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의 제 1 불확정성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기초적인 산술을 충분히 강력하게 허용하는 어떤 일관성있는 수학 형식 시스템 내에서도, 그 시스템내에서 증명될 수도, 반증될 수도 없는 자연수에 대한 문장을 만들 수 있다(In any consistent formal system of mathematics sufficiently strong to allow one to do basic arithmetic, one can construct a statement about natural numbers that can be neither proven nor disproven within that system)".
쉽게 풀어쓰자면, 세련된 언어로 구성된 자기 충족적인 체계 속에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무엇'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 외적인 영역으로 이 원리를 확장해볼 때, '신'의 개념이 그 '무엇'에 해당한다. 수학적 명제나 철학의 논리에서 봐온 것 처럼, 그 '무엇'에 해당하는 개념들은, 일정한 공리로서 혹은 자기발생적(sui generis) 개념으로서 '요청'된다. 그리고 이렇게 요청된 무엇은 이미 증명의 영역을 떠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과연 신의 존재를 자명하게 증명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으며, 확실한 명제로써 그의 부재를 증명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류의 비판과 이의를 뒤로 한 채, 신이라는 개념들을 증명 혹은 반증하려고 드는 것은 무의미하다. 누군가가 세계의 기원으로서의 신을 설명하려고 한다며, 언제나 인간의 언어로서 설명 가능한 흔들리지 않을 토대에 의존해야만 하는데, 이 경우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신은 '스스로 있는 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스스로 있는 자의 부재를 확실하게 증명해 보일 방법은 별로 많지 않거나, 아니면 아예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신을 부정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성의 체계 혹은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신적인 존재를 요청하고, 결국 (역설적으로!) 구조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던가.
데스노트의 1, 2편을 보면서 흥미로운 이야기거리에 내심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스토리는 이성과 추론을 앞세우다 보니 지속적으로 세계 외부의 것을 요청하게 됐다. 세계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법학도 야가미 라이토는 육법의 무의미함을 느껴 좌절하던 도중, 우연히 자기 발 앞에 떨어져있는 데스노트를 발견한다. 데스노트는 세계 외부의 것이지만(데스노트는 비오는 거리에 떨어지지만, 비도 맞지 않는다), 이제는 손 안의 존재로, 일종의 도구로, 세계 내적 존재자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여전히 초월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고, 세계 외부의 것으로서 사용된다. 세계라는 체계 속에서는 무언가 해소할 수 없는 문제가 산적해 있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세계 외부의 힘을 빌려와야 하는 사태가 초래되는 것이다. 또 다른 상위의 체계가 있어야만 기존 체계의 무능력이 만들어낸 틈새를 메울 수 있는 것.
결국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세계 내적 존재자들은 외부의 초월적 힘에 의지해야만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 그래서 인류사에서 인간은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이성을 찾았던 것이고, 이성이 불충분했는지 신을 세계 안으로 불러왔던 것이다.
제 2의 요청, 점점 더 재미없어지는 영화
L(류가미)이라는 명탐정은 데스노트의 작동원리를 눈치챈다. 데스노트에 이름을 적히면 죽는다는 것. 그 밖에 몇 가지 규칙이 존재하지만, 그런 것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데스노트가 언어와 존재의 필연적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은 인간에게 자의적으로 붙여진 언어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이름은 이미 개인의 생과 필연적으로 맞물리게 되고, 따라서 이름은 단지 이름이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의 본질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살생부에 이름이 적힌 인간은 이미 세계 내에서 살아갈 수 없다. 이름이 말소되면, 존재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언어를 선점한 자가 정치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전략적 조언을 남긴 레이코프의 책('코끼리는 생각하지마')을 읽지 않더라도, 우리는 언어가 가진 존재론적 미신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또한 언어가 있다면 그에 해당하는 존재도 있을 것이라 믿었던 고대 그리스인들도 언어와 존재의 필연적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데스노트> 역시 언어의 주술적 힘에 대한 재밌는 해석을 보여주었지만, 그를 바탕으로 한 스토리 전개에는 취약함을 드러내고 만다.
