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도둑의 당, 미쳐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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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dwdhkim)등록 2008.02.29 15:48

얼마 전 마감된 통합민주당의 지역별 공천신청자 상황은 대선 참패에 필적할만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건이 터져서가 아니다. 그것은 공부 전혀 안하고 치른 시험 성적표를 받는 날처럼, 지난 대통령 선거처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처참한 성적표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공천 경쟁률이 낮고, 지역별 격차도 극심하며, 새로운 피 노릇을 해야 할 정치 신인들의 양적, 질적 수준이 미흡하기 짝이 없다. 그 동안 폄하의 대상이 되었던 ‘당리당략’이 오히려 그리울 정도로 정치 자영업자들의 ‘사리사욕’이 압도하고 있다.

공천이 곧 당선을 예고하는 지역; 광주는 7개 선거구에 58명이 나서 경쟁률이 8.29 : 1, 전북은 6.82 : 1, 전남은 5.31 : 1이다. 이 지역에는 지난 10년 동안 힘깨나 써고, 이름깨나 날리고, 돈깨나 모은 사람들이 대거 몰린 것처럼 보인다. 공천이 대체로 낙선을 예고하는 지역; 대구는 12개 선거구에 1명, 부산은 18개 선거구에 3명, 경남은 17개 선거구에 3명이 공천을 신청하였고, 울산은 6개 선거구에 단 한 명의 공천신청자가 없다. 서울은 48개 선거구 중 4곳(서대문을, 서초을, 강남을, 송파을)에서 공천 신청자가 없고, 경기도는 49개 중 5곳(성남 분당갑•을, 의왕•과천시, 화성시, 김포시)에서 공천 신청자가 없다. 이들 선거구는 대체로 영남과 비슷한 투표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공천 신청자들이 명백히 당선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지역에 공천신청자가 거의 없고, ‘국회의원을 날로 먹으려는’ 비례대표 줄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는 것은 어찌 보면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합민주당이 한나라당을 견제할 제1야당이자, 아직까지 원내 제1당이자, 끊임없이 전국정당을 표방해온 당이며, 민주, 개혁, 진보, 참신성, 희생정신을 팔아온 사람들이 드글드글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결과는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당선 확률이 낮은 지역의 ‘민주개혁진보’ 전사(戰士)의 전멸 현상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총 지지율 격차 22.4%, 총 유효득표수 격차 532만 표, 영남 지역 유효득표수 격차 405만 표로 대패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현상의 뿌리를 파 들어가 보면, 먼저 (적어도 열린우리당, 대통합신당, 통합민주당에서는) 자신의 당선 외에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기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당선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이 공천신청자들에게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그 다음으로 당은 긴 호흡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사회적 생명체가 아니라, 자기 가게의 번창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자영업자 연합회 같은 모래알 조직이라는 사실이 나타난다.

이는 적지에서 싸우다가 스러져간 전사(戰士)들을 당과 (노무현을 제외한 나머지) 계파 수장들이 거의 배려하지도, 예우하지도 않은 지난 몇 년간의 무정한 정치 행태의 산물이다. 동시에 뱃지를 단 사람에게는 온갖 영광이 집중되도록 하고, 아무리 적지에서 선전했다 하더라도 뱃지를 달지 못한 사람에게는 빈 깡통이 돌아가도록 만든 불합리한 보상체계의 산물이다.

 

당선 확률이 낮은 지역의 ‘민주개혁진보’ 전사(戰士)의 전멸 현상의 뿌리를 좀 더 파고 들어가보면 통합민주당으로부터 이른바 영남 민주개혁 세력의 사실상 조직적(?) 철수 징후가 나타난다. 정치적 약자임이 명백한 영남 민주개혁 세력의 개별적 이탈과 눈보라 몰아치는 영남 들판에서의 게릴라전은 따뜻한 온실에서 호의호식해 온 정치적 강자들의 무뇌아 짓거리(반노를 통한 얄팍한 차별화, 친노 희생양 만들기 시도, 의원 기득권 중심주의 등)로 인한 비주류의 설움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정치 신인들의 양적 감소와 질적 저하 현상의 뿌리에는 정치 신인들의 도전 기회를 비교적 많이 보장하던 열린우리당을 해체하고, ‘의원들에 의한, 의원 기득권을 위한, 의원들의 정당(대통합민주신당과 통합민주당)을 만든 성공한 보수 혁명(?)’이 버티고 있다. 게임규칙을 알 수 없고, 적어도 기득권 편향적일 가능성이 농후한 곳에 정치 신인=도전자들이 몰려오지 않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어떤 학자는 통합민주당의 정체성을 논하는 토론회에서 ‘통합민주당에 과학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대선 결과와 공천신청 결과는 과학 이전에 의리와 희생정신이 있는지? 정의가 있는지? 집권의지가 있는지? 영혼이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성(聖)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정의(正義)를 배제한다면 왕국과 강도집단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물었다. 그렇다. 통합민주당에 긴 호흡의 집권전략과 ‘당리당략’이 없다면 민주개혁진보를 참칭하는 ‘정치자영업자 연합회’ 내지 ‘좀도둑’ 집단과 공당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물을 수 밖에 없다.

