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경제학 ④ ; 인간의 본성이란? 문명의 미래는?
* 개신교 목사인 장경동의 “스님들은 예수 믿어야 한다”거나 “불교 들어간 나라는 다 못 산다”는 등의 망언을 듣고서 이건 기생하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암세포’구나 하는 생각이다. 대한민국 개신교의 현 수준과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마침내 일개 경찰국가로 전락한 대한민국의 작금 현실…, 일찍이 나치정권에 의해 본훼퍼 목사와 함께 집단수용소에 수감됐던 독일 신학자이자 목사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oeller)가 자신이 겪었던 체험을 진솔하게 담아낸 시, “다음은 우리 차례다”를 생각나게 한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내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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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복종’ 실험이다. ‘문명’ 사회의 인간과 문명 이전 ‘자연’ 상태의 원숭이 중에서 과연 누가 더 지배자의 ‘비윤리적’ 명령에 쉽게 굴종할까.
그가 1961년 미국 예일대학 재직시절 실시한 실험으로 20~50대의 실험 참가자들에게 칸막이 유리 건너편의 피실험자가 문제를 하나씩 틀릴 때마다 전기고문 강도를 단계적으로 높일 것을 주문한다. 처음엔 15볼트로 시작하나 최종적으로는 450볼트의 치사적인 전압이다. (주최 측은 실험 참가자 몰래 피실험자에게 ‘연기’를 부탁한다.)
놀랍게도, 실험 참가자의 2/3에 해당하는 26명이 ‘자발적으로’ 450볼트의 전기 고문을 불사한다. 실험주최 측은 당초 0.1%(0.4명)만이 최악의 고문을 가할 걸로 예측했었다. “더 이상은 못 하겠다”며 중도 포기했던, 나머지 1/3 의 사람들도 만약 권력이 이를 강요했다면 끝까지 ‘비인간적’ 횡포에 저항할 수 있었을까.
다른 한편, 원숭이에게는 복종할 경우 음식이 주어지는 게임으로 이어진다. 사람들과는 달리, 붉은털원숭이는 같은 종도 아니고 다른 종의 인간임에도 15일 동안 버튼을 누르지 않았고, 15일 동안 꼼짝없이 굶어야만 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고문, 타인의 고통을 하찮게 생각하는 행위가 오히려‘인간적’이고, 타 생명체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동화시키는 고결한 행위는 ‘원숭이적’모습이란 말인가.
문명사회의 인간 종이 갖는 악(惡)의 ‘평범성’ 문제다. 17세기의 계몽사상가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문명의 희망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실험 결과는 고작 4.5 달러의 이득 앞에서 산산조각 날 만큼 자유의지가 허약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핑계거리, 실험 참가자들 모두가 “시켜서 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 2차 대전 중 유대인 대량학살에 앞장섰던 나치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정 대답 또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거다.
인간 종의 문명, 여자의 출산 고통으로부터 비롯된다. 오늘 지구상에 번식하는 수백만 동물 종 가운데 오로지 사람만이 어미가 새끼를 출산하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지금부터 15만 년 전 동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에 최초 인류(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했던 당시에 이미 인간의 뇌 용량, 곧 두개골 부피는 원숭이 시절보다 3배 정도(1,375 입방 센티미터)로 급속 팽창된 상태였다.
여성의 골반 또한 머리가 엄청 커진 아이를 낳기 위해 대대적인 진화적 변화가 일어났지만, 미처 다 따라잡지는 못하게 된다. 문명 이후 비록 시대별로 체형 및 체중 등은 크게 달라졌지만, ‘비너스’의 허리와 엉덩이 간 매력적인 비율이 일관되게 0.7로 나타났던 건, 바로 순산과 다출산의 미학(美學)에 다름 아니다.
신화모음집 구약성서의 이야기다. 아담과 이브는 지혜의 나무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다. 사촌 형제인 침팬지를 포함한 동물세계와의 영원한 결별을 의미하며, 이후 아담은 땀 흘리며 밭을 가는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이브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아야 할 운명에 처했다는 것이다. 신화는 언제나 그럴싸하다.
