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 아래 묻힌 보물 기억나니?"

스물 두 살 나와 함께 성장한 느티나무 그리고 그 밑에 묻힘 포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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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선(llalghll)등록 2012.01.06 14:31
사월의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다. 느티나무 아래에 누워 바람 내음을 맡고 있자니 코끝이 간지럽다. 바람과 함께 일렁이는 나무의 그림자는 꼭 햇살과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보인다. 계절의 변화에 눈 돌릴 새도 없이 숨 가쁘게만 지내던 나에게 찾아온 지금의 여유는 갑작스런 선물인듯 마냥 즐겁기만 하다.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며 콧노래를 흥얼거려본다. 문득 가지를 드리운 채 정정히 서 있는 나의 느티나무가 눈에 띄었다. 갑자기 웃음이 난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느티나무가 나보다 껑충 크기 시작한 것은….

이 느티나무는 스물 두 해 전, 내가 출생신고를 하던 날 나와 함께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어린 묘목은 부모님의 정성어린 손길 아래 볕이 잘 드는 정원의 한 쪽에 심겨졌고, 나무와 우리 가족의 인연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무남독녀로 태어난 나에게 정원의 느티나무는 집안의 유일한 놀이친구이자 상담친구였으며, 함께 자란 동무였다.

내가 첫 돌과 함께 수두와 홍역을 겪던 무렵, 어린 느티나무 역시 모진 폭우를 견디지 못해 기어이 가지 하나가 꺾인 채 병이 들었었다고 한다. 고열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앓던 나는 결국 보조개 언저리에 수두 자국 하나를 남긴 채 쌩쌩하게 일어났고, 말라가던 어린 나무 역시 부러진 가지의 흔적을 메우며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우리 둘은 함께 아팠고 함께 이겨내며 그렇게 성장해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의 처음은 느티나무 아래서 엄마와 함께 있을 때이다. 어릴 적의 나는 나무에 기댄 엄마 품에 안겨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참 좋아했다. 이때의 아련한 추억은 마치 동화처럼 환상처럼 마음에 남아 아직도 내게서 미소를 자아낸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무가 훌쩍 커버리자 아빠께서 나무에 작은 그네를 매달아 주신 적이 있었다. 나는 부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네를 타며 매우 즐거워했었다. 하지만 키만 컸지 아직은 어렸던 나무가 내 무게를 견디기가 버거웠던지 이내 가지가 휘청이기 시작했고, 나는 아빠에게 달려가 그네를 내려달라며 펑펑 울었던 기억도 있다.

또 이런 적도 있었다. 외출하신 부모님을 기다리며 나무 아래서 곤히 잠이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부모님은 내가 사라져 온 동네를 헤맸다고 한다. 또 엄마에게 야단맞을 때마다 나무를 부둥켜안고 속상한 이야기를 하며 서러운 눈물을 쏟았던 적은 부지기수이다. 이렇듯 나의 느티나무는 어느 새부터인가 내게 몸의 일부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고 나무와 나는 수많은 추억을 만들며 함께 성장했다.

이런 나의 느티나무에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이것은 내가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나조차도 몰랐던 비밀이다. 바로 느티나무가 보물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나무 밑에는 아주 소중한 보물이 묻혀 있단다. 그 보물은 바로 네 거야. 하지만 지금은 열어보면 안돼. 우리 혜선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때 그 보물을 꺼내볼 수 있단다." 꿈에 젖은 듯 일렁이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이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련하다.

하지만 그 때의 호기심은 얼마 안 가 곧 잊혀졌고, 그것은 내가 첫 생리를 하던 중학생이 되어서야 엄마의 입을 통해 비밀이 밝혀졌다. "혜선이가 어른이 된 기념으로 엄마가 비밀 하나 말해줄게. 어릴 적에 엄마가 말했던 느티나무 아래 묻힌 보물 이야기 기억나니? 나무 아래에는 포도주가 묻혀있어. 우리 딸이 언젠가 결혼을 해서 엄마 아빠 품을 떠날 때 신랑 신부에게 합환주로 주려고 엄마가 직접 담갔단다. 아기를 가진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담갔으니 너하고 느티나무, 그리고 이 포도주는 나이가 같은 거야." 잔잔히 말을 이으시던 그 때의 엄마는 표정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처녀 시절부터 시를 쓰셨던 엄마는 아빠와 결혼을 약속하면서 줄곧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내 아이가 태어날 때 나무 한 그루를 심어 함께 자라게 해야지. 나무와 서로 키를 견주며 자라고, 그런 나무 아래서 꿈을 꾸며 소망을 갖게 해야지. 그리고 포도주를 담가서 묻어두는 거야. 이십 여 년 후 내 아이가 결혼식을 하는 그 날 처음으로 개봉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포도주가 될 거야. 엄마의 소녀 같은 꿈은 낭만적인 아빠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하나하나 이루어져 갔던 것이다.

이렇게 나는 부모님의 꿈과 함께 태어났고 그 꿈 속에서 또 다른 꿈을 키우며 자라났다. 어느덧 스무 살을 훌쩍 넘겨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 부모님의 젊은 시절 꿈은 그저 웃으며 넘길 꿈같은 동화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화 속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느티나무와 함께 펼쳐진 한 가정의 행복한 이야기는 내가 결혼을 하며 포도주로 축배를 들면서도,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도, 아니, 어쩌면 부모님의 꿈을 이어 내가 또 다른 꿈을 꾸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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