에 대한 정치보복이 자행된 것입니다.

 


 “92년 대선 이후 나와 현대에 가해진 정치보복은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다. 소도 말도 웃을 후진국적 정치폭력이 백주에 횡행했던 지난 시절이 어이없을 뿐이다.”

-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

 


 이런 식으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은 후진국적 정치폭력이라는 사고방식이 형성됐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경제개입을 차단하는 것이 곧 민주화요 선진화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퍼진 것입니다. 한국의 기업은 관치금융으로 컸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관치금융으로 현대 목을 졸랐습니다. 설비투자자금 대출을 막은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거치며 사람들은 은행을 자유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시중은행 지분의 60% 이상을 외국인이 가져간 사태입니다.

 □ 한이헌 경제수석 -

 “각하, 퇴임시에는 무엇보다 경제가 좋아야 합니다. 경쟁력 있는 첨단제품을 많이 만들어 팔아야 하지요. 그러려면 지금 좋은 공장을 지어야 합니다. 현대가 공장을 짓겠다는데 차질이 생기면 안 됩니다. 국경없는 경쟁이 이뤄지는 ‘세계화’ 시대 아닙니까.”

 


 그 서슬 퍼런 정치보복까지도 세계화를 이유로 중지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언제는 무한경쟁 안 했나요? 우리의 경제개발은 처음부터 국제경쟁을 목표로 추진되었습니다. 그것이 대외의존적이라고 내수지향형 경제구조를 만들자고 주장했던 것은 민주화 운동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집권하자마자 마치 사오정처럼 갑자기 무한경쟁 타령을 하더니 그때까지 무(無)에서 국제경쟁력을 만들어냈던 시스템들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내수파탄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대외의존은 더 심화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정치보복까지도 세계화가 막아내자, 세계화는 기존의 자의적인 국가폭력을 막고 한국사회를 투명화, 선진화한다고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시장과 사회를 자율적인 상태로 놓아두는 게,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선택과 거래를 국가가 통제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선진화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언론은 여기에 막대한 힘을 제공했습니다.

 


 왜 언론개혁인가

 [경향신문 2004-06-10] 

 5·16쿠데타 이후 군사독재 32년 동안 우리의 꿈은 ‘언론자유’였다. 그러나 자칭 ‘문민정부’를 노래했던 김영삼 정부 때 군사독재 32년 동안에도 없었던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신문들은 날이면 날마다 ‘국제화’나 ‘세계화’라는 김 대통령의 엉터리 구호를 합창했다. 때는 이미 폭력으로 언론을 탄압할 수 없는 ‘문민시대’였다. 그런데도 언론이 권력의 지휘봉에 따라 노래하는 합창단이 된 것은 이제 밖으로부터의 언론탄압이 아니라, ‘언론사 내부통제’가 언론자유를 가로막고 있음을 노출시켰던 것이다. 언론이 이처럼 김영삼 대통령의 합창단으로 전락한 지 채 5년도 안 돼 이 나라는 덜컥 IMF사태라는 재앙의 수렁에 빠졌다.

 


 이렇게 우리는 세계화 시대를 열광적으로 맞이했습니다. 그 이후의 역사는 국민들이 지금 몸으로 느끼는 바, 그대로입니다.

 


-1980~2005년 1분위와 10분위 소득배율-

   

          1분위        10분위

1980----7.14만원----56.89만원---7.97배

1985---12.45만원---105.30만원---8.46배

1990---30.30만원---225.46만원---7.44배

1995---63.25만원---432.61만원---6.84배

2000---68.25만원---605.31만원---8.86배

2005---80.65만원---773.56만원---9.59배

-통계청, 시민경제사회연구소에서 재인용-

 


 1980년부터 1995년까지 잘 사는 10분위와 못 사는 1분위 사이의 소득격차가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세계화 개혁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1995년 이후부터 격차가 커지기 시작해, 세계화 개혁이 본격화한 21세기엔 1980년대보다도 후퇴해버렸습니다. 물론 결정적인 변곡점은 IMF 사태이겠지만 IMF 사태 자체가 세계화, 자유화 개혁의 큰 흐름 안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90년대 이후의 퇴보 원인으로 세계화/자유화 개혁을 지목하는 것이 타당할 겁니다.

 

통탄할 일은 그 세계화/자유화 기조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지금의 대선정국을 보건대 차기 정권도 세계화/자유화 정권이 될 듯하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한나라당을 비판하면서 자꾸 독재 이미지를 차용하는데 착오입니다. 한나라당은 세계화세력이지 독재세력이 아닙니다. 세계화광풍은 우리의 과거이며 현재이며 동시에 미래까지 잠식하려 하고 있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 요즘입니다.

 


(위의 사건진행과 대화 내용은 모두 'YS 문민정부 1,800일의 비화, 동아일보 특별 취재팀, 1999'를 바탕으로 구성한 것임)


 

2007.11.26 08:2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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