인간 종의 또 다른 특징, 전체 수명에서 유년기가 차지하는 비율이 다른 어떤 종보다 길다는 점이다. 다른 영장류와도 달리, 어미만이 아니라 아비도 함께 새끼 양육을 공동 분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인간 종 특유의 진화적 요인으로 생각된다.
인간 뇌의 정보량 자체가 대략 2,000만 권의 책 더미를 쌓을 수 있는 대형 도서관으로, 이는 소위 ‘유전자 도서관’의 수만 배다. 선악과를 이미 맛본 인간은 중추신경계에 사전 내장된(pre-wired) 유전정보보다는 사후 학습 등으로 대뇌피질에 새겨 넣은, 출생 후 획득한 비유전적 학습 정보에 주로 의존하여 생활하게 된다.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한 논어의 한 구절이다. “타고날 때는 모든 사람이 비슷하지만 배워가면서 서로 멀어진다.”(性相近也, 習相遠也) 가르침과 배움의 상호의존적 ‘모순’이라고나 할까. 이를 문명 이전 삶과 문명 이후 삶을 가르는 뜻으로도 새겨본다.
인간의 ‘유전자적’ 본성은 문명의 전후를 불문하고 무국가, 무소유, 무종교다. 이와 함께 문명과 진화의 비가역성(非可逆性)이 실존적 한계로서 부과될 따름이다.
문명 이전 인류는 50~100명 남짓의 소규모 혈연집단을 이뤄 무리생활을 영위하여 왔다. 서로들 뻔히 알고지내는 처지이기에 공동으로 생산하여 공동으로 분배 및 소비한다는, 경제사회사의 소위 ‘원시공산체’ 가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문명의 여명이 채 동트기 전, 뗀석기 시대의 모습이다.
대략 1만 년 전쯤의 간석기 시대부터 문명은 4대강 유역을 중심으로 본격 시작된다. 농경목축생활이 수렵채취생활을 대체하면서 종래의 혈연관계를 훨씬 뛰어넘어 소위 ‘국가’라는 이름의 커다란 사회가 형성될 기반이 마련되고, 일종의 사회적 약속으로서 서로 안면을 모르는 사람들을 실효성 있게 규율할 수 있는 각종 사회규범들이 나타난다.
최소 수백만 년 단위의 ‘진화적 시간’ 기준에서 보면, 인류 문명의 시작을 1만 년 전 농경목축 생활부터 치건 아니면 최초로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했던 15만 년 전의 뗀석기시대부터 계산하건, 인간 종에 유전학적으로 유의미한 어떤 진화적 변화가 일어나기엔 모두 턱없이 짧은 기간이다.
사실, 현대인은 뇌의 용량이나 뇌에 각종 ‘모듈’로 장착된 기본 프로그램 등 지능(IQ) 자체가 생물학적으로 신석기시대 인은 물론이고 구석기시대 인과도 전혀 다를 바 없다.
원시인들의 호기심이나 지적욕구 자체가 오늘의 우리들과 거의 질적 차이가 없으며, 단지 문명과 역사의 각 단계가 부과하는 현실적 조건만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변의 온갖 사물들을 다신교적 애니미즘으로 이해했던 거고, 오늘의 서양문명은 온갖 신들을 통틀어 유일무이의 ‘절대인격신’으로 압축시킨, 순전히 정도의 차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문명과 진화의 ‘비가역성’, 인간 종은 일단 무국가, 무소유, 무종교의 동물세계를 떠난 이상 다시는 이에 원상 복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계몽사상가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불평의 여지를 주지 않고 부자들의 지위를 박탈할 수 있는 수단은 무력뿐”이라면서 국가 이전의 상태, 곧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절규하나, 이는 전혀 현실성이 없는 당위로 그치고 만다.
선사 한용운의 지혜다. 일제치하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무한 공격하던 ‘사대’좌파 선동가들에 대해 “소련에서마저 종교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 못하고 벌이는 망동”이라고 일갈한다.
