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의 촛불이여! 영원하라! “벗이여, 그대가 바로 이 빛이다. 어서 오라, 우리 이 눈부신 길로 춤추며 노래하며 함께 가자”(<그들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의 나라로>, ‘시사 IN’ 2008년 6/14일, 제39호, 김상봉)인간은 정치적 동물이자 이성적 동물이다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이성적 동물이기도 하다. 이 두 정의는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말벌, 꿀벌, 개미와 인간은 다 같이 자연적으로 무리를 져 군집생활을 영위한다. 다른 곤충과 다른 점은 가정, 마을, 국가와 같은 <공동체>(koinonia; 코이노니아)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다른 군집 동물보다 더 정치적이다. 최선의 공동체가 다름 아닌 바로 폴리스, 국가이다((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권에서).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합리적>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자연적으로 구비하고 있다. 이 이성적 언어 능력이 “유익한 것 혹은 해로운 것, 따라서 정의로운 것과 불의한 것을” 분명하게 구별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자연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은, 곧 이성적 동물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로빈슨 크로소와 같은 고립된 삶의 방식에서는 <자족적 존재>일 수 없다. 인간은 개인으로서는 완전해 질 수 없다. 본성적으로 인간은 자족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무리를 이루어 살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남여가 결합해서 가정을 꾸리지만, 단순히 가정이라는 공동체만으로 자족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인간은 더 큰 공동체인 국가를 지향한다. 인간은 좋음을 목표로 살아간다. 그 궁극적 목적은 더 <잘 살기> 위해서이다. <잘 삶>은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을 말한다. 이 행복은 말그대로 웰빙(well-being)이다. 웰빙을 목적으로 하는 이 국가라는 공동체에서만 인간은 개인의 행복을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행복으로 구현해 낼 수 있다. 개인의 행복과 전체인 국가 공동체의 행복이 다른 것일 수 없다. 개인의 행복과 전체의 행복이 다르다면 인간은 정치적 공동체를 만들어 갈 이유가 없다. 개인의 행복은 전체 공동체의 행복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없애고, 서로 조화하고, 서로 화합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우리>를 지향해 나아가야 한다. 인간이 보다 자족적이 되고 또 우리가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행복을 구현하기 위해선 <국가>라는 최선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아고라의 기원과 정치적 의미; 의사 표현의 동등성을 향해국가라는 정치적 공동체의 중심에 바로 <아고라>가 있다. <오뒷세이아> 제2권 첫머리에 오뒷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한 아버지에게서 오랜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자 이타카의 귀족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소집한다. 그리스 원어인 ‘라온 아게이렌인(laon ageirein)’이란 말은 ‘군대를 아고라로 소집한다’는 의미이다. 라오스(laos)란 말은 본래 미케네 시절의 전사들의 회합을 가리키던 말이다. 전사들은 군사적 형태, 즉 원을 그리면서 소집된다. 오늘날 군대의 명령자가 자신의 부대원을 소집해 명령을 내리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그들은 이 원을 이세고리아(isēgoria)라고 불렀고, 여기서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equal freedom of speech)’가 주어졌다. 말하자면 이곳은 공개토론을 하기 위한 공공의 장소인 셈이다. 전사들이 원형을 이루자 텔레마코스는 원안으로 들어가 <중심(en mesoi)>에 선다. 그가 연설이 끝나고 나오자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그에게 답한다. 이 전사들의 모임을 구성하는 <평등한 자>들의 이 집회는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발언하는 중심을 둘러싼 원형적 공간을 이룬다. 이 고대의 군사적 집회의 성격이 도시국가로 이어져 <아고라 문화>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이 광장에서 모든 시민들은 자신과 관련된 온갖 문제들을 함께 토론하고 결정지을 수 있었다. 이 토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바로 소수의 지배자에 좌지우지되던 사적인 공간에 대립하는 하나의 공적인 공간, 자유롭게 말하고, 토론하고, 이론을 증명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되었다. 이 공간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소피스테스요, 소크라테스요, 자유로운 시민들이었다. 이 아고라 공간은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기 이전에 그리스인들의 정치적 공간이자, 교육의 공간이었다. 여기서 철학이 잉태했고, 직접 민주주의 싹이 텃고, 언론의 자유가 활발하게 꽃폈다. 광장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자유로운 논쟁 속에 참여하는 모든 시민은 아고라란 정치적 공간에서 '평등한 자'(isoi)와 '동등한 자'(homoioi)로 규정된다. 인간과 인간의 동일성과 대칭성 속에서 <생각하는 사회>가 태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고 권력자인 왕으로부터 말단에 이르는 계급적인 종속된 정치문화는 이 공간에서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폴리스에서 아고라라는 수평적 질서를 나타내는 정치적 지평 안에서 모든 시민은 동등한 자들로 규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직접 민주정의 실현이다. 원형을 이루는 중심을 지닌 광장이란 지리적 공간 속에서 시민들은 마침내 <정치적 공간의 틀>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정치적 체계를 지배하는 것은 균형성, 상호성, 동등성, 대칭성이다. 