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상흔이 배어 있는 곳- 거문도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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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희(peace708)등록 2008.08.27 20:18
     <  아픈 역사의 상흔이 어린 곳- 거문도를 가다 >

한창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에 열을 올리던 구한말 고종 2년인 1985년 4월 15일, 영국 군함 6척과 상선 2척인 이 땀 남해의 한 절해고도에 조용히 닻을 내렸다.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다는 명분 아닌 명분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땅의 주인인 조선 정부엔 일언반구 사전 협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후 그 섬 이름은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이름인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으로 버젓이 영국 군항의 자격으로 세계 해도에 등재됐다. 그 아린 장구한 세월이 장장 22개월이나 지속됐다. 그러나 당시 최초 보고를 받은 조선정부는 이 섬 위치가 어딘지 몰라 허둥댔고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갈팡질팡 속수무책이었다. 겨우 찾아낸 해법이란 것이 러시아와 청국에 탄원을 넣어 외세의 의한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 문제를 부시 미 대통령과 협의했다는데 한 세기 전 거문도 사건이 문득 반면교사로 떠올려지는 건 왜일까? 그런데 만약 이러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영국 군함이 힘의 논리에 의해 거문도 철수를 완강히 거부했다면 현재 거문도의 지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허락되지 않는다지만 이런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정말 끔찍하다. 최근 불거진 독도문제에서 일본이 유리한 근거로 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 중 한반도 영토조항에서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국경도서로 문서화했음을 지적했는데 여기에 굳이 거문도가 당당(?)하게 명시된 슬픈 곡절이다.

거문도는 남해안과 제주도의 중간쯤에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작은 군도로 여수로부터 약 117Km, 뱃길로는 2시간 남짓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보통 전남 여수항과 녹동항에서 출항하는데 성수기인 7~8월엔 부정기선을 포함, 하루 3~4회 쾌속정이 수 많은 관광객들을 실어 나른다. 한편 거문도를 가기 위해선 수 많은 남해의 다도해를 헤쳐나가야 하는데 오후 햇빛에 어른거리는 다도해의 풍경이 가히 선경이라 불릴만하다. 먹물 튄 크고 작은 까만 점들이 스스로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무단히 반복하기를 한 식경쯤 어느 순간 일제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길 얼마 후 일순 망망대해에 몇 개의 까만 점들이 나타난다. 여객선은 이웃 초도와 손죽도를 경유 비로소 거문도로 미끄러지듯 접어든다. 보통 거문도는 동도(東島)와 서도(西島) 그리고 그 가운데에 가부좌를 틀어 앉은 듯한 고도(孤島)를 함께 아우르는 말이다. 그래서 예전에 삼산도(三山島)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군함의 무단점령 이후 이를 타개하기 위해 파견된 청나라 이홍장이 이곳의 한 유생과의 필담을 주고받은 후 이 유생의 학식이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 이후로 이 섬을 거문도로 고쳐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그 불리는 이름에서부터 역사의 상흔이 깊게 배어 있는 셈이다. 

언뜻 거문도의 생김새는 거대한 만(灣) 구조를 하고 있다. 동도와 서도가 나란히 바람막이를 자처 외풍을 막는 형태로 그 안쪽은 잔잔한 호수처럼 천연의 요새를 품었다. 그 만(灣)의 넓이가 자그마치 1백만 평에 이른다. 1878년 일찍이 이곳 거문도를 정탐한 영국 실비아호 선장은 이곳을 세세히 둘러보고 감탄하며 해군기지로 손색이 없음을 보고하고 영구히 영국령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매력이 있는 만큼 약소국가로서의 역사적 부침을 면치 못했음은 자명한 일이다. 일제시대 땐 일본군을 위한 병참기지 역할을 감당해야 했고 거기에 맞는 각종 왜인 시설이 들어찼다. 당시 왜인을 위한 수 많은 유곽과 상점이 즐비했다고 한다. 지금도 각종 신사(神祠)터를 비롯 여러 비문 등 그때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직도 일부에서 이 거문도를 왜도(倭島)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듣기에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다.
  
일단 거문도를 찾았다면 여행의 순례자로서 반드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있다. 거문도 등대와 관백정이 여기에 해당된다. 특히 거문도 등대는 일본이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1905년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남해안 등대로 유명하다. 서도 남쪽 끝, 천길 벼랑 위에 세워진 이 등대로 가기 위해선 우선 고도와 서도를 연결된 삼산리 대교를 가로질러 수월산(128m)으로 가야 한다. 약 2km 해안을 따라 개설 되어 있는 도로를 따라 걷노라면 곧 울창한 동백수림이 반긴다. 한낮에도 8월의 뙈양볕이 무색할 정도다. 그러길 20여분, 일순 광대한 시야가 뜨이며 놀라운 장관이 연출된다. 건너편 지척이 수월산인 데 그것으로 가는 길이 아슬아슬하다. 이름하여 “목넘어”다. 파도가 드세면 섬으로 변해 결코 건너갈 수 없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실낱 같은 “목넘어”를 넘으니 또 다시 환상의 동백숲길이다. 수월산을 빙 두른 그 숲길만 약 3km에 이른다. 결코 길지도 짧지도 않은 호젓한 길로 곳곳에 설치된 전망포인트에 감탄을 연발 하다 보면 어느새 발길은 등대 앞에서 멎는다. 지난 2005년 등대 점화 100주년을 기념으로 신축한 등대와 예전의 등대가 나란히 어깨를 같이하고 있다. 34m높이의 신등대를 올라 아스라한 남해를 맘껏 감상하는 것도 권장할 만하지만 아무래도 발걸음은 거문도 제 1경이자 백미라 일컫는 관백정을 먼저 향한다. 등대를 끼고 돌기를 잠깐 문득 천길 벼랑에 기겁할 때 바투 다가와 올라서기를 강요하는 것이 바로 기립한 관백정이다. 수직고도 67m가 넘는 물리적인 위압이 아니더라도 사방을 둘러 어디 한 곳 발 재길 틈이 없다. 오금이 저리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이는 말일까?

