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가 시작된 때부터 다른 일로 도심 외출을 하는 건 왠지 미안해진다. 집회에 참여한 적도 물론 있다. 하지만 시청이나 광화문에 영화를 보러 가거나 초대권이 생긴 '까르띠에 보석전'에 갈지 말지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다른 이들은...' 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순한 부채감 때문이다.하지만 지난 한 달간, 그리고 앞으로 두 달간은 영화를 볼 수 없는 스케쥴이라 큰 맘 먹고 명동에서 영화를 보았다. '밥 딜런의 생애를 그린 영화니까... ' 하고 자위하면서. 그리고 영화를 본 뒤 또 한 번 스스로 위안하면서 '이왕 나온 거니까' 하며 을지로 4가 냉면집으로 향했다. 그 냉면집은 얼마전 신문에서 꽤 정확하게 여겨지는 평가에서 냉면맛이 서울 제일로 나왔다. 명동에서 직장을 다녔으면서도 가보지 못했던 터라 더 아쉬운 마음에 시내 나들이를 할 때 꼭 한 번 가야겠다, 맘먹고 있었다. 1시경이었는데 홀에는 기다리는 이들이 30여명은 되었다. 그 자리에 있기가 약간 민망할 정도로 거의 대부분이 예순을 훌쩍 넘은 어르신들이다. 어르신들이 앉아 기다리시는 모습을 보자니 나도 저 나이가 되면 냉면 한 그릇 먹으러 오는게 하루의 가장 큰, 중요한 일과겠구나 하는 괜한 감상이 밀려와 갑자기 씁쓸해졌다. 노인들은 혼자서 혹은 친구들과 온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5-60 대로 보이는 딸들이 노부모를 모시고 오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 부모님께 할 수 있는 효도란 그저 더운 날 냉면 한 그릇 사드리는 것이 전부이겠거니, 또 그런 쓸쓸함도 들었다. 시간이 좀 지나니 기다리는 자리는 반 정도 비었다. 지금껏 앉을 자리는 계속 있었지만 어르신들이랑 나란히 앉아 있는게 좀 송구스런 생각도 들어 서서 기다렸는데 반나마 비어있는 터에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친구분들과 함께 온 할아버지 한 분이 내 옆 자리에 앉는다. 그러면서 들으라는 듯 크게 하는 말이 "육십 넘지 않은 사람들은 밖에서 기다려야 해"홀에 육십 넘지 않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리는 반 이상 비어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내게 그런 말을 한 걸까. 내 생각엔 노인들만 있는 자리에 젊은 여자가 있으면 '젊은 사람이 기특하게 옛날 입맛을 잘 아네. 내가 죽더라도 이 냉면집은 계속 이어갈 수 있겠구먼' 하는 생각이 들 것 같다. 그런데 대체 왜...친구들이 '사장'이라 부르는 그는 한 눈에 보기에도 우리나라 부유층으로 오랜기간 살아온 사람같아 보였다. 그런 그가 젊은 여자 옆에 나란히 앉아 냉면 한 그릇 먹기 위해 같이 기다리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 나와 똑같은 식당에서 똑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나빴던 것일까. 그 더운날 왜 나를 밖으로 내쫓고 싶었을까. 그의 특권의식, 선민의식, 기득권의식, 배타심에 증오가 느껴질 정도였다. 조선일보를 보던 그는 무슨 기사를 보았는지 대뜸 "이런 건 노무현이한테 갖다주어야해"라고 말한다. 화난 심정을 억누르며 기다리다가 차례가 되어 드디어 냉면 한 그릇을 먹게 됐다. 냉면은 최고라는 평가가 정확했다. 육수는 진했고 면은 적당하게 쫄깃했다. 고명으로 얹어진 오이 절임은 기분 좋게 살강거렸고 무우 절임과 배추 절임도 짜지 않으면서 냉면 안에서 잘 어우러지며 간을 맞춰준다. 지금까지 먹었던 냉면 중에서 최고였을 뿐더러 냉면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편인데도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들 중 최상급 수준에 속했다.냉면을 먹던 자리에서 정면에는 냉면집의 옥호와 함께 1946년 개업이라는 액자가 걸려있다. 45년 해방 이후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위해 이 집이 생겼겠거니 추측해본다. 그 오랜 역사와 모진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의 역정이 떠올라 아까 그 할아버지의 발언에 대해 나도 나이들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 하는 약간의 여유로움이 스며들었다. 맛있는 냉면 한 그릇으로 불쾌함을 잊자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나오는 길에 보니 냉면집 현관에 '이북도민일보'가 놓여져있다. 수구 꼴통 찌라시일 거라고 예상되었지만 단순 호기심과 집으로 가는 길 무료하게 가느니 읽어보자는 생각에 집어들었다. 역시 어찌도 그리 정확하게 친미, 반북 성향을 그리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는지. 한 개신교 목사는 칼럼에서 최근의 촛불집회를 두고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위해 혁명을 일으키셔야 할 일이라고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직언을 읽고 나니 불현듯 내가 먹은 냉면 한 그릇의 배경이 바로 그것이었나. 내가 혹시 이 찌라시를 만드는데 사용될 돈을 냉면값으로 지불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더없이 무참스러웠다. 마음 속으로 칭송해마지 않았던 냉면 맛이 갑자기 사라지며 집으로 조용히 돌아갈 걸, 하는 후회까지 들었다. 내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그 할아버지의 발언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발언은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에서 개인간에 감정을 상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었는지 모른다는 비약아닌 비약에로 옮아갔다. 그의 가치관, 그와 같은 이들의 가치관이 그저 그러한 상황에서 발화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건 촛불집회가 일어나는 광장을 봉쇄하고 탄압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생각들이 그대로 일상적인 차원에서 별 일 아닌 것처럼 이뤄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촛불을 지키고자 대응해야 하는 많은 일들은 바로 이렇게 일상에 스민 보수를 섬세하게 느끼고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몸이 오싹해졌다. 시원한 냉면을 먹은 후라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덧붙이는 글 <촛불에 맞선 보수진영 대반격, 어떻게 볼까> 제안 기사에 응모합니다. 만약 편집부에서 적합치 못하다고 판단되시면 사는 이야기의 개별 기사로 실어주셔도 좋습니다. #냉면 #촛불집회 #조선일보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