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서 감추어진 것들은 무엇일까. 얼핏 보기에는 형식적으로 카메라가 감추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형식적으로 특이한 점중 하나는 이 영화가 중간중간에 진행을 멈추고 리와인드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방금 전에 보았던 장면이 사실 비디오카메라로 녹화된 장면이라는 점을 관객에게 일깨워준다. 즉, 우리가 화면을 통해 보는 대상은 영화 카메라로 찍은 것임과 동시에 영화속에서 누군가가 몰래카메라로 찍은 것이었음을 드러낸다. 이때 이 몰래카메라로 찍은 사람과 찍힌 사람 사이에는 감시하는 사람과 감시당하는 사람의 관계가 성립되고, 이 몰래카메라/영화화면을 바라보는 우리는 감시하는 사람의 시선으로 영화 속의 인물을 보게 된다. 히치콕 스타일의 관음주의를 이런 식으로 응용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을 불안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이들이 누군가가 자기들을 몰래 감시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예 몰랐으면 불안하지도 않았을 것인데, 푸코의 판옵티콘의 악몽이 이런 건가. 그래서 영화는 조르쥬 로랑(다니엘 오테이유)/앤 로랑 (줄리엣 비노슈) 부부가 누가 자기들을 감시하고 계속 녹화된 테이프를 보내는 지를 알아내는 얘기로 진행된다. 이때 그 누군가를 잡아낸다면 그냥 흔한 스릴러 영화가 되겠지만 역시 히치콕의 '맥거핀'효과를 잘 이용해서 '누가 찍었나'라는 질문을 따라가다보면 또다른 감추어진 내용들이 드러나게 된다. 결국 조르쥬와 앤은 그 비디오에 찍힌 피사체들을 단서로 해서 찍은 사람이 누군가와 왜 찍었는가를 찾아내려고 한다. 조르쥬는 그 비디오들에서 옛날에 자기가 살았던 집, 지금은 병든 어머니가 살고 있는 시골집이 찍혀있음을 알아채고 시골집에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그 전에 찍었던 비디오가 조르쥬의 현재를 보여주는 데 비해 그 다음 비디오는 조르쥬의 과거와 기억을 일깨운다. 과거에 그가 저질렀던 어떤 일, 과거에 그가 알았던 어떤 이가 그런 일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조르쥬는 어린 시절에 알았던 마지드일 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조르쥬와 마지드의 관계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와 이우진의 관계하고 비교할 만하다. 오대수와 이우진의 악연도 결국 학창시절에 오대수와 이우진이 저지른 일때문에 생겼고 오대수는 대수롭지않은 일이라서 잊어버렸지만 이우진은 끝끝내 그것을 잊지못해서 15년동안의 감금과 복수극이 펼쳐진다. '올드보이'는 얘기는 오대수가 하나하나 알아나가는 과정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이우진이 미리 짜놓은 틀안에서 움직이게끔 되어있었음이 드러난다. 그에 비해 조르쥬와 마지드는 누가 그런 음모를 획책했는 지 끝끝내 드러나지않는다. 조르쥬는 마지드가 그랬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마지드가 아무리 결백하다고 주장해도 귀기울여듣지않는다. 오대수와 이우진의 관계가 개인적인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세계화시대의 한국의 계급갈등을 암시하고 있다. 오대수가 갖혀있었던 15년은 1988년부터 2003년까지인데 이 시기에 한국은 88년 서울올림픽을 치루었고 민주화가 진척되었고 경제위기를 겪었고 한일월드컵을 했다. 즉, 오대수의 감금은 그런 급격한 사회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진 한국의 중산층의 처지를 반영한다. 이에 비해 이우진은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영화에서 고층 건물의 펜트하우스에서 사는 것과 그의 비서가 뉴욕의 증권시장의 시장변동상황을 알려주는 것에서 볼 수있듯이 그는 세계화의 시류를 잘 탄 국제적인 금융자본가이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는 오대수와 이우진의 개인적인 원한관계는 더 깊게보면 한국의 토착적인 중산층과 국제적인 신흥 지배계층의 갈등을 담고 있다. 조르쥬와 마지드의 관계는 프랑스내의 인종갈등과 차별구조를 담고있다. 마지드는 알제리 이민의 아들인데 그 아버지가 60년대 파리에서 벌어진 시위에 연루되어 죽었고 마지드 아버지가 머슴살이했던 집에서 마지드를 입양하게 된다. 마지드에게 질투심을 느꼈던 조르쥬가 마지드를 모함했고 그로 인해 마지드는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조르쥬의 모함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말했던 서양의 아랍권에 대한 오해와 무지, 그리고 아랍권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막연한 공포와 지식을 의미한다. 