 

열린우리당, 대통합신당, 통합민주당의 주요한 문제의 근원은 김대중 이상의 지분과 주인의식과 넓은 안목을 가진 당의 대주주를 아직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김대중은 전국적 지지율 상승을 위해 영남대 교수 이수인을 호남(전남 영광.함평-13대 총선)에 공천하여 당선시켰고, 경북 촌 구석의 인물 김중권을 명실상부한 정권 2인자(대통령비서실장)로 중용하였다. 그런데 제왕적 총재에 도전하던 중진들은 여태껏 김대중의 공백을 메우지도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요구대로 당정분리-제왕적 총재 헉파에 응해준 노무현을 욕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에 대주주 내지 ‘집을 통째로 훔치려는 큰 도둑’이 사라지자 천원 짜리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만원 짜리 유리창을 과감하게 깨는 좀도둑들이 설치고 있다. 2~3년간의 자기 농사를 위해 풍성한 생태계를 파괴해 버리는 화전민적 기풍이 만연하고 있다. 그래서 당 전체 차원에서는 절실히 필요하지만, 자신이 성과를 향유할 수 없는 공공재; 예컨대 영남 지지율 제고(영남 출마자, 전사자 배려), 386 이후 세대 정치인의 육성, 새로운 사상이념 정립, 공정하고 공평한 게임규칙 수립 등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큰 도둑(왕, 독재자, 제왕적 보스 등) 대신 어중이 떠중이 과반수가 다스리는 체제이며, 민주혁명은 큰 도둑이 일궈 놓은 것을 과반수 이름을 빼앗는 작업이다’(최윤재)

 

그런데 과거 당정분리처럼 민주혁명의 전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1인 보스 정당(군주정)보다 못한 정당이 된다. 자신을 위해 공공재를 만들기도 하는 큰 도둑 보다 못한 좀도둑떼가 설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정당의 대주주는 결코 김대중, 김영삼, 박근혜를 닮은 어떤 한 정치인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김대중을 능가하는 당의 대주주가 어떻게, 어떤 경로로 만들어질지 모르지만, 적어도 통합민주당의 자체 혁신만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또한 당 외부에 있는 수만, 수십만 명의 전문가와 건강한 시민의 주인 된 참여 없이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명백하다. 이는 민주, 개혁, 진보, 평화와 선진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 아니 대를 이어서라도 반드시 성취해야 할 과제이다.

 

과도기적으로는 통합민주당의 권위와 권력의 공백(균형) 상태에서 등장한 공천심사위원회의 ‘대주주 노릇’에 기대를 걸어 볼 수 밖에 없다.

 

공심위는 대통령 선거 승리를 목표로 뛰던  1996년의 김대중이라면 공천을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민주개혁진보 정치인 중에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는 노무현이라면 공천을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봐야 한다. 나아가 한나라당에 실망하는 국민들이 어떻게 공천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는 아마도 호남 30% 물갈이 수준은 아닐 것이다. 기 신청자 중에서 물갈이 양을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신청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여 공천의 질을 높일 것이다. 금을 밟지 않은 사람-주로 치열하게 살지 않았던 사람들-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이상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을 것이다.

 

민주개혁진보를 위해 당 안에서 혹은 당 밖에서, 영남에서 혹은 호남에서 헌신적으로, 현명하게 일했던 사람들을 배려할 것이다. 허명으로 날로 먹으려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적지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사람들, 풍찬노숙한 사람들을 배려 할 것이다. 정의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감동을 주는 공천을 할 것이다. 공심위가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저비용으로 왕창 가져보자는 뜨거운 욕망’만이 들끓는 시대에 통합민주당과 공심위에 이런 바램을 던지는 것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서생의 잠꼬대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초심이 조금은 남아 있는 서생은 이런 바램을 허공에 던질 수 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폴리뉴스, 휴먼포스에도 게재

2008.02.29 15:44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폴리뉴스, 휴먼포스에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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