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근시’를 치유하는 한국미술사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존 카터 코벨 지음)

검토 완료

양훈도(brock3334)등록 2008.06.21 00:36

 글쓴이 양훈도

 

 1907년 일본 궁내부 대신 다나카 미쓰아키가 조선에 왔다. 대한제국 왕실 혼인가례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나카는 다른 흑심을 품고 있었다. 개풍군 부소산 자락에 방치된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일본 자기 집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다나카는 어느 조선 대신에게 이 탑에 매료되었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선 대신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탐나신다면 가지고 가시지요.” 오호 통재라!

  존 카터 코벨이 쓰고 김유경이 편역한『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을 몇 쪽 넘기지도 않았는데 저 일화가 떠올랐다. 10년 쯤 전에 읽은『조선미의 탐구자들』(한영대 지음, 박경희 옮김, 학고재)에 소개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인상깊이 남은 대목이다. 가지고 가시지요? 아무리 망해가는 나라라고 해도 일국의 대신이 자기 나라 문화재에 어찌 저토록 무심할 수 있단 말인가. 하도 기가 막혀 그동안 몇 차례나 이런 저런 글에서 인용하고 통탄하고 분개했더랬다. 그런데 코벨 박사의 글은 이렇게 묻는 듯했다. 그러는 너는?

  정신이 번쩍 든다. 그리고 부끄럽다. 심상훈이라고 알려진 저 대한제국 말기의 대신과 나는 무엇이 다른가. 시공간의 격차가 없지는 않겠으나, 사실(史實)에 무지하고 보물을 알아보지 못하는 까막눈이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2002년 일본에 갔을 때 교토에서, 나라에서 재일교포 가이드가 열심히 들려주던 한일 문화재의 역사를 귓등으로 흘려듣지 않았던가.

  내가 미술사학 전문가가 아니라는 변명을 앞세워 보지만 부끄러움을 완전히 누그러뜨리기 힘들다. 천박한 민족주의에 휘둘려 일본을 욕하고, 얕은 역사지식에 기대어 수준 높은 문명전수자 삼국시대 조상을 자랑스러워하기는 했으되, 단 한 가지 진실이라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보려고 애써 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더구나 이 책에 묶인 코벨 박사의 글들은 이미 80년대에 경향신문 등의 지면에 발표되었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제대로 규탄하려면 오래 전에 이 글들 가운데 몇 편이라도 찾아봤어야 하지 않을까. 서양미술사에는 콤플렉스를 느껴 이 책 저 책 들춰보면서 정작 제 문화의 고갱이에는 무심했던 시간들이 새삼 후회스럽다.

  그러나 이제와 미술사학을 새로이 시작할 처지는 아니므로 나로서는 코벨 같은 조선미의 탐구자들이 고심하여 밝혀낸 한국미술사의 진실을 눈동냥 하는 수밖에 없다. 정말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한국미술사학을 하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코벨은 이 책에 묶인 글 곳곳에서 한국미술사의 숙제를 푸는 일에 미온적인 한국학자들을 꼬집는다. 몇 곳만 인용하자.

 

  …심지어는 불교를 해설하면서도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것이고 비슷한 수많은 예들이 영문 일본미술사 책에 흔히 보인다. 일본어로 된 책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일본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역사왜곡을 통렬히 비판하면서도 미술사 항목에 관한 비판은 없다. (155쪽, ‘교토, 핵폭탄을 피하다’ 중에서)

  …『일본서기』에 한국인이 처음으로 일본에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드는 정원 개념의 조경을 해주었음이 명시돼 있는데도 한국학자들이 이를 나 몰라라 하는 태도는 기이한 것이다. (180쪽, ‘양산보의 소쇄원과 센리큐의 초암다실’ 중에서)

  …그리스인들은 자기네 조각예술이 브리티시(대영)박물관이란 데 가 있다는 사실에 대단히 분개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수천, 수만의 한국 고미술품이 일본 내 박물관, 절, 개인 소장으로 흩어져 가 있는 데도 그리스인들만큼 분개하는 기색이 없다. (339쪽, ‘한국미술사 영문판 나와야’ 중에서)

