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이 불탔다. 연일 언론은 온통 그 기사로 도배를 하고 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너무나 원통하고 절통한 일이다. 우리나라 화폐에도 실려 외국인들에게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징 아이콘이었던 숭례문인 터라 그 안타까움은 더할 수밖에 없다. 관악산의 화기로부터 도성을 지키기 위해 현판도 불타오르는 형상으로 세로로 세워 달았던 숭례문이 결국 그 불길 속에 소신공양을 하듯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 가버렸다. 수많은 시민들이 매일 같이 국화 꽃다발을 들고 와 바치고 간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하나 둘이 아니다. 시골에서 제문을 지어들고 올라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거기에 대고 넙죽 엎드려 절을 하기도 한다. 남대문의 한을 달래기 위해 하얀 소복을 입고 살풀이춤을 추는 여인도 있었다. 우리 국민들의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리도 간절했던가에 나는 새삼 놀라고 있는 중이다. 내 눈에는 망인과는 별다른 친분도 없던 사람들이 죽고 나자 그의 유명세 때문에 몰려와 통곡하는 것으로 친분을 과시하려는 듯 어째 좀 이상한 풍경이다.내가 어렸을 적에 서울에 가본 적이 없는 촌놈이 서울 자랑하다 들통 나는 대목이라는 게 늘 서울역에 내리면 커다란 대문이 보이는데 그 대문 이마에 <남대문>이라고 쓰인 현판이 멋있게 붙어있다고 큰 소리 치다가 였다. 꽃을 바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불 타 없어진 이 문의 이름이 남대문인 줄 알고 있는 사람이었을 거라면 나만의 지나친 억설일까? 당국은 재활용할 수 있는 부재와 그렇지 못한 부재들을 분류해 재활용이 불가능한 부재들은 덤프트럭에 실어 일반 쓰레기장에 내다 버리고 있다. 그런데 그게 또 문제가 되고 있나 보다. 깨진 기왓장 한 장도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인데 그걸 일반 쓰레기로 쓰레기장에 내다 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문화단체의 장이라는 어떤 이는 ‘아무도 아버지 뼛가루를 일반 쓰레기장에 내다 버리지 않는다. 숭례문이 불 탄 잔재를 아버지 시신을 화장해 납골당에 모시듯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터뷰도 들은 적도 있다. 그런데 이거 몰 매 맞을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사람들이 심하게 오버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초상집에 와서 축가 부르는 미친 놈이라고 벌떼처럼 달려 들까봐 겁나긴 하지마는 삐딱선을 탄 김에 한번 내질러 보자. 낙산사 동종이 불 타 녹아 없어졌을 때, 수원 화성의 수어장대가 한 정신병자의 방화로 잿더미가 되었을 때 그 때는 왜 그러지 않았는가? 숭례문이 국보 50호쯤 되었어도 지금처럼 저럴까? 낙산사 동종도 숭례문과 비슷한 1469년 조선 예종 1년에 주조된 걸작품이었다. 수원화성은 창덕궁이나 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그 때는 별 관심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숭례문이 불타고 보여주는 유별난 반응에 나는 오히려 당혹스럽다. 교통 소통을 위한 도로를 내기 위해 독립문이 자리를 옮겨 앉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애통해 했던가? 독립문은 서 있는 그 자리가 생명인 문화유적이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옮겨 앉고 나면 더 이상 독립문일 수 없는 문이다. 독립문은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름조차 은혜를 맞아들이는 문, 迎恩門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 사신들을 맞던 환영문이다. 교통 소통 때문에 그런 독립문이 구석으로 쫓겨 날 때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것은 아마도 국보 1호라는 숫자의 마력 때문인 것만 같다. 숭례문은 우리나라 국보 제1호다. 국보 1호이기 때문에 숭례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국보의 번호는 일련번호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없다. 일제가 우리나라 문화재를 조사해 지정하면서 서울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문화재의 번호를 매겼다는 점에서 국보에서 번호가 갖는 의미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 가장 잘 보이기 때문에 보물 1호가 되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다. 아버지의 뼛가루는 남에게는 혐오물이지만 나에게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다. 가치란 그렇게 상대적인 것이다. 국보로 지정될 정도의 문화재라면 어느 것이 더 낫고 더 못하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거의 없는 것이다. 숭례문이 훈민정음 보다, 석굴암 보다, 팔만대장경 보다 더 귀중한 문화재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국보 번호는 일제가 제정한 '조선 고물 고적 명승 천연 기념물 보존령'에 따라 1934년 총 581건의 문화재를 지정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일제는 식민지 조선이 국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보를 지정하지 않았고, 보물 1호를 남대문(숭례문)으로 정했다. 일제는 또 1905년 교통문제 등의 이유를 들어 남대문을 헐 예정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을 통해 들어가 한양을 함락시켰다는 이유로 보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대문이 당시 보물 1호로 지정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흥인지문(동대문, 현재 보물 1호)도 역시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문으로 알려져 일제가 보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서대문 서대문인 돈의문은 1915년 일제 때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철거되고 말았다.이 사라질 때 동대문과 남대문이 살아남은 것은 일본으로서는 자랑스러운 개선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제 때 지정된 문화재가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때 국보와 보물로 이름만 바뀐 것이다. 그때 일제 식민지 조선의 보물 1호였던 숭례문이 독립국 대한민국의 국보 1호가 된 것이다. 