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논쟁: 변화만이 능사는 아니다.

어느 보수주의자가 오창은 연구원의 주장에 반박하며

검토 완료

김준회(kjunhoy)등록 2008.07.02 15:27

 

 

필자가 읽기로, 오창은 연구원의 주장은 ‘대의 민주주의의 기존 패러다임을 깨더라고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새로운 틀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일견 파격적이면서도 매력적이다.

 

헌데, 다시 곱씹어보면 그의 주장에서 진보의 가장 매력적인, 그러나 가장 취약한 맹점이 노출된다.

 

'변화!'.

 

좋은 것이지만, 대안 없이 그저 감성적으로 추구하게 되면, 거기서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점의 카오스적 소용돌이에 민중은 더욱더 고통 받게 될 뿐이며,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그 종착역 또한 희망적인 것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구한말, 수많은 선각자연 자처하는 자들의 주장이 그랬을 것이고, 해방이후 좌우로 갈라져 대안 없이 싸움질 하던 우리사회가 그러하였다.

 

이천년 전의 정치학을 담은 맹자집주에는 ‘권형(權衡)’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저울추(‘權’)와 저울대(‘衡’)를 일컫는 말이다. 현상의 경중과 치우침을 엄밀히 살핀 이후에야 비로소 ‘변화’의 가치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변화(變化)’라는 현상에는 항상 양면성이 존재한다. 더 좋아지는 면이 있는가 하면 그에 상응하는 만큼 더욱 나빠지는 면이 있는 것이다. 보수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상 중에 ‘발전’이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형국의 변화, 또 다른 형태의 균형만이 존재할 뿐이다. 질량보존의 법칙만큼이나 현상보존의 법칙은 우리 사회를 실존적으로 지배한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유행은 아무리 맹렬하게 위세를 떨쳐도 시간이 지나면 마치 하루살이의 삶과 같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그 어떤 이론도 쉽게 고전(클래식)으로 성립되기 어려운 것 또한 역사가 가르쳐주는 엄정한 진리이다. 그것이 바로 (최첨단 운운하는) 오늘날에도 이천년 전 공맹과 희랍사상이 이 시대에 종종 해답을 던져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오 창은 연구원은 마치 ‘보수’가 혁신되어야 할 낡은 틀로 인식하는 듯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일부 한국의 수구적 보수는 혁파되어야 할 것임에 틀림이 없는 대상이다. 그러나 <진정한 보수>는 ‘변화에는 항상 장단의 양면성이 있으므로 그 장단점을 면밀하게 살펴 시대정신을 크게 훼손하지 않을 때만이 변화를 용인하는 신중함’을 일컫는 말이다. 공자가 말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옛 것을 제대로 익히고 나서(溫故)'야 비로소 '새로운 현상의 원리와 양면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知新)'는, 바로 현상의 양면성내지는 역사의 반복성을 설파한 지.극.히. .보.수.적.인. .언.어.임을 상기시킨다.그러한 측면에서, 기존 과격진보주의자들에게 묻는다.'변화이후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새로운 국면을 대처할 수 있는 대비책이 검증은 커녕,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 교수의 대의민주주의라는 대안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그저 철없는 어린아이의 호기로 새로운 것에 대한 막연한 희망만을 품는 것이 옳은 것인가?'보수적 관점에서 한국사회를 돌아보면, 우리의 비극은 ‘(특별히 보수진영에는) 원로가 없다’는 데에 있다. 정말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무거운 소리를 사회에 던져줄 수 있는 그런 존경받는 원로를 말하는 것이다. 비록, 당신들의 생각은 진보 또는 보수에 속하지만, 편협한 이득에 치우치지 않고 불편부당함을 거부하며 살아왔던 그런 분들을 말하는 것이다. 필자는 최장집 교수를 진보로 분류하기 보다는, 우리사회에 드문 보수원로로 본다(일례로 최 교수가 옹호하는 '제도권적 대의민주주의'라는 측면이 그러하다. 헌데, 본문에서 제도권을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오 연구원의 주장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면 납득키 어려운 점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한 측면에서 최장집 교수의 무거운 목소리는 변화의 장점만을 맹신하는 일부 맹렬 진보들에게는 부댖김이 되는 것이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각설하고, 최 교수를 서구민주주의의 신봉자로 매도하는 오 연구원의 주장을 한번더 메타적으로 곱씹어 보자면, 오 연구원은 오히려 최 교수의 주장보다도 어쩌면 더 서구적인 단점을 지닌 주장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서구인들의 속성으로 치부되는 유목민 속성^^ 그저 버리고 떠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대의민주주의는 그동안의 역사에서 오랜 기간 검증받아왔다. 물론 그것이 우리에게 유일한 정답일수는 없으나, 근대이후 우리사회의 지향점은 대의민주주의였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직접민주주의의 필요성이나 역할을 완전히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용측면에서 엄청난 단점을 가지는 것이기에 최소화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일례로 최근 불과 1년여 남은 임기의 교육감 선출에 (참여조차 저조한)선거비용으로 (국민의 혈세로 조성되는)수백억 원씩의 비용을 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을 상기해보면 좋을 듯하다. 이 또한 현상의 양면성에서 대두되는 이야기이다.

 

최근, 누군가 이런 식이라면 5년간 촛불이 꺼지지 않을 거란 말을 한다.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헌데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희망이 없다면, 그 어떤 정권하에서도 우리사회에서 직접민주주의를 향한 촛불집회는 끝날 날이 없을 것이라는 명약관화한 결론을 얻게 된다. 어느 정권이든, 어느 정책이든 그 반대편에는 항상 또 다른 소수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걸음 물러서 생각해 볼 때이다. 세상 만물은 모두 봄여름가을겨울을 가진다. 태어남이 있으니 죽음이 존재하는 것이고, 만생명이 스러지는 모진 겨울이 있기에 찬란한 봄날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사회가 안은 절대절명의 난제는 바로 민초들이 촛불을 들어야 하는 불행한 일이 없는 올바른 대의민주주의를 성립하는 일이 될 것이다.

2008.07.02 15:32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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