 

  

  코벨은 이런 일화도 소개한다. 교토 다이도쿠지 삼문에 있는 16나한상이 고려시대 목조각임을 알아보고 서울에 돌아와 한국에서 존경받는 서울대의 미술사 교수에게 그 이야기를 했는데, 금세 면박을 당했다고 한다. “당신네 말을 누가 믿어요. 그걸 어떻게 증명한단 말입니까. 다이도쿠지의 관계자들도 모른다면서 그게 어디서 온 건지 당신들이 어떻게 알아내겠습니까?”(305~306쪽) 이런 태도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고질적 식민사관? 면피성 실증주의? 코벨은 이렇게 명토박는다. ‘한국의 어떤 원로 미술사학자는 고대에 일본이 매우 열등한 섬나라였다는 사실을 주장해서 일본의 기분을 다치게 하는 일을 겁낸다.’(336쪽)

  앞서 고백했듯이 나는 미술사학자가 아니므로 코벨이 이런 글들을 쓴 이래 한국미술사학계가 얼마나 진전을 이루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코벨이 이미 1985년에 완성한 영문판 초고가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한국학계는 여전히 게으른 듯하다. 나아가 코벨이 주로 80년대에 쓴 글들이 이제야 책으로 묶여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미술사에 여전히 큰 구멍이 뚫려 있다는 증거다. 코벨이 일본 안팎의 반발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지적했던 진실들이 제대로 정리되었다면 이런 편역본이 이 시점에서 다시 출판되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코벨은 1978년 한국에 온 이래 1천4백여 편의 글을 썼다고 한다.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를 정리해서 엮은 책이다. 편역자(김유경)가 시대순으로 배열하고 다듬었기 때문에 한국 무속과 일본 신토의 관계를 다룬 제 1장에서부터 백제의 불교전파와 아스카 불교문화(2장), 백제미술의 보고, 호류지(3장), 정원예술의 일본전래 등을 다룬 꽃피어난 문화(4장), 고려불화가 한국에서는 사라졌으나 일본에서 재발견되는 과정(5장), 일본으로 간 조선화가들(6장), 15세기 교토의 한국센터 역할을 한 다이도쿠지(7장)를 거쳐 한국예술을 어떻게 되살릴까를 다룬 제8장에 이르기까지 무리 없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대중매체에 쓴 글이기 때문에 같은 출판사(글을 읽다)에서 2006년 늦가을 출판한『부여기마족과 왜』에 비해 읽는 부담이 덜하다.

  코벨의 추산으로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품은 무려 10만점에 이른다. 그 역사는 대략 세 단계로 추정된다. 우선, 부여기마족이 원시 상태의 왜를 정복한 이래 형의 나라였던 백제가 끊임없이 선진문물을 전수했던 시기가 첫 번째에 해당한다. 특히 백제가 망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후손들이 전해준 불교 관련 건축 조각 등은 일본 문명을 여러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두 번째 물결은 고려 말 혼란기에 이루어진 왜구의 대대적인 약탈을 통해 이루어졌다. 게다가 조선의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수많은 불교화가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들이 자랑해 마지않는 선(禪) 수묵화를 발전시켰다. 마지막으로 임진왜란과 구한말-일제시대에 이루어진 문화재 약탈이다. 코벨은 미술품만이 아니라 다양한 선진 문화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수되었음을 날카로운 안목으로 꼭꼭 짚어낸다.

