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마을을 마지막으로 저녁 8시가 되어, 민통선 생명, 평화 기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의 겨울 바람은 많이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남한의 가장 북쪽, 북한에서 가장 가까운 생창리 마을에서의 바람은 너무 매서웠는데... 왠지 그 서울과 철원만큼의 추위의 차이가 그날따라 왜그리도 크게 느껴질까? 아마도 마음의 무거움과 차가움, 그러나 한편에선 또 끓어 오르는 민통선에 대한 복잡한 사색때문인 듯 하다. 차갑고도 뜨겁게 느껴지는 그 차이가 차가움을 더 차갑게, 뜨거움을 더 뜨겁게 만들어 놓은 듯 하다.
우리가 거느릴 수 있는 남한의 최북선의 도로를 따라 꼭지 꼭지마다 머무르는 몇몇 전망대와 노동당사, 생창리 마을. 그리고 해박한 지식과 따뜻한 마음으로 파주와 철원, 연천의 숨은 이야기를 풀어헤쳐놓은 이시우 선생님과 함께 한 "민통선 생명 평화 기행."
'야단법석'이란 말의 본래적 의미는, '야'외에서 '단'을 차려놓고, '법'전을 듣는 것이다. 이러한 '야단'이 근대 교육에서의 기획과 맞물려 '교단' 중심의 교육이 되어 버렸다. 이반 일리히 선생님이 이야기 하시듯, 이제 배움은 "학교"의 독점물이 되었고 그 배움의 장소는 오직 학교의 '교단'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 내 삶의 일상을 제대로 성찰하며 살아간다는 것. 우리는 먼저 우리의 배움의 현장을 다시 찾아야 한다. 다시금 우리의 전통의 현장인 야단을 찾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야단 법석 이시우 선생님께서 민통선 생명, 평화 기행에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이서원
분단의 아픔이 고착화된 그 현장을 따라 따라, 단순히 분쟁의 지식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직접 보고 온 몸으로 느끼고 분단의 현실과 분단의 그 매서운 차가움을 경험하며, 그러나 그 분단의 선 가운데 있는 희망의 열정과 뜨거움을 느낀다. 군사분계선, DMZ의 이중적 의미. 군사적 분열과 긴장이 최고조이지만 또 한편으로 서로의 소통과 열림이 있는 바로 그곳. 그곳으로 떠나 본다.
파주 오두산 전망대 : 강의 만남, 사람의 만남, 통일의 꽃
파주 오두산 전망대에선,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접점, 한강이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광경을 볼 수가 있다. 남한에서 가장 큰 한강이 굽어 굽어 흘러오고, 북한 저편에서 임진강이 흘러들어와 하나의 지류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강이 한강 하구를 따라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하구에서의 두 강의 '조우'는 우리 민족의 조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강 하구: 오두산 전망대에서, 창문 저 너머로 한강 하구가 보인다. 한강 하구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합쳐지는 길목이다. 우리도 이렇게 언젠가는 만나 하나의 바다를 이루겠지... ⓒ 박민수
그런데 더 놀라운 비밀이 한강하구 속에 감춰져 있었다. 강과 강의 조우. 사람과 사람의 조우. 이 만남 속에 펼쳐질 수 있는 평화의 노래. 이 비밀이 한강 하구에 숨겨져 있다. 이시우 선생님은 한강 하구라는 강줄기에 애초부터 군사적 의미의 어떤 '선'이나 '지대'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강 하구의 수역은 비무장지대도 중립지대도 아니며, 오두산 전망대의 모형에 나와 있듯이 군사 분계선은 더더욱 아니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군사 분계선은 공식적으로 정전 협정에 의해 남과 북의 대치 상황을 보여주는 대치선이다. 이 대치선을 기준으로 하여 남과 북으로 각각 2km씩을 비무장 지대 즉 DMZ라 한다. 비무장 지대 외곽의 일정 부분을 민간인 통제 구역(이하 민통선)이라 하여 민간인이 들어가는 것을 통제한다. 남과 북의 관계는 이러한 삼중의 구역에 의해 나뉘어져 있다. 민간인 통제선을 넘어야 하고 비무장 지대를 넘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군사 분계선을 넘어야지만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이 가지는 재미있는 비밀이 여기에 숨겨져 있다. 동쪽의 고성으로부터 시작하는 군사분계선은 남과 북의 육지를 따라 쭉 이어져 내려 온다. 그 선은 나름의 형태와 의도를 가지고 남과 북을 실제로 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에서 흘러오는 그 선은 서해로 가까워오며,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에 이르르고, 정전협정 당치 한강 하구라 이름 붙인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도착하게 된다. 군사 분계선은 역시 이 한강 하구를 가르고 있는가? 답은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니다. " 군사 분계선은 고성부터 장단까지 155마일이며 "장단면 정동리 즉, 임진강 하안"에서부터 끝이 난다.
