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이 진정 바라는 공교육 개혁이란.

검토 완료

박재홍(nevada51)등록 2008.02.03 18:51
- 인수위의 도박은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대운하", "영어 교육 로드맵"
최초의 경제계 출신 대통령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정식 출범도 하지 않은 이명박 예비 정부의 행보가 여간 요란스러운 것이 아니다. 대운하와 영어 교육 개혁 정책 덕분에, 대통령 직 인수위는 연일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인수위의 주장에 따르면, 대운하와 영어 교육 개혁 정책은 모두 국운을 뒤흔들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나도 기본적인 골격에 있어서 그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대운하 정책이 대한민국 경제와 환경에 미칠 영향은 당선자의 말대로 나라를 뒤흔들만하니까.

헌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런 '블록버스터급'정책에 대해서 놀라우리만치 자신감에 차 있다는 것이다. 반대 의견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 당선자는 영어 교육 개혁 정책을 비판하는 세력을 역주행으로 규정하며, "반대 없이 변화하는 것은 없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반쪽 공청회도 마찬가지다.

대운하는 또 어떠한가? 인수위는 인터뷰를 살펴보면, 반대 논리를 국가적 차원의 완성도를 높이는 소중한 소수 의견의 하나로 보고 있으며, 친절하게도 청계천을 그렇게 반대했지만 무릅쓰고 추진했다는 일화까지 들려 주며 당선자의 추진력을 설명해주고 있다. 대운하 반대 세력에 정치적 의도가 깃들어져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아 주신다.

이쯤되면 인수위의 가치관을 가늠해볼 수 있다. 찬반 양론의 무게감이 너무나 다르다. 한 쪽이 앞으로 5년 간 국정을 운영해 나갈 힘 있고 추진력 강한 정부라면, 한 쪽은 정치적 냄새를 풍기고 시대를 거스르며 역주행 중인 사람들이다.

국민들은 먹고 살기 쉬워질까 싶어 뽑은 대통령인데, 정작 대통령은 정부 정식 출범도 하기 전부터 '국운'을 가지고 도박을 하고 있다. "이 게임은 무조건 내가 이겨"라는 자기 최면과 함께.

- 인수위는 스스로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다.

분명히 현재의 영어 교육 정책은 문제가 있으며, 변화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견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방법이다.

"제한된 재원을 얼마나 제대로 활용하느냐"는 정책을 구성하는데 가장 먼저 고려해봐야 할 부분이다. 거기다 그들이 손을 대고 있는 부분은 다름아닌 교육이다. 차분히 각계 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며 중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나가기에도 모자랄 판에, 그들은 허겁지겁 정책을 만들어서는 여기저기 터지는 구멍을 막느라 여념이 없다.

영어가 국가 경쟁력이라는 미명 아래 무차별적인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영자 천하지대본(英者 天下之大本)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고 보는가?

제한된 재원과 인력이라면 당연히 영어가 어느 부분에서부터 필요한지, 어느 부분에서부터의 변화가 국가 경쟁력의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치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교육은 인수위 같은 무식한 접근을 이해해 줄만한 하찮은 것이 아니다.

거기다 영어 과목을 의식한 나머지 다른 과목의 중요성을 완전히 배제해버렸다. 전 교과 영어 수업 실시는 바로 인수위의 가치관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초,중,고 교육의 목표는 "국가 경쟁력에 이바지하는 국민", "좋은 대학 들어가는 학생"을 키우는 곳이기 이전에, "올바른 민주 시민"이자 "올바른 문화 의식과 역사관을 갖춘 학생"을 양성하는 것이다.

헌데 인수위는 어떠한가? 교육이 가져야 하는 가장 큰 목표를 완전히 망각한 채, 영어 정책에만 몰두하고 있지 않은가? 교육은 바로 인수위같이 문화 의식 없고, 앞뒤 구분 못하는 학생들을 바로 잡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인수위는 스스로 자신들의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21세기, 영어의 영향을 받는 나라이기 이전에 한글을 모국어로 채택한 나라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한글에 의해 돌아간다. 영어는 부가적인 가치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일 뿐. - 영어의 영향력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 문제의 본질을 망각한 채 영어에만 치중하는 인수위의 행태는 엄연한 주객전도다.

- 고등학생인 내가 바라는 인수위의 교육 개혁

첫째. 올바른 민주 시민 양성

예컨데, 학생들의 두발 규제를 살펴 보자. 최근엔 많이 완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학교에서 두발 규제를 교칙으로 두고 있다.(우리 학교도 마찬가지다.) 두발 규제는 엄연히 개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위법이다. 하지만 두발 규제에 대한 성인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학창 시절에 대한 피해의식이라던지, 머리가 길면 공부가 안된다라던지에 의견을 제외하더라도, 삶의 경험이라는 둥 3년만 참으면 된다는 둥 사회에선 더 큰 어려움이 있다는 둥 두발 자유화를 원하는 학생들을 못마땅히 여기는 눈치다. - 물론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님을 밝혀 둔다.-

실제로 두발 자유화를 주장하는 학생들이 처벌을 받은 것은 새삼스런 옛날 일이 아니며, 학생 인권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이 필요 이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옛날 일이 아니다. 대다수 학생들은 자신들의 인권을 망각하고 있고, 국민들은 그럴 시간에 영어 단어 한 자를 더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앨빈 토플러의 말대로, 시대는 21세기인데 교육은 여전히 80년대 군사정권이다. 저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성인들이 존재하고, 저런 인식 속에서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인권 침해를 인식하지 못한 채 학창시절을 보내는 학생들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 공교육이 선진화될 순 없다.

