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장님이 네비게이션을 볼 수 있을까? <1>

- 앞을 본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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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철(skc2004)등록 2008.05.19 09:53

   앞을 내다 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한때 아니 지금도 대학생들 사이에는 이른바 무전여행이 유행이다. 이를 삶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정작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연습이나 공부라는 측면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학습인 것이다. 사실 네비게이션이 나오기 전까지 운전자에게 초행길은 만만치 않은 여정임에 틀림 없었다. 인간의 삶도 목적지를 정해 놓고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이러한 초행길 여정의 행로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다만 여정은 돌아 올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목적지 조차도 수정 할 수 있지만, 단 한 번뿐인 인생은 목적지의 수정이 불가능 할 뿐만 아니라 거슬러 갈  수도  없는 일방통행이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현실세계에서 우리들은 자신의  존재가치가 매우 초라해 보여, 현실에 대한 불안심리로 인해 미래에 대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고자 한다. 미래에 일어나 일에 대한 예측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적중"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얼마전 대통령께서 기상청의 업무보고 석상에서 "오늘 예보가 틀렸군..." 하시는 상황처럼  수많은 변수들이 산재한다. 하필 기상청 업무 보고 하는 날 일기예보가 틀리다니 관계자들은 얼마나 황당 했겠는가? 

  그렇다면 기상예보가 틀린것이 꼭 슈퍼컴퓨터의 잘못일까? 아니면  예보관의 잘못된 분석 때문일까?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발표할 그 당시의 상황은 그 예보가 맞았겠지만  예상치 못한 기류의 변화가 '오보'라는 황당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요즘 다양한 언론매체를 접하다 보면 어김없이 한쪽 공간을 차지하는 이른바 "오늘의 운세"라는 칼럼을 발견하게 된다. 누구나 한번쯤은 아니 어쩌면 상당한 관심을 갖고 그 칼럼을 읽게 된다.  종교를 갖고 가지고있던 그렇지 않던 간에,  혹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읽고 내심 맞으면 좋고 틀리면 역시 '미신'으로 치부할지라도 "오늘의 운세"에서 귀인을 만난다거나 행운 을 거머쥐게 된다면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어쩌다가는 행운의 숫자가 머릿속을 뱅뱅 맴돌아 복권방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러한 "오늘의 운세"는  사주명리학에 근거하여 풀이되고 있지만 이같은 사주명리학이 학문으로 인정받으면서도 아직도 미신년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했던 것은 나름대로의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뜬 장님이 네비게이션을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미래에 대한 예측 특히 타인에 대한 미래예측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임을  지적한 것이다.  미래예측을 굳이 네비게이션에 비유하여 말하는 것이 지나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네비게이션의 가장 큰 기능은 정확한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한 길을 찾는  기능이다.  

   그 길을 가다가 몇 십년만간 보지 못했던 이와 만나 해후의 막걸리잔을 기울일것 이라는 것 까지는 알 수도 없거니와 물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목적지에 대한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싶어한다. 이러한 심리를 상술로 엮어내면 호기심이 발동한 이의 주머니는 가벼워 질 수 밖에 없다.

   거슬러 갈수도 없는 일방통행로에서 가파른 고갯길을 평지처럼 넘을 방법을 묻거나, 한참을 돌아가야 할 꾸불꾸불한 길을 직선으로 가로질러 갈 방법이 축지법을 쓰지않고 가당키나 하겠는가?   아무리 돈이면 다되는 세상이라지만 어떻게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겠는가? 

   좀 덜 힘들지 않게  준비는 할 수 있어도  그 길을 평지처럼 넘어가거나, 직선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단언코 없다.  걱정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고, 가로질러 갈 수만 있다면 세상사 무슨 근심이 있을까만, 우리네 인생사가 그리 녹녹치만은 않은 것을 어쩌랴.

    더구나 다른 사람의 인생사를 정확히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거나, 보편타당한 규칙성을 가지지 못하고  이야기한다면  미래예측은 눈뜬 장님들의 네비게이션 보기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세상 모든 고난을 자기 혼자만이 짊어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짚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혹시나"를 기대한다. 그리고는 불안함을 달래기위한 어쩔 수없었던 선택이었노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러한 인생 여정의  네비게이션이라 할 수도 있는 동양의 오랜 지혜인 사주명리학(四柱明理學)은  시대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역저들이 이루어 졌지만, 딱히 어느 책이  논리적인 책이라 단정할 수 없을 만큼 일관적인 논리성은 결여되어 있다.

     살다보면 살아가는 이야기가 다들 같지 않고. 상황이 다들 다른데 이를 어찌 하나의 "잣대"에 적용하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학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할 관문인데도 불구하고 그저 "믿으라"는 "천기"라는 명분아래 가두어 버렸던 것이다.

     "운세"속의 "운"은 과연 말그대로 "운"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천명"속에 존재하는 상서러운 "기운"을 말하는 것일까?

      이제 좀 더 객관적으로 미신년으로 테두리를 치지 말고, 단정하지 말고 접근해 보자!   

 

2008.05.19 09:58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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