1953년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지 3달째 접어든 10월 3일. 한강 하구에 관한 부속합의서가 체결된다. 여기서 한강하구라는 공식 명칭이 부여되며 한강 하구는 남북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지만, 거기는 군사분계선도 정전협정도 없다고 한다. 정전협정 이후 만들어진 후속 문서에서는 군용선박이나 무기, 탄약을 실은 배의 출입 같은 것을 제하고서는 남북 쌍방이 오랫동안 한강 하구를 이용하던 관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조금 이야기를 돌려보자.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9월 김정일 국방 위원장을 만나러 북한에 갔을 때, 차량을 이용한 것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탐방하기 이전, 노무현 대통령 및 그 일행은 "유엔 사령관"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남한의 대통령이 북한을 차량으로 방문하는데 왜 유엔 사령관의 허락을 맞아야 했을까?
그것은 남한 쪽의 비무장 지대를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 이후, 정전 협정 시, 협정의 주체에서 남한 정부는 제외되어 있었다. 북쪽의 주체는 중국과 북한 정부이고, 남한의 정부는 유엔 사령부였다. 즉, 정전 협정상 비무장 지대의 통제권은 유엔사령관에게 있는 것이며 남한의 비무장 지대는 남한의 땅이지만, 유엔 사령관의 허락없이는 그 어떤 것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한강 하구는 군사 분계선도 없고 그러기에 비무장 지대도 없다. 이 공간은 열린 공간이며 남과 북의 민간인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며 외부세력의 허락 없이 우리의 통일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평화와 상생의 공간'이다. 육지로만 굽이 굽이 치던 그 선이 왜 하필이면 서해의 끝자락에서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그 지점으로 흘러왔을까? 그 선이 조금만 더 위로 흘러갔거나, 조금만 더 밑으로 흘러 갔다면 평화의 공간, 한강 하구는 우리에게 만남의 장소가 될 수 없다. 아마도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 아닐까? 선물은 받아야 하고 누려야 한다. 여전히 남과 북 안에 있는 법적 제재 등 넘어야 할 벽이 존재하지만, 한강 하구는 민간인이 주도해 나갈 수 있는 통일의 서곡이 될 수 있다.
강이 만나고, 그 강의 만남 속에 사람이 만나고, 그리고 그 사람의 만남 속에 통일의 꽃이 피어 오르는 상상이 왜 자꾸 내 머리에서 가시지 않는걸까?
태풍전망대 : 철책선의 비극.
또 다시 버스를 탔다. 오두산에서 새롭게 안 사실들을 가슴에 담았다. 이상하리만큼 뜨거워지는 가슴. 우리 기행단의 두번째 목적지는 "태풍전망대"였다. 실제 부한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고, DMZ를 가장 시원하게 볼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전망대. 그러나 내 가슴은 전망대에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싸늘해 지고 있었다.
▲ 태풍 전망대 DMZ가 가장 잘 보이는 전망대란다. ⓒ 이서원
태풍전망대에서, 함께 온 45명 정도의 사람에게 전망대에서 보이는 여러 지형과 그 지형에 얽힌 이야기를 설명해주는 정훈병사를 만났다. 한마디 막힘도 없이 술술 흘러나오는 병사의 설명 속에, 군대라는 공간에서 주어진 습속화된 분단 이데올로기의 잔상을 너무 뼈저리게 느꼈다. '적군'이라는 말, 전투에서 우리 부대가 어떻게 저 고지를 점령했는지에 관한 설명, 군사분계선으로부터 2km였던 비무장지대가 어떻게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좁혀와 바로 눈앞에서 보이게 되었는지, 지형을 바라보기 위해 바라보는 유리가 왜 방탄 유리가 되었는지에 대한 일화 등, 모든 이야기가 분단을 배경으로 북한을 적으로 간주한 채 '우리 중심'에서 이야기를 펼쳐냈다.
더 가슴 아픈 이야기는 비무장 지대를 표시하는 철책선에 관한 것이다. 정전 협정 당시, 비무장 지대의 끝을 상정하는 표시는 듬성 듬성 박혀 있었던 말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뚝이 68년 제 2의 한국전쟁의 위기를 지내며 북한의 제의에 의해 철책선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철책선만으로 모잘라 고압선을 그 위에 또 깔게 되었다.
▲ 철책선
보이지 않던 말둑이 보이는 철책으로 변하고, 그 철책위에 고압선이 깔렸다. 정말 무서운건, 분단 그 자체보다 우리 속에 내면화된 분단체제이다. ⓒ 박민수
정말 무서운 것은 정전 협정이 아닌 '정전 체제'이며 '분단 체제'이다. 협정에서 체제로의 변화는 외부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강제하는 '자기 구속'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속에 익숙해지며 습속화되는 것이다.
