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살의 미국 유학생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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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복(songyb)등록 2008.02.07 12:55
44살의 미국 유학생활 (2)

미국 대학에서 내가 듣는 수업을 담당하는 히스패닉 풍의 그 교수의 목소리는 큰 편이 아니었다. 교수 바로 앞쪽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앉고 나니 이제 온전히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국에서 그 지긋지긋한 중고등 학교의 영어교육과 대학의 교양영어 수준의 교육이 전부인 나로서는 영어를 과연 알아들을 수 있을까? 나에게 뭘 시키지는 않을까 그야말로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 유학을 하며 외국어로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경험을 해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어 귀머거리인 나로서는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나의 첫 유학 경험은 정말이지 다시 생각할수록 식은땀이 나는 그런 웃지 못할 일화들의 연속이었다. 그 짓을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매는 맞을수록 덜 아픈게 아니고 점점 더 두려움이 커져가는 법이다. “그때는 젊기라도 했지” 하는 마음이 자꾸 든다. 그럴수록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나이가 뭐 중요해 그냥 들이대는 거야 멕시코 유학 때처럼 말이야~” 라는 주문을 외워본다.
친절한 멕시코의 교수들이 나의 “한 수업시간에 무조건 한 가지씩 질문하기” 원칙에 얼마나 당황하고 고통을 겪었는지 생각을 하면 지금도 미안할 뿐이다. 내가 일단 손을 들고 질문을 하려하면 강의실 전체가 모두 긴장한다. 모든 학생들이 호흡마저도 멈추고 나를 주목한다. 저기서 끄덕 끄덕 졸던 녀석도 재미난 일이라도 생겼다는 듯이 땡그란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본다. 내가 엉터리 스페인어로 몇 마디 지껄이면 이제부터는 모두 다른 사람들의 몪이다. 학생들과 교수 모두 각각 의견을 내 놓는다.
호세가 먼저 말을 한다. “송(멕시코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이 질문하려고 하는 거는 이런 걸꺼예요 교수님”,
여기에 아드리아나가 반박을 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송이 이런 걸 묻고 싶었던 거 같은데요.”
내 말을 자기가 가장 잘 알아듣는 다고 자부하는 전속 통역사를 자처하는 아이도 있었다. 저마다 한마디씩 하면서 나의 얼굴을 쳐다보면 내가 드디어 이 어려운 퀴즈의 정답자를 지정해 준다. 사실 딱히 정답 같은 것이 있는지 헤깔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말이다. 그럼 교수는 또 열심히 쉬운 단어를 써서 천천히 설명을 해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말을 이렇게 써서 그렇지 사실 그 상황이 나에게는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었던지 지금도 고개가 절로 저어지고 쓴웃음이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야 한량이 없다.
나의 멕시코에서의 유학의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무궁무진이다. 특히 초기 스페인어 실력이 부족할 때의 갖은 엉터리와 양심불량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한번은 짜깁기로 베껴간 리포트를 온전히 내가 쓴 것으로 생각을 한 교수가 나에게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던 적도 있었다. 그 교수는 한국 학생들의 천부적인 베끼기 기술에 대하여 잘 알 리가 없었다. 모든 학생들이 같이 박수를 쳐주었는데 지금도 그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쓰라린 표절의 기억을 말이다. 역시 사람은 죄짓고는 못사는 가 보다. 지금도 그 교수를 만나면 고백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서 그 교수는 이미 은퇴를 하고 안 계시지만 말이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저의 그 때 그 레포트 베낀 거였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생각을 하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이런 나의 첫 유학시절의 일화들을 생각하면서 그때의 그 마음으로 다시 새로운 언어를 쓰는 나라의 강의실에 앉았다. 그런데 그때보다 상황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으니 어찌 수업시간에 긴장이 안 되겠는가. 20여년전 멕시코 유학의 첫 수업을 듣는 그 느낌 그대로 그렇게 오늘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곳 똑똑하고 잘난 미국 사람들이 나를 멕시코 유학시절처럼 그렇게까지 배려해 줄 것 같지도 않다는 느낌이 든다. 막무가네 정신으로 일단 수업에 들어오기는 하였는데 참 난감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나이 44에 다시 학생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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