조르쥬의 직업은 텔레비전에서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의 진행자이다. 그의 역할은 지식을 대중에게 전파하고 소개하고 유통시키는 것이다. 즉, 조르쥬와 마지드의 관계는 적자와 서자, 적자와 입양된 자인 것이고, 그리고 조르쥬가 알고있는 마지드, 조르쥬의 부모가 알고있는 마지드는 조르쥬의 시각에서 구성된 마지드의 이미지인 것이다. 조르쥬는 마지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마지드와 마지드의 아들이 자기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유럽이 아랍권, 비서구를 대하는 태도가 딱 그런 것이다. 마지드의 자살은 결국 지금 아랍권에서 벌어지는 내전과 폭력적인 사태, 그리고 서유럽에 잠재된 폭력적인 요소들을 상징한다. 스페인이나 영국에서 벌어진 열차폭파테러, 프랑스에서 벌어진 아랍계 청년들의 인종폭동같은 것이다. 마지드의 자살이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는 항변이듯이 이런 테러행위나 소요사태도 아랍계와 인종적 소수자의 자기 존재 증명이고 사회적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인 것이다. 마지드가 자살한 이후에 마지드의 아들이 조르쥬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아버지는 분노를 나에게 심어주지않았고 나를 이렇게 잘 키웠다." 그렇지만 끝끝내 조르쥬는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지않는다. 조르쥬는 자기가 어린 시절에 저지른 일때문에 마지드와 마지드의 아들이 앙심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때문에 계속 불안해한다. 결국 그의 불안과 공포의 원인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인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않는다. 아니, 그것을 오히려 알기때문에 더더욱 마지드와 마지드의 아들을 인정할 수 없다. 자기 죄를 남에게 덮어씌우려 하고 자기 자신의 잘못을 직접 대면하려 하지않는다. 구원과 속죄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린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신기했던 것중 하나는 줄리엣 비노슈가 프랑스어로 말하면서 연기를 한다는 점이었다. 줄리엣 비노슈가 프랑스 배우라는 것은 알고있었지만 생각해보면 화면에서 본 그녀는 영어로 말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폭풍의 언덕', '잉글리쉬 페이션트', '데미지', '쇼콜라'등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그에 비해 그녀가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영화들은 기억나는 작품이 '세가지 색깔:블루' 정도인 것같다. 그래서 줄리엣 비노슈가 나왔던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의 '세가지 색깔: 블루'로부터 다시 얘기를 해보자. 이 영화가 90년대 초반과 중반에 나왔던 유럽통합의 찬가라면 '히든'은 유럽통합이 간과한 것을 다룬다. '블루'가 폴란드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유럽통합, 결국 잘사는 서유럽에 덜 잘사는 동유럽이 통합되고 그것을 곧 유럽의 번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면 '히든'은 유고내전이나 아랍계 이민자들 문제, 지중해권의 중동사태처럼 유럽과 비유럽의 경계가 어디인가라는 질문과 회의를 담고 있다. 지중해로 갈리긴 했지만 결국 유럽은 북아프리카와 아랍권과 계속 통교하면서 지내왔고 그러다보니 이슬람권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는데 그걸 그렇게 무짜르듯이 싹 잘라내고 우리만 유럽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해답을 찾으려하기는 커녕 애써 외면하고 자기가 지어낸 얘기를 그대로 지키려하기때문에 밝은 미래는 없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 보면 조르쥬가 발가벗고 침대에 누워자지만 그게 그렇게 편안해보이지않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필자의 시네21 개인블로그 '사과애'와 사이월드 미니홈피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노광우기자는 미국 일리노이주 서던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영화와 문화연구로 박사과정을 밟고있습니다. #히든 #올드보이 #줄리엣 비노슈 #유럽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