동등성의 확보는 원이라는 기하학적 도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원의 중심에서 그어진 원주 상에 모든 시민은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누구도 중심으로부터 더 가까운 사람도 더 먼 사람도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정치적 공간인 아고라에서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비를 그들은 우주의 모습에서 찾아내었다. 우주의 중심에 인간의 세계가 위치하고 있다고 그리스인들은 생각했다. 천체들이 중심을 향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인간이 사는 이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기 때문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진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바로 우주에서의 힘의 균형이 아고라라는 광장에서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생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중심이 옴팔로스(Omphalos)요, 헤스티아(화덕)였던 것이다. 아테네에는 그들의 신앙을 관장하는 장소로 종교적 중심인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이 중심 곁에 정치적 중심이 되는 공간인 아고라가 위치하고 있다. 지금 그리고 여기, 아고라의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지금 여기' 타오르고 있는 촛불의 정치는 시민 민주주의가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촛불의 불꽃을 일으킨 곳이 다음의 <아고라>다. 촛불을 청계천, 광화문의 광장문화로 이끈 곳이 아고라다. 그 광장의 중심에는 촛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촛불 정신은 이 시대의 헤시티아(hestia) 정신이다. 화덕 숭배사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각 가정마다 불씨를 간직해 두던 곳을 헤스티아(화덕)라고 불렀다. 그리스인들은 헤스티아를 신성한 장소로 여겨 하나의 종교적 관념으로 매우 중시하였다. 나중에 그들은 이 헤스티아 숭배를 공공숭배의 형식으로 국가 지위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이것을 그들은 ‘헤스티아 코이네’ 즉 공공의 화덕제도로 정착시켜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아고라에는 프뤼타네이온이란 건물이 있었는데, 이곳에 폴리스의 화덕을 보관해 놓았다. 이 공공의 화덕이 각 가정에 보관되어 있는 화덕과 연결되어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키는 힘을 발휘하였다. 마치 이는 서울 시청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촛불이 타오르고, 그 불꽃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커다란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 공공의 불꽃을 보관하던 화덕이 위치한 신성한 공간은 세속화된 공간으로, 대결과 토론, 논쟁을 위한 의도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 공간은 국가의 세속적인 관심사의 영역이다. 이와 대조되는 아크로폴리스는 신들에 관계되는 신성한 문제들의 영역으로 종교적으로 구상된 공간이다. 민주정치는 근본적으로 웅변술의 경쟁, 말로써 싸울 수밖에 없는 쟁론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쟁론적 정치가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신정한 제의를 받드는 아크로폴리스와 대비되는 공공의 공간, 바로 <아고라>인 공공의 장소였던 것이다. 모든 문제를 공개적으로 토론하던 <아고라>란 사회-정치적 공간은 중심(meson)을 둘러싸고 조직되었다. 정치적 권력과 정치적 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더 이상 사회적 계층의 정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집단의 중간에, 즉 에스 메손에, 인민의 손 안에, 광장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이제 중요한 정치적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중심> 개념이었다. 도시국가의 번영은 이 중간 계급에 위치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양 극단으로부터 동일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그들이 도시를 균형 잡게 하는 고정된 점을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간적인 배열을 대표하는 <아고라>가 공동의 <공적인 공간의 중심>을 형성했다. 이 공동의 공적인 공간인 아고라에 들어선 모든 사람들은 바로 그 사실로 인해서 동일한 자들로, 즉 이소이로서 규정되었던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참주 폴리크라테스가 죽음에 임박해서 자신의 권력(Skeptron)을 마이안드로스에게 넘기려 했다. 마이안드로스는 오히려 시민 전체를 불러 모아 참주제를 폐기하려는 자신의 결단을 이렇게 공표한다. "나는 결코 나의 동료들인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 폭군으로서 지배하는 폴리크라테스에 찬동하지 않았다. ..... 내 자신은 권력(아르케)을 에스 메손(중심에) 내려놓겠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 평등(이소노미아)을 선포한다."보라!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진 우리 위대한 시민들을! 오늘, 청계천 광장에서 광화문에서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 형성되었던 신성한 정치적 공간인 아고라를 우리는 다시 마주하고 그 중심에서 위대한 시민들이 우뚝 서 있다. 그리스인들이 심어놓은 화덕은 촛불로 하나 되어 거대한 성스런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다. 그 광장에 들어선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한 정치적 시민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발언하고,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수 있다. 차별이 없는 세상! 이 참여 민주주의 실현이야말로 고대 민주정의 이상이었고, 우리의 진정한 꿈이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꿈꾸는 위대한 영혼을 가진 시민들의 불꽃은 미래를 향해 더욱 거세게 타 올라야 한다.고대의 민주정의 이상이 오늘 우리의 정치적 광장에서 실현되고 있고, 정치적 문제들이 평등한 자들인 모든 시민에 의해 토론되고 논의되는 새로운 <광장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 바라는 국민이 주권자가 되는 민주적 삶의 정치 문화다. #무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