둘째. 올바른 문화 의식, 역사 의식 고취.

할머니가 서울대 역을 가기 위해 학생에게 "학생, 서울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학생은 "국·영·수 위주로 하면 됩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참 오래된 유머다. 내가 초등학교 때 읽었던 유머 책에서 처음 봤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는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모르고 웃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 보면 오히려 쓴 웃음만 나온다.

입시지옥 속 학생들에게 있어서, 대중 교통을 타고 서울대 가는 방법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서울대 가는 길은 "국·영·수" 잘하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대중 교통을 타고 서울대 가는 방법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주요 과목에 몰두한 나머지 그 이외의 것들에 무관심한 학생들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것을 잃어버렸다. 야간자율학습을 위해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었고, 내신과 수능 준비를 위해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버렸고, 잊어 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역사를 잃어버렸다. 이웃 나라가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애를 쓰는 동안, 대한민국은 국·영·수에 열중했다.

5.18과 8.15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

이 것이 바로 대한민국 공교육이 낳은 현실이다.

지금 우리 국민에겐 민주 의식도, 문화 의식도, 올바른 역사관도 없다. 그런 국민들이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나라를 이끌어나갈 수 있을까.

올바른 문화 의식, 역사 의식을 갖춰야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영어를 잘하는 것만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자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고 정체성을 갖춘 국민이야말로, 진정 국가 경쟁력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

셋째. 지식의 함양

오렌지 -> 어륀지. 프렌들리 -> 후렌들리.

인수위 이경숙 위원장이 오렌지로 발음하자 못알아 들은 원어민의 일화를 얘기할 때 나는 그녀의 무지함이 안타까웠다. 왜 저 사람은 자신의 정책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영어가 필요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정보의 홍수 속에 영어로 된 정보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고, 대부분의 나라가 서로 소통할 때 영어가 가장 주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발음 문제는 전적으로 후자에 포함된다 볼 수 있는데, 나는 이 위원장이 발음 표기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세계가 영어권에 속해 있다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발음을 할까. 미국과 영국의 영어 차이는 그냥 지나치더라도, 남미계 영어, 남아시아계 영어, 아프리카계 영어, 전부 다 똑같은 발음이 아니다.

지금 이경숙 위원장은 미국어를 배우기 위해 이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국제어로서의 영어를 배우기 위해 이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인가.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영어 발음이 좋아서 지금 그 위치에 있다 보는가. 가나 출신 코피 아난의 영어 발음이 훌륭해서 현재와 같은 지위를 얻었다고 보는가.

문제는 어떤 교수의 말마따나 얼마나 잘 하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아느냐 이다. 물론 현재 우리나라의 발음 표기법이 완벽하다고 볼 순 없지만, '잘 아는 국민'을 기르기 이전에 '잘 하는 국민'을 신경 쓰는 이경숙 위원장의 발언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이 위원장처럼 뭐가 더 중요하고 뭐가 덜 중요한지 구분할 줄 모르는 국민, 외국어는 커녕 모국어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국민들이 정말 세계에 나아가 대한민국의 국가 경쟁력에 긍정적 영향만을 미칠 수 있다 보는가?

넷째.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 차분하게 개혁하라.

위에 언급한 것들은 정책을 계획하고 실시한다고 해서 뚝딱 해결되는 사안이 아니다. 여권 신장을 부르짖고 있지만 모든 부분에서 평등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교육도 정책을 실시한다고 해서 순식간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위에 문제점들을 언급한 이유는, 대한민국 공교육의 문제가 단순히 영어 회화 못하는 국민을 만드는 것에만 있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영어 교육 개혁. 물론 좋다. 하지만 그 것이 대한민국 교육을 선진화시킬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저렇게 산재한 문제점들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 교육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영어 교육 개혁은 잔가지에 불과하다.

진정한 대한민국 교육의 선진화를 추구한다면, 장기적으로, 최소한의 오차까지 줄여서 차근차근 변화해야 한다. 이렇게 성급하고 대책 없는 영어 교육 개혁은 문제점만을 가져올 뿐이다.

사운드 카드를 바꾼다고 해서 컴퓨터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더더군다나 사운드카드를 어디서 급하게 구해다 온 것이라면, 컴퓨터의 고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교육은 차분하고 천천하게 개혁해나가야 하는 백년지대계이지, 이명박 예비 정부의 업적을 빛낼 사치품이 아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