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경쟁사회는 자살을 권장한다.

안재환의 죽음과 경쟁사회의 모순.

검토 완료

주광재(sbadco)등록 2008.09.09 14:36

인기 연기자 안재환씨가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경찰은 안씨가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가 널리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에 국민적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최근 여러가지 실패를 맛보고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하지만 보통사람의 경우 그리 관심조차 끌지 못한다. 널리 알려진 연예인의 허망한 죽음을 계기로 우리사회의 아슬아슬한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경쟁과 효율성은 필요하다.

 

현대사회는 대단히 복잡다단하다. 대체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 뚜렷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같다. 특히 과거 복지사회를 지향하던 많은 선진국들이 전세계적 경쟁을 이겨내기 위해서 복지를 축소하고 자국내 경쟁요소를 확대하고 있다. 유럽의 전형적인 복지국가들도 최근 그런 경향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워낙 높은 수준의 복지를 구축해둔 덕에 여전히 상대적으로 복지가 잘 갖춰진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의 경우도 레이건의 집권기를 기준으로 복지를 대폭축소하고 효율성을 높이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그리 높지 않은 임금을 받고 노동을 하는 것보다 실업수당을 받고 집에서 노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히 복지를 축소하고 그런 사람들이 없어졌을 것이라는 점은 사실일 것이다. 특히 미국의 복지는 유럽의 선진국들과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다.

 

세금을 줄이고 복지를 축소하면 좋아지는 점이 많다. 게으르고 나태한 자발적 실직자를 막을 수 있다. 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효율성이 큰 폭으로 높아질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각 개인들이 발전하고 그에 따라서 사회도 발전할 것이다. 경제성장률은 높아지고 실업률은 낮아진다. 또 더욱 좁아진 글로벌 경제환경에서 다른 나라와의 비교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쟁과 효율성은 비약적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

 

효율성이 높은 사회에서 구성원은 행복할까?

 

얼핏 생각하기에 효율성이 높아서 경제성장률이 견조한 사회가 좀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처럼 여겨진다. 사회적 파이가 커지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나눠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진 게 별로 없는 사회에서 서로 공평하게 나눈들 각자의 몫은 그리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인당 년간 국민소득이 1,000불도 안되는 나라의 국민이 60,000불에 달하는 나라의 국민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미국의 국민보다 방글라데시의 국민이 훨씬 행복하게 살고 있다니 이해하기 어렵다. 또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한국이 자살률에 있어서 유럽의 복지국가들에 비하여 훨씬 높은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확실히 물적 성장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각 개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경쟁하고, 경쟁에서의 승자는 많은 것을 얻으며, 패자는 모두 상실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효율성을 높인다. 하지만 그렇게 쉴 새없이 경쟁하는 과정에서 패자는 물론 승자조차 행복하지 못하다.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경쟁속에 버둥거리며 사는 것이 행복할 수는 없다.

 

따라서 경쟁과 효율추구는 구성원의 행복과 상당부분 교환이 일어나게 된다. 경쟁이 심화되면 효율성이 높아지나 반대로 구성원의 행복지수는 낮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경쟁을 상당수준 제한하여 구성원의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결국 과도한 경쟁일변도의 사회도, 극단적인 경쟁배제의 사회도 아닌 어느 지점에 정답이 있다. 효율성과 형평성의 무차별 곡선을 그려놓고 교차하는 지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어느 지점이 적정할까?

 

가장 최적인 지점을 정확히 찾아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각기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혹자는 스웨덴과 같은 복지국가가 정답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혹자는 미국과 같은 신자유주의를 옳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재산이 많거나 소득이 높은 사람들은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원할 것이고, 재산이 없거나 소득이 낮은 사람들은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원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둘 다 정답은 아니다. 아니 정답은 아예 찾을 수 없는 이상향에 불과하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적절한 절충안이 적정한 답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과도한 복지로 경제활력을 잃어가던 스웨덴이 감세와 복지를 축소하였다. 무려 65%에 달하던 소득세를 낮추고 복지를 일부 축소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나라에 비하여 복지가 과도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국민에게 국가가 제공해야할 복지의 적정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장기실업에 직면해도 노숙자로 전락하거나 자살하게 되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몸이 아파서 일을 하지 못해도 치료를 받고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돈을 벌지 못해도 정부의 도움으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 일할 능력을 상실하면 정부가 굶어죽지 않을 수준의 연금은 제공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이 정도를 과도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최소한의 보살핌이 있는 국가라면 성실히 일해서 세금내고 봉사할 가치가 있는 나라일 것이다. 그 것을 위해서는 소득이 높은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야한다. 당장은 무척 불만일 것이나 자신들이 어려움에 빠질 경우나 은퇴후를 생각하면 그리 아까울 것은 없다. 국가가 최소한의 보호를 해주는데 경쟁에서 낙오했다고 삶을 포기할 이유는 사라질 것이다. 국가의 의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 의무조차 못하는 국가는 국민의 충성을 요구할 수 없다.