라이토의 언어적 주술에 맞선 L의 두뇌플레이가 전개될수록, 라이토는 논리적 열세를 띠게 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영악하면서도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관객의 시선을 붙잡아두려고 한다. 또 다른 데스노트와 사신을 등장시키는 것. 또 다른 요청이다. 게다가 두 번째로 등장하는 새로운 사신은 사랑과 연민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을 지닌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는 전지전능한 신이 질투심을 느끼고 특정 부족을 편애하게 되는 기독교의 시나리오와 닮아있다. 결국 불완전한 사신은, 스스로가 죽음의 신임에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제 2의 증명 불가능한, 그리고 반증 불가능한 존재를 요청함으로써, 영화는 점점 더 재미없어진다. 이야기를 1시간 가량 더 끌고 가기 위해서 감독은, 외적으로는 건실하지만 범죄자 살해를 통해 세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과대망상증 환자 라이토의 인격을 무참히 파괴해나간다. 라이토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세계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1편에서는) 여자친구를 죽였고, (2편에서는) 아버지를 죽이려 든다. 결국 실패한다. 이 실패는 경찰관인 아버지(세계 내 실정법 체계를, 나아가 세계 내 존재자들의 질서를 상징한다)가 세계 외적 존재자에 기대는 아들의 허무맹랑한 생각을 묵살시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올바름에 대한 윤리적 성찰이 없다
신적인 능력을 부여받은 자의 경우 올바름을 행하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러한 모티브는 플라톤이 '기게스의 반지'를 통해서(<국가>), 톨키엔은 '절대반지'를 통해서 보여준 바 있다(<반지의 제왕>).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투명인간을 소재로 한 여러 영화에서도 힘의 비가시성을 보여준 것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비가시적이거나 초월적인 힘을 보유한 인간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제대로 제기한 영화는 많지 않다. <데스노트> 역시, 그러한 문제를 등한시한 채, 인물들의 추리 싸움에 목을 매고 있다. 게다가 확실한 근거없이 정답을 알아맞추는 L의 신출귀몰한 능력이 소개돼 추리영화로서도 손색이 많다.
'만일 내가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그런 힘을 소유하게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힘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악을 처참히 제거해 버릴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과연 그것은 정의인가. 그리고 힘의 정의라는 것은 무엇일까. 현상적인 악을 단지 지워버리면 세계는 선해지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런 것이 아닐까.
<데스노트>는 '키라'라고 불리는 라이토의 행위가 과연 정의인가, 아니면 단지 미친 자의 소행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라이토가 위기를 모면해나가는 방식에 대해 더욱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어 영화는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제 2의 데스노트'라는 구라까지 만들어냈던 것이다. 결국 정의에 관한 화두를 영화 독자들에게 던지려다 만 꼴이 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뒷간에는 갔지만 밑을 닦지 않고 나온 기분이 든 건 내 고약한 심뽀 때문인가.
덧붙이는 글 | 사족 한 마디. 감독은 애당초 구라를 풀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럴싸한 구라를 보여준 <타짜>처럼, 매력적인 배우들을 캐스팅했어야 했다. 배우들과 그들의 연기가 하나같이 마음에 안들었다.
개인 블로그에 묵혀놓았던 글을 게재하는 이유는 현 정부의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속칭 2MB 정부라고 불리는 '전통적 카리스마'를 지닌 현 정부체제는 경제성장을 무조건적인 목적으로 상정한 채, 라이토가 여자친구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려 드는 것처럼, 소중한 가치들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하지만, 벌써부터 탄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탄핵은 어떤 네티즌의 지적처럼, 절차상 국회의원들이 하는 것.
나 역시 정부가 굉장히 마음에 안들지만, 국민의 선택을 조금더 믿어보기로 했다. 대선 당시 한나라당에 대해 광적인 지지를 보였던 국민들 전체가 노망이 들었다는 김근태 의원의 이야기에 동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시간을 연장해서 좀 더 지켜봐야겠다. 사실 더욱 겁이 나는 건 2MB가 하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사태를 국민들이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냄비근성. 어쩔 수 없는 것인가.
2008.05.07 11:29 |
ⓒ 2008 OhmyNews |
|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