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군 '노동당사'의 시계는 1953년 7월 27일에 멈춰 섰는가?

'노공당사'의 안내문과 개성시청 폐허지 안내문(가상)

검토 완료

이의협(sanluh)등록 2008.01.03 18:11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 '노동당사'의 안내문 전문을 인용한다.

'이 건물은 8. 15해방 후, 북한이 공산독재의 정권강화와 국민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하고 6. 25동란 전까지 사용하던 북한 노동당 철원군당으로서 악명을 떨치던 곳이다. 북한은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이란 구실로 1 개리 당 백미 200가마씩을 착취하였으며, 인력과 장비를 강제 동원하였다.
공산 치하 5년 동안 북한은 이곳에서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양민수탈과 끌려 들어 가면 시체나 반송장이 되어 나올만치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른 곳이었다. 이 건물의 뒤 방공호에서는 많은 인골과 함께 만행에 사용된 수많은 실탄과 철사줄 등이 발견되었다'

소름이 돋고 섬찍함이 느껴진다. 흉칙하게 뼈대만 남아, 한쪽으로 붕괴되려는 것을 버팀목으로 괸 이 역사적인 건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중에는 눈물이 날듯하다. 이 안내문을 50년이 넘도록 많은 국민들이 읽고 무엇을 느끼게 하였을까? 이제는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더 이상 이 안내문을 읽게 해서는 안 된다. 동족에 대한 적개심, 증오감을 정화하고 화해 상생하는 논리와 정서를 만들어야 한다.

슬기로운 민족은 민족사의 비극에서 새로운 희망의 동력을 만들어 낸다. 철원의 모든 전적지, 기념관, 기년탑에서 우리는 미래의 위대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역지사지하자. 해방후 5년간 대한민국 치하에 있던 개성시는 정전 후 북한의 영토가 되었다. 북한당국이 남한처럼 개성시청 폐허지에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설치했다고 가정하자.

'이 개성시청 청사는 8. 15 해방 이후, 6.25 전쟁 당시까지, 남한의 주로 친일파 세력들이 미제의 매국노가 되어, 노동자, 농민의 피땀을 짜내어, 인민을 지배했던 악명 높은 곳이다. 남쪽 괴뢰정권은 이 건물을 지을 때, 건축업자와 관리들이 뇌물을 주고받고 공사비의 반은 착복하였다.
  괴뢰정권 5년 동안 남한정권은 이곳에서 보리고개에 초근목피로 근근히 목숨을 이어가는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고, 돈 있고 권세있는 집 자식들은 병역도 면제해 주고, 돈 없고 빽 없는 집 자식들만 국방군에 끌려가 모진 기압과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또 친일파, 지주 매국노 반동들은 좌익 청년들을 사상이 불순하다고 마구 학살하였다.'

서로가 상대방을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기고, 상대를 '빨갱이'로 '미제 앞잡이 매국노'로 물어 뜯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서로가 상대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평화적으로 차근차근 화해와 통일의 길로 나아가자고 남북의 최고 지도자들이 두 번씩이나 손을 맞잡았다.

1953년에 멈춰 선 철원군 노동당사의 시계를, 2008년 1월 3일 오늘의 시간으로 돌리자. 55년 전의 낡은 논리와 감정으로 오늘의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가? 자라나는 우리 후솓들에게 부끄러운 동족장쟁의 유산을 물려 줄 수 있는가?

뼈아픈 민족사의 상징적 건물(노동당사)에 우리는 새로운 통일 교과서에 실을 안내문을 써 보자.

'셰계 2차 대전 이후 우리땅 한반도는 강대국에 의해 북위 38도 선으로 양분되었다. 철원군은 38선 이북에 위치하여 북한 정권에 들어갔다. 동족상쟁이 일어나고 3년 후 정전협정이 체결되어,철원군은 대한민국의 영토가 되었다.
  철원읍지(1937년 일재하)에 보면 , 당시에 인구가 약 2만명, 초,중,고 학생이 1700여명이나 되고,은행이 4개, 경마 후련장, 시체 화장장까지 갖춘, 강원도에서는 두, 세 번째 가는  시장과 경제력을 가진 풍요로운 도시였다.
  바다같이 넓은 곡창 평햐지대는 1년 농사 지어, 5년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지금은 연천군 신탄리에서 끊긴 철로가, 노동당사 서북쪽 2.5km쯤에 위치한 철원역을 지나 동북으로 원산에 닿았다(경원선).또 철원역에서 동쪽으로 금강산선 철마가 철원 평야지대를 가로 질러 금강산에 도착했었다. 물산은 푸요하고 인심은 순후하였다.
  이 모든 주민 생활 전반을 관리 통제하는 최고 권력기관의 건물이 바로 이 노동당사이다. 노동당사 서북편 들판과 남쪽으로는 폐허가 된 구 철원읍 공공기관과 시가지, 제사공장, 경마용 말 훈련장이 있었다.  남쪽에는 조선시대의 과아터가 있었고, 관동별곡을 쓴 시인 송강 정철이 올랐다는 '북관정' 터도 있다. 노동당사는 철원시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구 철원읍 시가지 서쪽 민통선 안 들파에는 겨울에 섭씨 15도의 물이 샘솟는 '샘통'이란 곳이 있는데, 시베리아에서 날아오는 두두미(학)와 기러기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두루미와 기러기 철새들은 사람이 가까히 하면 달아나는데, 동족상쟁을 한 우리 민족에게 이제는 제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살라고 말없이 훈계하는 듯하다.

철원의 백마고지 전투전적지를 비롯하여, 여러 곳의 전투기념비나, 기념관, 위령탑, 충혼탑에 쓰여있는 문장, 시문, 기도문 등은  ; 우리 후손들에게 평화 통일의 정신을 굳게 하는 것으로 고쳐 써야 할 것이다. 동족 간의 대결과 증오심을 북돋우는 1950년대의 어두운 생각과 감정은 이제 상생과 화해의 봄바람으로 녹여햐 하리라.
  

덧붙이는 글 | 민족 간에 미움과 대결을 조정하는 노동당사 안내문은 이제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미래의 꿈을 안고 사는 민족입니다. 동족상쟁의 격전지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썼습니다.


덧붙이는 글 민족 간에 미움과 대결을 조정하는 노동당사 안내문은 이제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미래의 꿈을 안고 사는 민족입니다. 동족상쟁의 격전지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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