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살의 미국 유학생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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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복(songyb)등록 2008.02.07 13:07
44살의 미국 유학생활 (3)

내가 미국에서 듣는 수업은 라틴아메리카 사회학 개론이다. 그런데 그 담당교수의 발음이 심상치 않다. 내가 영화에서 본 허연 금발의 미녀가 하는 그런 발음이 아니다. 중남미에서 온 사람이라는 표가 팍팍 나는 외모를 하고 있는 그 선생님이 쓰는 말은 스페인어를 영어로 그대로 직역해 놓은 듯 한 말투였다. 발음도 그렇고 문장구조나 쓰는 단어들도 스페인어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나로서는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기는 하지만 사실 좀 실망이다. 이곳에 왔으니 정말 제대로 된(?) 코쟁이의 그런 강의를 듣고 싶었던 부분도 있었는데 말이다. 하여간 그 교수의 말이 나의 귀에 쏙쏙 들어오며 잘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그 교수가 자신의 영어에 대하여 한마디 한다.
“저는 책을 보면서 영어를 해서 영어가 부족하고 발음이 좀 다릅니다. 그러니 혹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거나 하면 언제든지 질문을 해 주세요. 우리가 언어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의사소통 아니겠어요...”
와우~~ 바로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바를 실제에서 그대로 보여주는 말을 아주 편안하게 하는 교수가 참으로 존경스러워 보인다.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 그리고 영어 발음은 곳 생명이다. 영어 실력을 나누는 척도이고, 교양의 정도이고, 멋있는 놈과 꼬질한 놈을 구분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에서 들리는 그런 혀가 완존~히 꼬인 발음이 일단 나왔다 하면 이건 분명이 뭔가 있는 사람이 된다. 영어는 좀 지껄이기는 하는데 발음이 영 그렇다고 한다면, 얘는 힘든 집안 살림에 그래도 신분상승은 좀 하고 싶어서 어렵게 필리핀 가서 궁상떨다 온 아이가 된다. 물론 그나마도 영어를 못하는 애들은 더 이상 말 해 무엇하랴. 영어를 왜 배우는지 무엇에 쓰려고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저 영어를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일단 한국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그 영어 잘하고 못하는 것의 척도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발음이다. 그러다보니 그 발음이라고 하는 것이 의사전달을 정확히 하기위한 그런 것이 아니라 얼마나 본토의 발음에 가까우냐 아니냐가 중요한 척도가 된다.
껍데기, 포장지, 상표, 겉치레만을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의 기질이 영어학습에도 그대로 들어난다. 그러다 보니 내용물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은 그만큼 뒷전이 된다. 그리고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영어이고, 백인 원어민 교사이고, 혀 꼬부라진 소리에 주눅이 든다. 그런 현실 속에서 살다 이곳 미국에 와서 소위 영어의 본토라고 하는 곳에 와서, 그것도 대학의 강의실에서 교수가 하는 전형적인 히스패닉 발음과 자신의 영어에 대한 당당한 설명을 들으니 우리가 가진 그 껍데기 추종의 덧없음이 더더욱 느껴진다.
외국인이 한국말을 하면서 발음이 다르거나 어색한 것을 우리는 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재미있다고 티브이 프로에 앉혀 놓고 들으며 좋아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영원히 한국어 발음을 우리와 똑같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부분이 재미있기까지 한 것이다. 그 사람들이 어색한 한국어 발음을 한다고 죄스럽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미국에 살고 있는 히스패닉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적인 특징들이 들어나는 그 영어발음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다만 정확한 의사소통을 하려는 노력을 한다.
경상도 사람이 경상도 말을 한다고 해서 서울에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경상도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그것을 꼭 바꾸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다. 언어는 그런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우리의 영어 흉내 내기에 대한 열등감과 막연한 우상화가 얼마나 실체가 없는 것인가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들이 한국적인 영어를 한다고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끄러운 것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히스패닉이 하는 영어를 들으면서 콧방귀를 펑펑 뀌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진다. 누가 누굴 우습게 봐야하는 건지 이정도 되면 그야말로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미국 사람들이 한국사람들의 그런 영어에 더 후한 동정 점수를 주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한국사람들이 하는 영어보다도 내용을 중시하는 히스패닉들의 영어가 더욱 잘하는 영어가 되는 경우가 많다. 되도 않는 꼬부랑 발음을 하느니 비록 외국어식의 발음이지만 정확한 내용을 가진 언어가 훨씬 중요하다. 적확한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발음이 나빠도 이야기의 흐름상 내용을 더욱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생각이 확실하면 최소한의 언어로도 정확한 의사전달이 된다는 점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한편 만일 우리가 미국사람과 똑같은 발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치더라도 미국사람들이 뻔히 동양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그런 한국계를 백인과 똑같이 대해 주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물론 이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제만 말이다.
스페인 태생의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 위원장인 사마란치가 스페인어식 발음으로 “아이 암 아 쁘레지덴떼”(I am a presidente...)라고 해도 그의 그런 발음이 세계 중요 직책을 수행하는 데에 결격사유가 된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영어를 못 알아듣는 미국 사람도 없다. 그런 발음을 조롱하고 격하하는 사람들은 우리뿐인 것 같다.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에게 중요한 것은 발음이 아니라 내용전달이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이곳 미국대학의 관계자도 전혀 의심치 않는다. 이곳에서도 그런데 영어가 국어도 아닌 한국에서는 그놈의 발음에 그야말로 목숨을 건다. 아예 혀 밑을 자르는 수술까지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내가 엉뚱한 소리를 들은 것으로 믿고 싶다. 어찌되었건 이런 것을 보면서 내가 나의 조국인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참 갑갑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전 국민이 그 꼬부랑 발음으로 영어를 할 수 있는 날을 위해 새로운 정부가 목숨을 걸고 총 매진한다는 소리를 접하면 더 이상 논쟁의 의미조차 사라지고 만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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