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의 사회학

검토 완료

권범철(zessann)등록 2008.04.24 21:35

언젠가 청계천이 시작되는 동아일보사 앞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을 한 날이었다. 뜻하지 않은 일 때문에 약속장소에 조금 늦게 도착한 나는 마침 휴대폰이 없었다. 시계도 따로 들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늦었는지, 만나기로 한 친구들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간을 물어 10분 정도 늦은 것을 확인한 뒤 공중전화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공중전화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줄어 있었다.

 

  휴대폰의 대중화는 전화선에 얽매여 있던 집전화기의 유동성 증대라는 점에서 비롯되는 편리함, 또는 귀찮음을 넘어서는 또 따른 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휴대폰이 가져온 장소(혹은 지역)성의 상실이다.

 

  어릴 적 ‘집’전화기로 시외에 있는 할머니댁이나 다른 친척집에 전화를 할 때, 비록 피를 나눴다고는 하나 그다지 막역한 사이는 아닌지라 대화의 공백이 조금씩 길어질 때면 누군가 시외전화는 비싸니까 그만 끊자는 말로 통화를 마무리하던 그 때는 거리에 따른 요금이 달랐다. 멀리 있는 만큼 요금이 비싼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물론 지금도 집전화기, 아니면 어딘가에 붙어 있는 전화기, 공중전화는 시외요금이란 것이 있지만,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전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휴대폰을 통한 통화는 거리에 따른 요금의 차별이 없다. 아무리 먼 도시에 있더라도 요금은 똑같다. 해외만 아니라면.

 

  휴대폰의 요금차별화는 거리(지역 간 거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기업의 서비스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이루어진다. 주지하다시피 이동통신사 별로 수 만가지 요금제가 있다. 그리고 집전화기를 통한 전화는 전화번호 앞 자리에 ‘지역’번호가 붙지만, 휴대폰 번호 앞 자리에는 이동통신서비스제공기업의 식별번호가 붙는다. 011, 016, 017, 018, 019. 이렇게. 또한 그 식별번호는 해당업체의 마케팅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Speed 011, 뭐 이딴 식으로. 집전화기를 이용하던 그 때 –지금도 이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용도라는 측면에서-는 고유번호 앞에 자신의 지역을 나타내는 번호가 부여되었지만, 지금은 이동통신업체를 선택함으로써 그 번호를 고르는 것, 단순히 고르는 것을 넘어서 그 번호가 가지는 이미지를 선택하여 소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결국 지역번호를 대신하여 들어선 이동통신서비스 업체의 번호는 단순한 식별의 의미를 넘어서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차별화된 서비스 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집전화기에서 휴대폰으로의 이동은 탈장소성(지역에 대한)을 낳음과 동시에 귀속성(기업에 대한)을 낳는다. 전화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 속에 침투한 그 깊이를 가늠해 볼 때 이 귀속성은 단순한 번호 소지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공중전화. 누구나 휴대폰이 있기에 공중전화의 쓰임새는 줄어들었고 자연스레 그 숫자 또한 줄어들었다. 하지만 공중전화의 사라짐은 단순히 거리에 붙어 있는 전화기 한 대가 없어지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공중전화는 그 이름에서부터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전화기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가 될 수도 있다. 네모난 박스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만의 시간,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 하지만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이루어지는 시공간의 압축은 극한에 이르러 개인의 정체성이 구현되는 장소의 해체를 가져왔고, 그 미분되어 사라지는 장소들의 흐름 속에 네모난 박스의 공중전화 또한 압축을 견디다 못해 찌그러져 버렸다. 지금-여기에서 이용 가능한 것들은 구태여 그 곳과 그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기억의 장소들은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다. 그 장소에 붙어있던 기억의 메모들 역시.

 

  학교를 마치고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음반가게 앞에 있던 우리 동네의 그 공중전화는 아직 거기에 있을까. 아마도 지금은 없어졌을 것이다. 그 곳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 버튼을 누르던 짧은 머리의 나와 함께.

 

2008.04.24 21:37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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