한강 하구의 기쁨에, 한강 한구의 가능성에 뜨거워졌던 마음이, 그 철책선을 바라보며 왜 그리도 냉담하게 변해버린 걸까? 아무 것도 없어도 될 그 곳에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철책을 올리고 그 철책에다 또 고압선을 설치하는 이 비극.
이 비극은 단순히 우리 인간만의 비극이 아니다.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숲. 우리는 전쟁의 이면 속에 있는, 문명의 배후에 있는 '숲'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환경을 파괴하는 가장 빠르고 가장 극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전쟁이다. 치열한 전투의 현장은 인간 뿐 아니라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전쟁이 지나간 후 50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이곳은 다시 그 본래의 모습을 찾았는지 모른다.
DMZ.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천혜의 공간. 분단 체제의 연장으로 손이 닿지 않는 이 공간에서 자연이 가장 평화롭게 그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며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이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3, 노동당사 : 분단 체제 하에서의 언어의 혼란
태풍 전망대에서의 차가운 기운을 뒤로 한 채 우리가 탄 버스는 철원으로 향한다. 철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 우리 학교에 나오는 '하나'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어른들을 가사를 제대로 외우질 못했는데, 함께 동행한 아이들은 노랫 가사말을 한자도 틀리지 않고 외워 어른들보다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하나로 되자 하나로되자 이 기쁨을 누구에게 전할까 이 노래를 이 춤을 희망을 내일의 우리들에게..."
우리가 하나되는 꿈을 꾸며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철원에 있는 노동당사를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하나로 되는 그 희망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노동당사는 거의 기적적으로 보존된 건물이다. 폭격이 오가고 어느 지역보다도 치열했던 전투가 횡횡했던 철원에서 미약하나마 아직 그 뼈대가 남아 있다. 1947년 김일성 대학이 만들어 지고 흉년이 풀리면서 노동당사가 만들어 졌다고 한다. 노동당사의 특징은, '광장'이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의사를 진행하고 정치적 참여를 이룰 수 있는 공간. 함께 모여 축제를 열 수 있는 공간인 광장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 억압당하고 차별받으며 살아왔던 민중들에게 이 광장이 가지는 의미는 분명 그들의 존재의 가치를 새롭게 부여하는 일이었으리라. 이곳에서 사람들을 모였을 것이고 연일 해방 이후의 축제의 분위기를 연출했을 것이다. 이 열정과 축제의 분위기가 건축의 미학 속에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노동당사를 설명하는 '간판'에는 이와는 다른 내용이 적혀 있다.
"공산 독재의 정권 강화와 국민통제.... 1개리당 백미 200가마씩을 착취..."
▲ 노동당사 팻말 분단이 얼마나 고착화 되어 있는가는 우리의 아주 작은 말 속에 드러나 있다. 노동당사의 팻말에 나온 북한의 착취에 대한 설명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 박민수
우리가 규정하는 노동당사는 해방 이후 농민과 민중을 착취하는 곳이며 공산 독재 정권이 인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구속하는 수단으로서 존재했다. 그러나 이시우 선생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문건을 찾아 보아도 실제 여기 살았던 사람들에게 찾아가 물어보아도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한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믿어 온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렇게 믿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로 되는 그 희망이 희미해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의 팻말, 하나의 문장, 하나의 말. 이는 우리의 자그만 태도 속에 우리가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상이다. 그러나 희망이 흐릿하다면 그 희망을 분명하게 만들어야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태도 속에 깊숙히 뿌리박혀 있는 적대적 태도이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도록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 아래에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우리의 가짜 순진함 때문이다. 하나되는 것에 대한 희망을 살리기 위해 우리 안에 내부화된 상대방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민통선 생명평화 역사기행을 돌아보며...
우리의 역사에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도 많고 그 사연 속에 묻힌 깊은 상처도 너무 깊다. 이 사연과 상처 속에 우리는 서로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하고 서로를 가해자라 윽박지르고 자신을 피해자라 호소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가해자가 아니며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다. 우리 모두가 복잡한 역사의 아픔 속에 우리 모두가 아픔이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자.
민통선 생명, 평화 기행. 파주와 연천, 철원을 지나오며 보고 느낀 야단에서의 DMZ와 민통선, 그리고 그 주변 지역은 참으로 복잡한 곳이고 참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곳이다. 우리 민족이 걸어왔던 피의 흔적이 서려 있고 파묻혀 있는 지뢰와 대치하는 전쟁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 남과 북이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공간이며 서로의 아픔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며 희망과 통일의 기운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위기는 기회이며 기회는 곧 위기이다. 그 종이 한 장의 차이는 누가 어떻게 그 희망의 서곡을 그려나가며 그 공간을 맞이하는가의 문제이다. 우리에겐 하나로 되는 것에 대한 희망이 있고 그 희망을 향해 우리 안의 미움을 씻어내고 통일의 꽃을 피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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