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책읽기, 지혜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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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235st)등록 2008.01.08 19:18

난 책 읽기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그러나 굳이 읽는다면  인문학 서적보단 소설 읽기를 택할 때가 많다.

그 까닭은 소설이 쉬어서 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예를 들어 인문서적이 말하는 "고구려가 668년에 망했다"라는 구절에 보이지 않는 그 당시의  상황을 소설은 그나마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은 인문서적이 하지 않는 그 현장성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부분으로 자리 한다.

 

요즘 나는 자기전 30분 정도 레미제라블을 보고 있다.

이 소설은 지금 1795년 부터 1815년 까지의 상황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계몽시대의 개념으로 다가왔던 그 시대를 여러 생생한 말들로 풀어 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 칸트나 헤겔을 공부하는데 밑그림으로 작용한다.

 

 난 책 읽기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그러나 굳이 읽는다면 여러권을 읽기 보다 한권을 여러번 보는 쪽을 택할 때가 많다.

그 까닭은 여러번 읽다 보면 본 내용이어서 편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예를 들어 이것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바로 다른 여자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마음과 비슷하다. 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를 읽고 와타나베가 요양원에서 나오코와 지냈던 시간을 그들만큼 소중히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소중한 기억을 느끼는데, 그 느낌으로 같은 저자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 읽을 수 없는 노릇이다.

 

카뮈의 페스트를 읽은 후 난 지하철 안에서 순간 페스트 균이 지하철 손잡이에 있다는 생각을 하며 손잡이를 잡는 것에 움찔했던 적이 있는데, 이 페스트의 공포는 랑베르만큼은 아니어도 나에게 존재 한 건 사실이었다.

 

 나는 홍세화씨의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를 즐겨 본다.

금전적 여유가 있었을 당시 이 책을 여러 사람들에게 선물한 적도 있다.

따라서 홍세화씨는 나에게 대략 감사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난 홍세화씨에게 사과해야 할 필요도 있다.

내가 그 책을 선물했던 사람들은 홍세화씨의 모습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홍세화가 거기에 갔던 사건, 그리고 그를 거기에 머무를 수 밖에 없게 한 그의 행동 그리고 그가 실명을 거론한 전현직 정치인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 홍세화의 의도에 아무 관심도 없는 이들에게 반쯤의 관심은 불러 일으킨 격이니 감사받고 사과해야 할 노릇이 되어버렸다.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은 암기에 잠뱅이였다고 한다. 그는 "책을 펼쳐 보면 될걸 왜 외워야 하나"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의 이런 모습에서 난 나를 그리고 그들을 비판한다.

맑스의 니체의 그리고 하버마스의 따옴표 말에 집착하는 나와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고 따옴표에 집착하는 이들 그러니깐 지식에만 관심 있는 이들은 아인슈타인의 원자폭탄 반대와 같은 태도를 가질 수 없게 된다

2008.01.08 19:17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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