 

정답은 없지만 적정한 답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과도한 경쟁속에 사람들이 도태되고 죽어나가는 것은 안된다. 복지의 혜택이 과도하여 구성원의 모럴해저드를 부추기는 수준도 안된다. 풍족한 삶을 살려면 열심히 노력해서 벌어야 하고, 최소한의 삶은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영위될 수 있는 수준이 적당하다. 대단히 넓은 범위에 적정해가 분포한다. 그렇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은 정적해의 범위를 이미 벗어났다.

 

국가주도적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경쟁의 장려는 피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워낙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분배의 정의를 논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경쟁이 독려되면서 단기간에 빠른 성장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어쩌면 정상적인 과정으로 이러한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다른 선진국들이 이미 국민소득 5,000불 수준에서 분배의 정의를 생각하였던 것에 비추어 지금 우리는 너무 진도를 많이 나갔다. 이미 외환위기 이전에 일인당 년간 국민소득 10,000달러에 도달하였다. 그런데도 세계화라는 미명아래 분배라는 용어는 금기처럼 여겨졌다. 너무 늦었음에도 너무 이르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외환위기를 겪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국가가 최소한의 보호도 해주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자 사람들은 자살을 하거나 삶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고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국민의 정부가 처음으로 사회안전망의 개념을 적용하려 시도한 때이다. 문제는 그 수준이 너무나 열악하여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여전히 한쪽으로는 경쟁의 극단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참여정부의 경우도 그렇다. 집권초기 국회에서는 법인세를 인하했다. 법인세와 소득세는 그 이후로도 몇차례 인하가 단행되었다. 당연히 그 인하분만큼 복지예산의 확충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한미FTA를 추진하면서 경쟁과 그로 인한 양극화의 폐해를 막을 방법이 별로 없었다. 대책을 마련하기 전에 먼저 추진한 것이니 수순이 틀렸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며 감세와 복지축소는 속도를 더하고 있다. 효율성의 제고를 목적한만큼 달성할 것이지도 의문이거니와 형평성이 깨지는 것에 아무런 대책도 내놓고 있지 못하다. 이렇게 해서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는 국가의 기본책무를 더더욱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느낄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한 새끼를 죽도록 방치하는 사자같은 정부가 될 것이다.

 

우리사회는 이미 적정해를 벗어나있다. 경쟁이 과도한 수준이다. 그 것을 지금 더욱 가속화시킨들 효율성이 커질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이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할 때가 되었다. 경쟁에서 밀려난 개인이 국가의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서서 재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

 

더 이상의 불행한 죽음은 막아야한다.

 

비정하고 냉혹한 경쟁사회는 구성원을 사지로 몰아간다. 실패한 모든 사람이 다 자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각자의 할 탓으로 돌리고 방치할 일은 아니다. 과도한 경쟁은 결국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온다. 적정한 수준의 경쟁과 따스함이 흐르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세대의 책무이다. 적어도 국가가 생명을 보호해주는 나라를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

 

국민소득이 세계최고가 되더라도 구성원인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불행한 나라는 옳지 않다. 실패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냉혹한 사회가 지탱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더디 가더라도 가능한 다수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좋지 않겠는가? 우리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갈 이 땅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비정한 구조를 남겨둘 것인가?

 

민주주의를 하는 한 사회구조를 선택하는 것도 주권자의 손에 달렸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해서 후손들에게 살기좋은 나라를 물려줬으면 좋겠다. 더 이상은 경쟁에서 밀려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유명 연기자의 죽음만을 슬퍼할 일이 아니다. 이름도 없이 죽어가는 우리 이웃들도 똑 같이 귀중한 생명이 아닌가? 우리사회가 지향할 방향은 그들의 소중한 목숨을 국가가 지킬 수 있는 쪽이기를 바랄 뿐이다.

 

연기자 안재환씨의 명복을 빈다. 또 냉혹한 삶의 전장에서 패하여 삶을 저버린 수 많은 우리 이웃들의 명복을 빈다. 이제는 다시 그렇게 가슴아픈 죽음들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덧붙이는 글 | 노사모에 함께 올립니다.

2008.09.09 14:33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노사모에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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