무릇 섬 기행에 있어 뭐니뭐니해도 여행의 백미는 산행에 있다. 멀리 가물거리는 수평선을 굽이마다 숨바꼭질 하듯 끼고 돌며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스릴을 제대로 느끼려면 아무래도 섬 속 산행이 제격이다. 마침 거문도엔 안성맞춤 산들이 여럿 있다. 서도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수월산(128m)을 2시간 여정으로 한 바퀴 도는 것도 좋겠고 서도 북쪽에 있는 음달산 (237m)을 기점으로 녹산무인등대까지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목넘어” 에서 시작되는 불탄산(198m)만은 빠뜨리지 않기를 권한다. 그만큼 볼거리도 풍성할 뿐만 아니라 이 섬에 깃든 아픈 역사도 얼핏 맛볼 수 있다. 먼저 “목넘어”를 올라서면 바로 보로봉(17m)이다. 해발고도래야 고작 170m 내외라지만 그 높이에 비해 그 잡히는 산은 매우 거친 편이다. 땀방울을 훔칠 때쯤 오른 보로봉에서의 탁 트인 조망은 평생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감동이다. 동,서도는 물론이거니와 멀리 초도, 손죽도도 가물거린다. 도솔천이 따로 있을 것인가? 보로봉을 뒤로하고 10여분 지나면 느닷없이 기립한 선바위가 나타난다. 그 날 선 것이 여차하면 베일듯하다. 그리고 바다와 나란히 어깨를 걸며 누워있는 바위능선 기와몰랑은 예전 일본군들이 엄폐물로 활용하던 산성과 같은 바위길이다. 그 역사의 아릿한 아픔만 아니었다면 기와몰랑을 걷는 그 쾌감은 그 어디에 비길 것이 없을 것이다. 이윽고 오른 불탄봉(195m)은 이름과 달리 수풀에 가려져 언뜻 퇴색해 보인다. 불이 하도 자주 나서 불탄봉이라니...... 약간 어이없는 웃음이 머금는다. 하여튼 불탄봉 코스는 3시간 여정이면 둘러 볼 수 있겠다.

많은 관광객들이 불원천리 거문도를 찾는 이유는 단연코 하나다. 그 하나의 이유란 다름 아닌 “백도(白島)”에 있다. 백도는 거문도에서 약 28km 떨어진 38개의 무인도로 상백도와 하백도로 이루어져 군도다. 광대한 바다 한 가운데에 외롭게 홀로 떨어진 그 혹독한 자연적 조건으로 그 생김새와 형상이 기기묘묘해 흡사 해상 만물상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백도에 매료되어 토해놓는 사람들의 탄성소리에 파도조차 잦아든다고 한다. 서방바위와 각시바위, 매바위와 곰바위, 부처바위와 삼선암, 그리고 도끼바위까지 그 세세히   이 땅을 안고 사는 민초들의 고달픈 삶과 애환, 그리고 희망 등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비록 이번에 파도가 유난해 백도의 서쪽 한 귀퉁이만 간신히 보고 왔지만 그것만으로도 백도의 명성은 과히 과장된 것이 아니란 것을 확신한다. 만약 거문도가 역사의 높은 파고와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면 오늘의 이 경탄과 탄성도 그렇게 절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득 짧은 상상이었지만 일순 정신이 아찔하다.

망망대해 속 부초처럼 외로이 떠 있는 섬은 얼핏 고립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연상된다. 외부와 차단되어 고립된 곳. 그래서 소통의 부재와 완강한 고집으로 고독이 묻어나는 곳. 만약 이런 고립 속 고독에 온전히 삶을 맡긴다면 육지 속에서 안락한 삶을 살아온 우리에겐 그만 질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망망대해 속, 점점이 붙박인 섬들은 고립이나 외로움 그리고 그로 인한 좌절이 아닌 또 다른 희망의 이름에 오히려 가깝다. 왜냐하면 태고 때부터 뱃사람 들에겐 반드시 돌아와 닻을 내려야 하는 쉼터이자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바다가 정처 없는 삶의 노정이라면 바다 속에 홀로 우뚝 선 뭍 섬들은 우리들이 반드시 돌아와야 하는 삶의 목표가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삶의 목표가 있다는 것이 또한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만약 이런 삶의 회귀가 불가능하다면 우리들의 삶이란 또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한 세기 전 그 어지럽던 구한말시대, 거문도가 끝내 외세를 이겨내고 우리 곁에 이렇게 남게 된 소중한 이유를 오늘에서야 절절히 느낀다.

  한철희(han0226@hanmail.net)  010-9577-0530
덧붙이는 글 이번 독도문제나 이어도 논란 같은 것을 보면서 백 년 전 참담했던 과거를 떠오르는 것이 나뿐일까요? 하여 마침 거문도를 다녀오면서 그 씁쓸함을 담았습니다. 처음 오마이뉴스에 기고하는데 방법을 몰라 서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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