  진부한 비유지만 문화는 흐르는 물과 같다.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고, 작은 웅덩이라도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또한 문화는 몸속의 수분과 같아서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무의식의 영역에서 쉼 없는 사회적 생명활동을 가능하게 해 준다.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독특하게 자신의 것으로 변형 발전시킨 한반도문화는 지난 5000년간 끊임없이 일본으로 흘렀다. 오늘의 일본문화는 그 문화를 요람으로 성장했다. 그 방향이 역전된 역사는 고작 100여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오늘날 일본인들은 자신들 문화의 자궁을 부정한다. 더 한심한 인물들은 식민지근대화론 따위를 들먹이는 ‘역사 근시’ 한국인들이다. 코벨은 그 허위와 위선을 폭로하며 오금을 박는다. ‘그 나라의 예술은 가장 믿을 수 있는 그 나라의 역사이다.’(239쪽)  

  그러나 코벨이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한국 미술이 일본에라도 보존되어 다행’이라는 논리는 심정적으로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는 고려불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그나마 일본으로 건너가 보물로서 애지중지 간수되었기에 반짝이는 문화의 화석이 된 게 아니냐는 것이 코벨의 주장이다. 한반도에서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고 기후와 미술품을 다루는 방식 등이 달랐기에 그렇게라도 반출(약탈?)되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 했느냐는 그녀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괜히 한번 어깃장을 놓아보고 싶어지는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과연 그럴까요, 코벨 할머니? 야만적으로 약탈당하지만 않았다면 그걸 더 고이 간직할 눈 밝은 이가 한반도에는 없었을까요?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할 역사의식을 미술사학의 단일관점으로 환원하거나 단순화시키는 논리는 아닐까요?

  하지만 괜한 투정일 뿐이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탐나면 가져가시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대신과 코벨이 벌써 20년도 전에 뼈아픈 지적을 해 주었음에도 변변한 학술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한국학자들과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작품을 한 점이라도 되사올 궁리는커녕 돈독이 올라 ‘행복한 눈물’에 급급한 한국미술판을 생각하면 코벨 할머니의 지적은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다. 과거가 어땠는지에 관심도 없으면서 과거는 덮어두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역설하는 지도자가 그래서 나오는 것일 터이다.

  코벨 박사는 지난 1996년 타계했다. 이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미술을 진정으로 사랑한 듯하다. 그러나 편역자 서문을 보니 한국 정부는 이 분에게 그 흔한 문화훈장 하나 추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 앨런 코벨이 어머니 뒤를 이어 다이토쿠지 목조나한상을 연구하려 했지만 한국 정부는 이 역시 지원하지 않았다. 아니, 다른 것은 관두자. 코벨이 영문으로 쓴 책과 글만이라도 전부 번역해서 전집이라도 내도록 정부가 지원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본격적으로 일본 내 한국미술의 진실을 가리는 학자들이 이어지고, 나처럼 뒤늦게나마 감탄하고 반성하는 독자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염불소리가 방안에 울리면서 향로의 향불은 그림 속 새가 있는 숲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듯하고 먹이 보여주는 신미는 그 자체가 전부이자 선에서 말하는 무無와 그대로 합쳐지는 듯하다. 창세기 1장이 다시 펼쳐진 듯, 세상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바로 선禪의 현실적 깨달음이다. 형은 무형이 되고 형과 무형은 서로 관통한다.(310쪽, ‘새벽에 보는 다이토쿠지의 선화禪畵’ 중에서)

 

  코벨이 1985년 <코리아헤럴드>에 썼던 글이라고 한다. 깔끔하고 담백하면서도 통찰력 가득한 문장이다. 이 책에 묶인 글들은 이런 문장에 유머까지 곁들여져 복잡한 한일 고대사와 미술사의 숲을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다. 다만 문외한에게는 벅찬 용어들과 시대 맥락이 정리되거나 보충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컬러 도판도 잘 찍은 사진이어서인지 색상이 선명하고 쉽게 눈에 들어오지만 몇몇 사진은 크기가 더 컸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책장을 덮으려니 연초에 고운기 시인이 쓴『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가졌던 소망이 떠오른다. 아직도 가보지 못한 삼국유사의 현장들을 찬찬히 돌아볼 만큼만 여유 있는 한 해가 되도록 해 주소서! 이제는 거기에『일본에 남은 한국문화』의 현장에 다시 한 번 제대로 둘러보고 싶다는 희망을 추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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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1 00:42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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