국가와 사적소유와 종교, 아직까진 인류문명 최고의 걸작들이다. 다만 그 ‘부산물’(副産物)로서 억압, 착취, 증오 등 프로그램 간 상충이 여전히 빚어지고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의 집중공격을 받는 ‘제도’로서의 국가는 문명 이후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 사용하는 유일무이의 사회적 기구로 공인된 상태다.
하지만, 일찍이 1894년 일제가 조선의 독립과 내정개혁을 내걸고 청일전쟁을 도발했듯, 오늘 미국은 이라크 민주주의와 이라크인 해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소위 ‘이라크 해방 작전’(Operation Iraqui Freedom)이란 이름의 폭력과 억압을 행사 중이다.
이 틈을 타 러시아는 지난 200년 이상 탄압해 온 체첸민족의 독립의지를 무자비한 대량학살로 또다시 좌절시켰고, 아직 주변부의 중국조차 1950년 티베트 병합 이후 꺼질 줄 모르는 독립요구를 계속 유혈 진압 중이다. 혹여 티베트가 천우신조로 독립한다면, 다수 중국인들 입에선 그간 일본 우파들의 억지처럼 티베트 식민화는 근대화를 위한 선물이었다는 주장이 분명 터져 나올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인간 종은 부의 균등한 분배, 비교적 불평등의 수준이 낮은 집단에서 살아가도록 진화생물학적으로 적응된 상태다. 유전자가 두뇌에 새겨놓은 건 개체의 생명이나 유전자 단위의 ‘생존 및 번식’을 위한 이기심 정도,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개체나 다른 유전자들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이기심의 다른 이름은 협동이다. 소위 ‘사유재산권’ 개념의 철학적 기초를 닦아 근대를 조형했던 존 로크 사상의 중심적 의미가 그러했고, 최초의 경제학자 이전에 윤리학자였던 아담스미스가 의미했던 각인의 소위 ‘이기심’의 뜻 또한 그러했다.
오늘의 사이비 과학, ‘신자유주의’(=신제국주의)가 주장하는 착취와 탐욕의 ‘사적소유’ 그리고 이에서 비롯되는 ‘죽고살기’식 경쟁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관념이며 행태다. 인류 문명과 역사가 쌓아올린 업적 자체를 송두리째 배신하는 짓이다.
유사 이래 모든 종교는 자비나 사랑을 명분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내 편을 사랑하기는 쉬운 일이다. ‘사랑’을 내걸고서 그간 내 편과 네 편을 끊임없이 갈라 왔던 3대 종교는 바로 한 뿌리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다. 오죽하면 루소는 기독교를 두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하고 절대자에 식민화시키는 ‘노예종교’라고 하였겠는가.
이들 서구 종교들, 그나마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이젠 적어도 ‘체계적’ 틀은 갖춘 셈이다. 체계적 미신과 비체계적 미신의 차이? 세계적인 석학 도킨스(Richard Dawkins)의 표현을 빌리면, 아프리카 문명 등 타자(他者)의 ‘하늘 나는 빗자루 마녀’이야기 등은 미신일 뿐이나, 그보다 더 비과학적이고 더 비현실적인 ‘동정녀’나 ‘아비 없이 태어난 자식’ 이야기 등은 이른바‘신비’로 일컬어진다는 것이다.
문명 이래 부자(지배자)가 항상 빈자(피지배자)에 기생하여 왔다. 오늘의 자본주의 역사과정에서 자본은 노동에 일방 기생한다.
크게 보면, 자연생태계의 모습 또한 이에 유사하다. 동물들은 궁극적으로 식물이 합성해서 저장한 탄수화물을 훔쳐 먹으며 기생한다. 문명이 출현시킨 농사 또한 식물의 광합성 작용을 활용해서 태양광선의 에너지를 조직적으로 추수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약육강식’의 시장논리가 인간 본성과 자연법칙에 부합된다고! 거짓말이다. ‘종 내’ 적자생존 개념을 ‘다른 종 간’ 약육강식으로 슬쩍 바꿔치기하는 수법이다. 약육강식은 오직 다른 종들 간에 발생하는 일이며, 같은 종 내에선 ‘이기’적 경쟁은 치열할지언정 무한 탐욕의 약육강식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계의 진실은 이와는 반대로,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에 초식동물은 식물들에 기생해서만 번성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 역은 절대 아니다. 식물들은 동물 없이도, 초식동물은 육식동물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먹을 식물이 없다면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물고기들이 자신들보다 먼저 육지를 점령한 식물들을 따라 육지로 올라왔겠는가.
