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경제학⑤; ‘제논’의 역설과 ‘사이비경제학’의 억지
코페르니쿠스는 고대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자신보다 1,800년이나 앞서 ‘지동설’을 주장했음을 원래 원고에선 언급했지만 막상 책을 출간할 땐 빼버린다. 뉴턴은 케플러의 태양계 행성들 운행법칙에 근거하여 전우주적으로 통용되는 물리법칙, 곧 ‘만유인력 법칙’을 수학공식으로 이론화시켰음에도 자신의 걸작인 ‘프린키피아’에선 케플러에 진 빚을 전혀 언급치 않는다. 천재들의 엄청난 지적 용기에 따라붙는 고작 ‘옥에 티’ 정도일까.
어느 누구든 말로 또는 글로 표현하는 내용은 혼자 지어낸 게 아니라 전적으로 주변의 영향을 받아 자신도 모르는 새 만들어지는 것이다. 공자의 이야기, “길에서 듣고서는 그것을 그대로 길에서 말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일이다.”(道聽而塗說, 德之棄也) 남에게 듣고 배우거나 책에서 익힌 것을 먼저 자신 안에서 녹여내고서 이야기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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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엄청 세분화된 사회과학의 모습은 ‘부채’에다 비유하면 각각의 세부분과가 부챗살 하나하나에 해당한다. 부챗살들이 한데 모이는 아랫부분에 마음의 작용을 탐구하는 심리학 등 기초과학이 위치한다. 철학은 손잡이 격이다.
물론 각각을 세세하게 다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학자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전체’ 맥락 속에서 짚어낼 정도는 되어야 한다. 불행히도, 20세기의 ‘표준 사회과학 모형’ 등장 이후 사회과학은 기초학문과 거의 완벽히 절연된 상태고, 각 분과들조차 더욱 세분화된 결과 소위 전문가의 일이라는 게 ‘파편조각’ 하나를 붙들고 혼자서 끙끙거리는 모습이다.
경제학 등 사회과학들의 궁구 대상인 인간행동 근저에는, 그게 경제행위건 아니면 정치나 법률행위건, 심리 곧 뇌의 작용이 놓여 있다. 오늘의 진화심리학은 신경생리학이나 동물행동학 등 인접 과학의 도움을 얻어, 인간의 모든 행위는 마음의 작용이며, 마음(소프트웨어)과 이를 싣는 뇌(하드웨어)는 컴퓨터 비슷한 게 아니라 ‘컴퓨터 자체’라고 결론짓는다.
두뇌, 까마득한 옛날 진핵세포 및 다세포생물 단계를 거친 후로, 다시 수억 년에 걸쳐 적응된 진화의 위대한 산물이다. 소위 뉴런 및 시냅스 등 무수한 소립물질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종일 윙윙거린다. ‘뇌간’은 반사작용, 심장박동, 호흡 등 생명의 기본기능을 수행하고, 파충류 시기 발달된 ‘R-영역’은 충동, 공격, 세력 장악 등에, 포유류 시기 형성된 ‘변연계’는 모성 및 보살핌 등의 영역에서 그 쓰임새를 다한다.
인간의 마음(혹자는 ‘영혼’이라고 한다)이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모습. 오감 중 청각을 예로 들면, 입력장치인 귀가 외부 자극인 소리를 뇌로 전달하고, 대뇌피질의 좌반구는 ‘이성’적인 분석을 통해 합리적으로 인지하며 여기에 우반구가 갖는 ‘직관’적인 통찰이 합쳐져서 종합 판단이 내려진다. 그 결과 TV 볼륨 조절 등 흔히들 자신이 ‘원해서 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인 행동, 곧 반응으로 최종 출력된다.
특히 인간에게 엄청 발달된 ‘대뇌피질’의 기본 세팅은, 다소의 저장용량 편차 등을 빼면 하드웨어적 구조나 기본적인 운용프로그래밍에서 모두에게 동일하다. 인간 본성은 ‘무국가, 무소유, 무종교’의 자연 상태이며,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덕’등 규범은 진화적으로 보편타당한 근거를 갖는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인위’적으로 문명이란 허울을 둘러쓴 각종 ‘이데올로기’들이 덧칠되기 시작하고 집요하게 계속된다.
