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남쪽 일부지역의 우익가족(특히 경찰가족)과 좌익가족(특히 빨찌산 가족) 들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怨讐가 되었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낮에는 좌익가족들이, 인공기가 휘날리는 밤에는 우익가족들이, 굴비 두룸 엮듯 끌려와 죽창竹槍에 피를 쏟으며 한恨 많은 생을 마쳤다.
아수라阿修羅의 지옥도地獄圖 풍경이 대부분은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지아비가 아들이 경찰(우익)이라는 이유 하나로, 빨찌산(좌익)이라는 이유 하나로 벌어진 것이라는데 미치면 참담해진다.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서 평생을 두고 지울 수 없는 원한을 지니고 한 생을 살아야 했던 세대에게 좌익과 우익의 구분은 단순한 이념의 대립이 아니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지옥의 개념이었다. 광기의 시대에 좌․우익의 편 가르기는 모든 것에 우선한 비극이었다.
좌․우익의 편 가르기로부터 반세기가 지나고 일갑자가 가까워 온다. 이제 좌左도 우右도 눈물 뜨거운 조국의 역사로 보듬고, 선대의 한 많은 죽음에 대해 단장의 진혼곡을 봉헌하고 있다. 레테의 강(망각의 강) 저 너머, 이승에서 절을 하는 후세들을 바라보며 역사를 용서해 주실까.
2008년 6월, 천만뜻밖에도 야만의 시대에 죽창으로 무장했던 편 가르기가 촛불 너머 어둠속에서 음습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상대적으로 사회변동에 온건한 지롱드당이 의회의 오른쪽에, 급진적인 자코뱅당이 의회의 왼쪽 부문에 위치한데서 유래한 좌익과 우익은 망각의 강을 넘어 21세기에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대한민국의 주류언론이라고 자부하는 조중동의 지면을 통해서 되살아난 것이다. 6월의 조중동 지면을 보면 대한민국은 〈진보〉와 〈보수〉가 전쟁을 치르는 형국이다. 수백만 촛불 중 폭력은 미미하건만 「진보의 촛불폭력」과 특수임무수행자회, 고엽제회원, 뉴라이트 연합 등 「보수」와 대비하여 편 가르기를 하고 있었다.
'오도된 민심으로 수도 한 복판이 밤마다 시위대에 의해 마비되어 무법천지가 연출되는 전대미문의 불행한 사태`-동아일보 7월 3일 A27쪽
조중동 3대 메이저 언론들은 촛불에 대해 위와 같은 입장아래서 〈진보〉와 〈보수〉로 편을 갈랐다. 진보는 좌익이며 보수는 우익으로 규정한다. 소위 진보 좌익의 수백만 촛불인파가 달빛이라면, 보수 우익은 반딧불같이 가냘프고 미미한 집회임에도 조중동에서는 전국이 진보와 보수가 똑 같은 세력으로 충돌하는 모양새로 그리기 바빴다. 그 결과일까. 유모차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는 아기도, 국가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불법시위자가 되고 말았다.
오늘의 이명박정부 탄생에 주류언론이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수백만 촛불의 바다를 일부문인 진보의 한 모습으로, 불법으로, 규정하며 편 가르기를 하면서 정부를 옹호하는 논조를 보고 있노라면 반세기 너머 죽창을 보는 것처럼 섬뜩하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미국과, 보수당과 노동당의 영국 등 선진국을 예로 들며 건전한 편 가르기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강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조중동의 편 가르기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적 사고가 아닌 죽창의 시대처럼 살벌하다. 네티즌들의 광고 방해 행동과, 자사가 촛불시민들의 직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도를 넘었다.
조중동이 미워 마지않는 「잃어버린 10년」의 세월 속에서도 이렇게 편 가르기를 한 적은 없었다. 설령 장삼이사의 필부들이 아귀다툼을 하고 싸워도 이를 말리고 화합하도록 해야 할 책무를 지닌 지도층과 주류언론들이 되려 편을 가르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촛불에서 밝혀진 조직들의 면면이 진보적이라 해서 촛불이 진보 좌익이라는 사고는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아래의 사례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민주당 워크숍에서 중앙일보 모부장이 강연을 하는데 「�잃어버린 10년」을 애기하며 경제성장이 정지했다고 하자 의원들이 반박을 했던 모양이다. 지난 10년동안 OECD국가중 상위의 경제 성장을 이뤘다고 수치를 대며 반박을 하니 왈,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사실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데 있다. 그 결과 당신들이 정권을 잃지 않았느냐.”고 역공했다 한다.
세계 언론사言論史를 보면 진실을 밝히려다 목숨을 잃은 숱한 언론인들을 목격할 수 있다. 중앙일보 부장의 친절한 해석에 따르면 진실을 위해 죽어간 언론인들이 어리석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 진실이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버릴꼬. 사실보다 표현이 더 중요한 것을.
메이저신문 부장의 해석 때문에 조중동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촛불의 폭력은 국가정체성과 국법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인 반면 뉴라이트 또는 고엽제 전우회, 특수임무수행자회의 폭력은 사실일지라도 사실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으므로 국법질서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물며 국법질서를 파괴하고 있는 촛불에 대항하고 있음에랴. (현장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기에 기자의 본 뜻을 필자가 잘못 이해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촛불에 대한 보도태도를 보면 오해가 아닌 듯하다.)
촛불이라는 민심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 보면 촛불보다 더 깊은 심연이 있다. 아무리 먹거리 문제라 할지라도 유모차를 끌고 집회에 참석하는 젊은 엄마들의 모습은 보통 일이 아니다. 나라의 대표적 종교단체들이 이렇게 한목소리를 내며 나서는 일 또한 흔치 않는 일이다. 수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범상치 않는 일 일진데 이 모든 것이 조중동에게는 진보 좌익의 미미한 한 모습일 뿐이다. 설혹 한 개의 촛불일지라도 그 속에서 민심을 탐색하는 것이 언론의 본 모습일 수도 있는데 저 헤아릴 수 없는 촛불의 염원과 진정성도 보수의 대척점에 있는 진보의 한 모습으로 보는 배짱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독재사회가 아니기에 다양성이 존재하고, 따라서 하나로 모이기 위해서는 이를 조정하고 통합하는 시스템이 존재하는데 언론의 주요한 역할의 하나가 바로 여론수렴을 통한 조정과 통합의 기능일 것이다.
허나 조중동을 보면 촛불이라는 불법에 대하여 국가권력의 힘으로 쓸어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다. 조정과 통합의 중재자여야 할 언론이 보수라는 이념의 죽창을 들고 진보의 대척점에 서서 죽자사자 싸우고 있는 형용이다.(부탁하건데 진보세력들이 먼저 도발했다는 치졸한 변명은 삼가주기 바란다.) 촛불의 진실을 진보라는 뚱딴지같은 외모로 둔갑시키는 것도 모자라 심판을 보는 체하다 느닷없이 선수로 직접 뛰어드는 어처구니없는 짓은 왜 저지르는 것인지.
기억하는가. 반세기 전, 죽창竹槍의 참상을.
야만의 시대, 날 세운 죽창에 사랑하는 가족의 심장을 꿰인 이들의 원한을 우리는 이해한다. 그리고 눈물로 진혼한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죽창의 분열을 되살리기를 원하는가?
대한민국의 소위 주류언론들이여! 더 이상 편을 가르지 말라.
약자와 정의의 편을 들라.
진실만을 애기해서 진정으로 사랑받는 언론이 되어 달라.
2008.07.09 09:11 |
ⓒ 2008 OhmyNews |
|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