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関東(관동)지방의 9월은 85년 전에 일어난 조선인 학살사건의 희생들을 추모하는 日本.在日의 시민단체들이 준비한 17개 지역의 크고 작은 추모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8월 9일 在日本韓國YMCA에서 개최되었던 “関東大震災 85周年 朝鮮人犧牲者 追悼 심포지엄”에 한국과 일본 그리고 재일의 학자, 시민운동가 등 관계자 300여명이 강당을 가득 메우고 10:00~17:00까지 진행되었다.
▲ 조선인희생자 추도심포지엄이 열린 在日本韓國YMCA ⓒ 김종수
▲ 행사장을 가득 메운 한.日.在日 시민들 ⓒ 김종수
이날 발표자로는 서굉일 교수(한신대 국사학과), 야마다쇼지 명예교수(立敎大學名譽敎授), 강덕상 명예교수(滋賀県立大學名譽敎授), 금병동교수(朝鮮大學圖書館元副館長)로 나섰다. 발표내용은 서굉일 교수는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과 3.1운동과의 관계성을 그리고 야마다쇼지 교수는 “조선인학살의 역사적 의미와 국가책임문제”, 그리고 강덕상 교수는 “일본정부의 계엄령이 미친 조선인 학살의 영향”을 발표하였다.
이 날 행사는 在日本韓人歷史資料館을 비롯하여 조선대학교, NPO법인고려박물관, NPO법인 아힘나피스빌더스 등 46개의 日本, 在日 단체가 뜻과 자금을 모아 행사를 조직하였고, 일본의 민단과 총련도 이 행사를 지원하였다.
“関東大震災 85周年 심포지엄 실행위원회”는 참가자 일동으로 발표한 성명서에 , “일본정부는 85년 동안이나 조선(한국)인 학살사건의 진상을 은폐해 온 태도를 반성하고, 학살사건의 진상조사와 희생자에 대한 사죄를 할 것을 요청하며, 대한민국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도 이 사건의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일본정부에 강력히 촉구할 것을 기대한다”고 발표하였다.
1923년 9월 1일, 당시 일본 정부는 관동대진재의 혼란을 틈타 날조된 유언비어로 언론보도지침으로 내려 보내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고는 이어서 계엄령을 포고한 후 대대적으로 조선인학살을 저질렀다. 학살의 원인은 치안에 대한 두려움으로 미리 불씨의 원인을 제거하자는데 있었다. 즉, 1919년 3.1 항일만세에서 보여준 조선민중들의 독립을 향한 의지와 그 후 중국∙일본으로 번져가는 해방투쟁의 열기가 그 하나요, 재일조선인 사회주의자∙노동자 그리고 일본의 사회주의자∙노동자 간의 연대지향의 움직임이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는 대진재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신문 등을 통해 퍼뜨리고 이를 빌미로 계엄령을 포고한 후, 군대과 경찰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까지 동원하여 조직한 자경단 등을 총동원하여 6천여 명의 조선인을 학살하였던 것이다.
▲ 관동대진재 당시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자경단 ⓒ 김종수
그러나 조선인의 폭동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관동대진재 당시 조선인에 의한 ‘범행’에 관한 기록을 보면 ‘방화’, ‘강도’, ‘강간’,‘살인’ 등의 발생건수는 각각 1~2건에 불과하고, 사건의 용의자는 이름도 없고 소재지도 기록되지 않아 이 자료는 신빙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일부터 뿌려진 지방신문의 헤드라인에는 “위기를 맞은 도쿄,총살당한 불령선인 이미 수백에 달해”,”400명의 불령선인 무리, 군대와 충돌”,”불령선인 2000명 무리지어 발전소 습격 및 폭행”,”보병대와 전투개시, 잇단 증원대 파견” 등등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일본의 치안당국은 사건의 조작과 의혹을 증폭시키는 유언비어를 보도지침으로 만들어 각 신문사에 배포하고 조선인 학살을 유도하였던 것이다.
▲ 일본 치안당국은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각 신문사로 보냈다. ⓒ 김종수
▲ 신문을 통해 사실처럼 보도된 유언비어로 일본민중들은 조선인에 대한 분노가 점점 커져갔다. ⓒ 김종수
해방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조사되기 시작한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연구의 결론은 “일본 치안당국에 의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국가범죄”라는 것이다. (강덕상,야마다쇼지,금병동) 그러나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기 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진상조사와 사죄를 표하는 일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오히려 사건을 왜곡하고 은폐하여 책임을 면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더욱 은밀하고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는 오히려 이 학살사건의 책임은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던 조선인들의 “흉포성과 반사회성”에 있다고 뒤집어 씌었다. 그리고는 전세계적으로 이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막아내기 위하여 일본 경시청은 조선인희생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극력 방해하였고, 유가족들의 시신 인도요구조차 거부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재난으로 사망한 일본인들과 함께 화장하고 그 유골을 섞어버렸다.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저질렀던 일본 정부의 조선인 대학살사건에 대하여 해방 이후 한국정부는 사건 발생 85년, 해방 후 63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정부는 일본의 책임을 물은 적이 없으며, 진상조사를 위한 자료요구조차 해 보지 않았다.
이에 한일관련 NGO단체들은 향 후 関東조선인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국회가 나서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국에서는 오는 9월 7일 오후 3시부터 「 関東大震災 조선인학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韓∙日∙在日 시민연대」가 주최하는 “1923년 関東지역 조선인희생자 추도식”이 서울 향린교회에서 열린다. 이 날 행사에는 1923년 당시 일가친척 5명 중 4명이 관동대진재 당시 학살당했던 그 유가족의 증언이 있을 예정이며, 관동대진재 다큐멘터리도 상영될 예정이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