사회과학이나 종교를 포함해서 문명의 심연 밑바닥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온갖 이데올로기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백가쟁명’ 상황이다. 인간의 본성을 왜곡,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는 오늘까지 끈질긴 생명력을 도처에서 과시한다.
세계사적으로, 서구중심의 패권적 문명사조는 19세기의 자유주의, 20세기의 반공자유주의에 이어 21세기의 오늘 신자유주의(=신제국주의)라는 이름의 ‘제3차 쓰나미’로 전 세계를 덮치고 있다. 개체의 이기심을 개체 간의 ‘약육강식’ 무한경쟁으로 바꿔놓고서, 세계화, 선진화, 무역자유화, 자본자유화, 금융자유화, 노동유연화, 규제완화 등 온통 ‘당위’(Sollen)를 뜻하는, ‘화’자(-ization) 타령이다.
논리학의 불변의 진실은 어떠한 당위로부터도 사실(Sein)의 ‘명제’(statement)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서구문명의 탄생이후 원초적으로 안고 있던 ‘본말전도’의 치명적 결함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마침내 서구 패권문명의 말기적 현상을 보이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지켜본다.
지금부터 이천 수백 년 전 관념철학자 플라톤은 자연과학자인 데모크리토스의 책들을 모두 불태우게 한 후, 실재(實在)하는 사물들을 한갓 ‘그림자’로 취급하고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관념(觀念), 곧 ‘이데아’를 실재하는 걸로 바꿔치기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등 중세 신학은 플라톤에 기초하여 유일무이의 ‘인격신’을 만들어냈고, 근대 서구문명의 최대 업적이라 할 민주주의조차 가까이서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플라톤의 ‘철인독재’ 연장선상에서 소위 ‘전문가주의’나 ‘엘리트주의’로 정체되는 모습이, 특히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역력하다.
제국들의 패권적 세계질서에 순응하여, 오늘 대한민국의 역사 현장에서 스스로 ‘매국 본색’을 드러내는 ‘뉴 라이트’ 집단의 행색이 완연하다. 기관지격인 조중동은 지난날엔 독재 권력을 견제하는 ‘감시견’(watchdog)은커녕 고작 ‘애완견’ 노릇에 충실하더니만, 이젠 지배 권력의 ‘중추신경계’ 노릇을 감히 자임하고 나선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상 어느 매국노도 자신이 매국노임을 선언해놓고 사대 행위를 일삼진 않았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었던 개화파(=급진개방파) 두목들, 박영효나 이완용 등은 자신들의 행위가 “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 했으며, 해방 공간의 친일주구 노덕술 등은 열렬히 반공투사의 소임을 다하면서도 친일행적만은 적어도 숨기려는 염치는 가졌었다.
그런데 그 후예임을 자부하는 ‘뉴라이트’ 무리들, 후안무치하게 “일제의 조선 식민화가 근대화를 위한 선물”이라는 몽상의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정신질환 측면에선 거의 나치와 쌍벽을 이룰 만한 ‘쏘시오 패스’(sociopath) 집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 사람의 망상은 정신이상이나, 다수의 망상은 이데올로기 또는 절대종교로 일컫는다.
과거사 청산의 현실적 당위! 먼 과거의 일일수록 시간의 지렛대 길이가 그만큼 더 길어지기에 역사에 남기는 영향은 더욱 광범위해진다. 법적, 제도적 청산은 물론 최소한의 ‘인적 청산’이 반드시 요구되는 일이며, 이는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오늘과 내일의 역사를 힘차게 펼치기 위한 일종의 ‘장애물’ 치우기다.
소위 ‘제논’의 역설과 ‘사이비 경제학’의 억지, 둘 다 궤변이다. 다만, 전자는 전혀 무해한 형식 논리적 연습문제라면 후자는 사람들의 삶을 한없이 팍팍하게 하는 ‘백해무익’의 현실 자체라는 차이다.
