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피랍, 그리고 역사속의 외교

김춘추ㆍ서희ㆍ광해군에게서 배우다

검토 완료

양정열(x0109)등록 2007.12.07 14:15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씨 2명이 살해되고, 이 달 2일 남은 인질 7명이 귀국을 하여 탈레반 피랍사태는 42일 만에 종료됐다. 선교단을 납치한 탈레반은 한국군 철수 및 미국에 탈레반수감자와 인질 맞교환을 요구했고, 미국은 어떠한 대응도 보이지 않았다.

 

탈레반, 한국, 미국 삼각구도 속에 우리나라는 문제의 핵심인 미국과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협상시한을 8번 연장하기 이른다. 가슴 졸이며 보낸 한 달 보름간의 안타까운 기억, 강대국과 얽히면서 생기는 문제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 우리의 오늘과 지난날의 역사는 이미 강대국의 영향 속에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랑캐라 불리던 역사 속의 외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대업을 위한 낮춤 외교 - 김춘추

삼국시대가 막을 내릴 때로 거슬러간다. 당나라와 고구려가 대립하는 가운데, 백제와 고구려가 동맹관계를 맺게 되자 당은 신라에게 동맹 요청하게 된다. 그때의 신라는 김춘추가 고구려에 동맹을 맺기 위해 갔으나 수모를 겪고 온 쇠약한 국력의 신라였다. 당의 동맹 요청은 단순히 상호간을 위한 동맹이라기보다, 당의 영토 확장을 위한 동맹이었던 것이다.

 

김춘추는 이를 알고 백제를 치기 위한 군사를 당에게 요구한다. 또한 당과의 외교를 위해 신라의 연호를 당나라의 연호-영휘로 채택하는 친당정책을 보인다.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의도와는 반대로 백제의 땅을 차지한다. 그러면서도 672년 당나라에 전쟁기간 동안 백제 땅 점령에 사죄하는 조공을 보낸다.

 

이 사실을 통해 김춘추는 신라가 상대적으로 약국임에도 불구하고, 전세와 상황에 따라 조율하는 밀고 당기기 식의 외교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수십 년간의 전쟁 속에서 통일을 이루고, 통일 후 왕권과 국가를 바로 재정립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에 대한 줄다리기식 외교술이 큰 역할을 했다.

 

80만 對 1의 외교담판- 서희

고려 성종12년(서기993년) 거란은 소손녕이 이끄는 80만 대군을 지금의 태천으로 쳐들어  오는 상황이 발생한다. 고려 장수들은 태천과 서경을 내주고 식량을 강에 버리고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 한다. 그러나 서희는 저들의 명분은 침략보다 두려움에 앞서 내놓은 것뿐이라며 성왕을 설득하고 거란 진영으로 담판을 지으러간다.

 

소손녕은 “조금씩 먹어 들어오는 고려로 부터 옛 고구려의 땅을 찾겠다”며 “바닷길로 송만 통교 말고 대륙으로 이어진 거란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라”고 요구한다. 서희는 대답으로 “아니다. 우리 국호를 보면 우리나라가 고구려 후손이다. 오히려 거란의 요동과 만주가 우리 땅 아니냐”며 반박했고, “우리도 어찌 조공을 하고 싶지 않겠느냐, 교묘히 여진이 압록강 주변의 길목을 막고 있어 통로가 없다.

 

거란이 그 지역을 찾아 준다면 통교하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며 회유한다. 그 결과 서희는 결국 압록강 주변의 땅을 받아낸다. 서희가 피 흘리지 않고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음은 병력 수 차이로 전쟁의 승패를 판단하지 않고, 고려-거란-송간의 역학관계를 소상히  파악하고 소손녕의 심중을 정확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對명 세습외교를 거스르는 외교-광해군

광해군 전 對명 외교로, 세종 때 명은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고 세종은 거절 한다. 후에 세조 때 명은 여진 토벌을 위해 파병을 요청하고, 세조는 여진의 확장이 두려워 파병을 결정한다. 성종 때 또다시 명은 여진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파병을 요청한다.

 

성종은 정효손의 “매번 오랑캐 토벌마다 파병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고민 끝에 대장 어유소에게 싸우지 말고 아닌 주둔만 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성종 후 사대주의의 사림학파가 등장하고 광해군 전까지 사대와 국익을 동일시하는 담론이 형성돼 명의 파병요청에 매번 응하게 된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또 다시 명으로부터 파병요청을 받게 된다. 광해군은 명은 이빨 빠진 호랑이로 여진은 급성장하는 세력으로 여기면서 강홍립이 이끄는 1만 군사를 다음 명령 하에 파병했다고 <이조광해군일기>에 전한다.

 

“호랑이가 산세를 끼고 위엄을 부리는 것에 조심할 것이며, 또한 그들의 행동을 잘 관찰하여 기회를 엿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호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 상황을 보면서 처신할 것이지 적에게 이동하는 것을 보여 주어 먼저 공격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결국 조선군은 사르후에서 누르하치에 패배하고 강홍립은 포로가 된다. 결과적으로 광해군은 명의 요청에 따라 파병을 하면서도 중립적 자세를 통해 후금으로부터 조선이 안전하도록 했다. 만일 세습적인 사대주의에 따라 파병을 하고 후금에 맞섰다면 조선은 국가적인 위기를 겪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급변속에서 유능이 대처할 수 있는 왕인 것이다.

 

미국에 대한 외교와 김춘추, 제 삼국-탈레반 피랍과 서희, 이라크 파병과 광해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과거와 지금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학의 바탕에는 “역사 그 자체로 반복된다”와 “옛날 사람도 우리만큼 생각했다”는 두 가지 진리가 존재한다.

 

김춘추는 통일신라 400년을 위해 40년 동안 당나라에게 굽혔고, 서희는 문관으로서 목숨을 걸고 논리라는 칼을 들이댔으며, 광해군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 앞에 세습적 고정관념을 깼다. 고구려 앞 김춘추의 신라도 거란 대군 앞 서희의 고려도 후금 여진 앞 광해군의 조선도 결코 강국이 아니었다.

 

외교는 국력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김춘추의 미래를 보는 끈기와 서희의 상황판단, 광해군의 고정틀을 깨는 융통성이 우리의 외교에서 필요하다. 그렇다면 피살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2007년 09월 02일 (일) 19:09:30 양정열 기자  x0109@hanyang.ac.kr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양대학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12.07 14:1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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