인간의 경제생태계가 또한 그러하다. 노동은 자본 없이 살 수 있지만, 자본은 노동 없이 결코 살 수 없다. 자본주의 역사 자체가 영국의 농민추방 ‘엔클로져’ 운동에서 시작되었으며, 자본의 탐욕 달성은 노동자가 존재할 때 비로소 가능하지, 그 역은 절대로 아니다.
오늘의 세계를 ‘약육강식’의 모습으로 조형한 서구문명의 정체성이다. 정치적으로 억압과 지배의 ‘제국주의’와 경제사회적으로 탐욕과 수탈의 ‘자본주의’, 그리고 종교‧문화적으로 증오와 독선의 ‘기독교’를 합쳐놓은 소위 ‘3위1체’의 세상이다.
18세기 자유주의(=제국주의) 시절, 스펜서(Herbert Spencer) 등 사회다윈주의자들은 멋대로 다윈의 진화이론을 도용해서 탐욕과 착취가 적자생존의 자연선택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20세기 초 나치는 한걸음 더 나아가 당시 미국조차 부러워마지 않던 인종차별의 ‘우생’(優生) 정책을 정당화시키며 2차 세계대전 중 수백만 명의 유대인 등을 학살한다.
21세기의 오늘, 이들은 다시금 신자유주의(=신제국주의)로 ‘부활’하여 약육강식의 무한경쟁 담론과 이를 담아내는 시장근본주의 논리를 도처에서 설파하고, 비롯되는 경제적 불평등과 온갖 탐욕을 ‘상식’과 ‘담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키고 있다.
결론적으로, 문명은 오늘에도 인간 본성을 왜곡 억압하고 있으나, 문명 본래의 도정은 인간 본성을 고양(高揚)시키고자 함이다.
현대문명이 빚는 악의 평범성 문제. 인간복종 실험이 오늘 2008년 대한민국에 던지는 교훈이다. 한명의 경찰이 미치는 건 개인적 문제에 불과하나, 경찰 총수가 미쳐 날뛰는 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헌법을 파괴하는 극악 범죄다.
지휘관이 이성을 잃어버리고, 적군 공격(전경의 본래 임무) 대신 시민들을 적군 삼아 공격명령을 내리면, 경찰조직 전체를 혼선에 빠뜨리고 민주국가의 치안 자체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짓이다. 심지어 30년 전 독재자 박정희의 수사, 이른바 ‘반체제 세력’을 함부로 운운한다.
그러함에도, 악의 평범성을 압도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고양시키는 선의 평범성! 바로 오늘의 촛불들이다. 문명의 위대함이며 우리 인류가 진보를 낙관하고 확신하는 근거다. 그간의 인적 청산 없던 민주화가 한갓 신기루였음을 이젠 충분히 배운 만큼, 장차 반드시 응징시켜야 할 무리들을 우리 반드시 기억해주자!
진보의 역사 자체가 선(善)의 평범성이 악의 평범성을 끊임없이 극복해내는 과정이다. 여기저기 쏟아지는 무수한 영웅들을 존경과 사랑으로 지켜보면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명 앞에 오늘 우리가 쉽게 화를 내거나 성급해야 할 하등의 이유는 전혀 없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하여!
민주주의가 선도하는 건강한 자본주의 건설을 위하여!
2008. 8. 28(목) 오용석 / 개방과 통합 (연) 소장
덧붙이는 글 | 인터넷 매체 <대자보>에 연재중인 글입니다.
2008.08.29 1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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