숭례문 주변의 성벽이 헐어낸 사정도 알고 보면 더욱 기가 막히다. 1908년 10월 16일 일본의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嘉仁親王)이 서울에 오는데 하늘같은 황태자가 비루(鄙陋)한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지금의 숭례문 좌우의 성벽을 헐어내고 지나갔던 것이다. 세계적으로 국보 ○호, 보물 ○호 등의 명칭을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과 북한 등 2 곳뿐이다. 일본은 물론 유럽도 유물관리 차원에서 관리번호만 부여할 뿐 일반에 공개하는 일련번호는 없다. 사실 국보와 보물은 특별한 기준에 의해 엄격하게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단 남아있는 옛 건축물이나 미술, 공예품들 중 역사적이거나 미술적 가치를 지닌 중요한 문화재를 보물로 지정, 나라에서 관리와 보호를 하게 되는데 그것들 중 특별히 뛰어난 것으로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것들이 국보로 지정된다. ‘특별히 뛰어난 것’이라는 어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것은 명확한 수치나 명문화된 법령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 문화재는 객관적인 가치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문화재청도 국보나 보물에 번호를 없애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불 타버린 숭례문이 복원된 뒤에도 과연 국보 1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도 관심사였다. 당국은 숭례문을 국보로 지정할 때 목조 누각의 문화재적 가치만 봐서 지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보 1호로서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물 479호였던 낙산사 동종은 복원된 다음 보물에서 해제되었다. 이제 숭례문은 완벽하게 복원된다 해도 조선 태종 때 세워져 600년의 세월을 그 자리에서 우리 민족의 영욕을 지켜봤던 그 숭례문이 아니다. 어떤 명분으로 국보 1호의 지위를 유지한다고 치더라도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게 떨어진 것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언론들이나 정부 당국은 곧 99% 완벽하게 복원될 수 있다는 사실만 강조한다. 3년이든 5년이든 시간이 지나고 200여 억원의 국민의 혈세가 들어가면 그 자리에 번듯하게 숭례문은 다시 들어설 것이다. 어쩌면 일본 황태자가 지나가면서 허물어낸 성벽마저 이번 기회에 제 모습을 되찾고, 전차 길을 낼 때 묻혔다는 성벽 1.5미터도 파내서 본래 보다 더욱 높고 웅장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이더스의 손이 다시 살아온 들 무슨 재주로 600년의 세월을 복원해낼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하룻밤 사이 그 다섯 시간 만에 잃어버린 것은 200억 짜리 멋진 성루 하나가 아니다. 600년의 세월을 지켜온 귀중한 문화재, 숭례문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 다시 들어서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숭례문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문화유적, 남대문이 다시 들어설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비난의 논조를 봇물처럼 쏟아내는 언론들은 왜 평상시에 문화재 보호의 중요성에 대해 그렇게 둔감했던가? 어느 언론사가 문화재 방재 상태를 점검하는 기획 보도나 시리즈를 연재한 적이 있었던가? 언론은 사회의 목탁이요 시대의 감시자이다. 목탁이나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는지를 언론도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다. 남 탓으로 밖으로 향하는 비난의 손가락을 우리 모두 내 탓으로 안으로 돌려 반성해야 할 때다. 그리고 과공은 비례이듯 불 탄 숭례문을 지나치게 인격화하고 신성시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거기에 바쳐져야할 국화라면 남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한 의인들의 무덤 앞에 먼저 바쳐지는 것이 옳다. 혹자들은 9.11 테러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뉴욕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말할 것이다. 지금도 많은 뉴욕 시민들이 꽃다발을 바치고 있다. 시민들이 그 테러의 현장을 잘 볼 수 있도록 전망대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숭례문과 다른 것은 수 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이다. 무너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거대한 미국인들의 무덤인 것이다. 그것을 우리의 숭례문 화재 현장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학봉 김 성일 선생의 묘소 때문에 일제의 중앙선 철로가 멀찌감치 돌아갔다는 사실은 안동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일화다. 학봉 선생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라 안동 사람들이나 학봉 집안에서는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자랑스러움을 떠올릴 때 마다 짝패처럼 떠오르는 부끄러움이 하나 있다. 학봉 선생의 묘소 앞을 가로 지를 수가 없어 멀리 돌아갔던 중앙선 철길이 국보 16호인 안동 법흥사 칠층 전탑은 바로 앞으로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육중한 열차가 매 시간 지축을 울리며 나라 보물 16호 옆으로 지나간다. 열차 안에서 팔을 뻗으면 손끝에 잡힐 듯이 가깝다. 그렇게 싸가지(?) 없는 모양새로 철로를 낸 것은 우리가 아닌 일제였다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변명이 되지 않는다. 일본이 물러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도 무려 60년이나 지났기 때문이다. 숭례문이 자기 몸을 불사르는 소신공양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려 했던 의미는 무엇일까? 지금은 옷깃을 여미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일 때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 숭례문의 소리 보다 국보 1호라는 숫자의 신화에 주눅 들어있는 것은 아닌가? 국보는 1호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10호도 20호도 보물도 사적도 천연기념물도 똑같이 귀하고 소중하다. 그리고 불 탄 숭례문은 인격체도 추모의 대상도 아니다. 숭례문의 폐허 앞에 절하는 마음으로, 국화꽃을 바치는 그 마음으로 살아있는 우리 문화재를 바라보자. 그 절절한 마음으로 우리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하자. #숭례문 화재 #국보의 번호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