먼저 제논의 역설. 아킬레스는 거북보다 10배 빨리 달리며, 거북보다 100미터 뒤에서 출발한다. 아킬레스가 100미터 달리니, 거북은 이제 10미터 앞에 있다. 10미터를 더 달리니 거북은 이제 1미터 앞에, 1미터를 더 달리니 거북은 이제 0.1미터 앞에 …. 그런 식으로 둘의 차이는 한없이 좁혀지나 계속 남게 되고 아킬레스는 끝내 거북을 따라잡지 못한다.
말장난이다. 처음부터 아킬레스가 따라잡을 수 없도록 암묵적 가정을 설정해놓은 거다. 그 결과 거북의 속도는 일정하지만 아킬레스의 속도는 점점 느려져 나중엔 사실 거북이보다 더 느려진다. 당연히 따라잡을 수 없다. (수학의 무한 등비급수 이론이다) 최소한 ‘노예제’ 시대의 그리스 자유인들은 실제 상황에서 아킬레스가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식의 엉터리 결론은 내리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가졌었다.
오늘 21세기의 궤변, 신자유주의(=신제국주의) 경제학에 에 직면하여 우리는 과연 그들만큼의 분별력을 갖고 이를 제대로 꿰뚫어 보기는 하는 것인가. 고전적인 플라톤식 수법으로 ‘실재’의 경제현실과 ‘관념’의 거짓허구를 바꿔치기한 사이비 경제학이다.
이론만을 따지면 오늘의 경제학은 여전히, 유전자가 기나긴 진화의 역사를 통해 우리 뇌 속 깊이 새겨 넣은 본성, 곧 생존과 번식의 이기심에 잘 부합되는 사회과학의 한 분과다. 경제학의 공리 자체가 인간의 욕망에 비해 자원은 유한하다는 ‘자원 희소성’이고, 이에서 파생되는 양대 정리가 바로 소비자(가계)의 효용 극대화 및 생산자(기업)의 이윤 극대화, 곧 경제주체 각자의 ‘이기심 극대화’ 논리다.
하지만, 일부는 뻔히 알면서도 나머지는 편협한 무지 탓으로, 다수 경제학자들은 ‘이기적 협동’의 경제학을 무한탐욕의 ‘약육강식’ 논리로 전복시킨다. 일찍이 중세 신학이 오랫동안 교회권력의 시녀 역할을 떠맡았고, 16~17세기 절대왕정 및 18~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법학 및 정치학이 그랬던 것처럼, 21세기 경제학은 앞장서서 소수 부자들과 현실권력의 주구 역할에 자족한다.
현실 경제에서 완전경쟁 따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칼 마르크스의 선구자적인 그러나 오늘 기준으로 ‘조악한’ 이론을 빌릴 필요도 없이, 근대경제학 자체가 초기 자본주의 단계의 가내수공업적 ‘매뉴팩처’가 아니라, 독과점 대기업이 현실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작금 상황에선 일상적으로‘경제적 착취’(economic exploitation)가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잘 설명해준다. 각자의 기여만큼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나눠야 하는 자본주의 판 <경제정의>조차 송두리째 짓밟히고 있는 현실이다.
(전문용어를 빌려 상품시장, 금융시장, 노동시장 중 노동시장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독과점 하에선 노동의 수요곡선 아닌 노동의 ‘한계생산물가치’ 곡선과 노동의 공급곡선이 상호 교차하는 지점에서 착취적 저임금과 과소 고용 등 오늘의 비참한 노동 현실이 결정된다. 어떤 종류의 시장에서건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된다.)
만약 문명과 인류를 위한 경제학의 사명이나 존재이유라는 게 있다면 현실의 경제사회적 병리 현상들을 앞장서 치유해서 진짜 시장원리, 곧 ‘경제정의’를 우뚝 세우는 일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허구의 ‘완전경쟁’ 논리와 이에 근거한 짝퉁 ‘시장원리’를 앵무새처럼 떠드는 판이니, 이런 식의 어용학자들을 싸잡아서 부자들과 현실 권력의 앞잡이 내지 ‘삐끼’ 집단으로 취급해도 그들로서 별로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만이 현실과 역사를 향도할 수 있다. 경제학(사이비가 아녀도) 등 사회과학은 물론 종교조차 사람들의 삶의 현실을 뒤쫓을 따름이며 잘해도 함께 나가는 정도지, 감히 국민대중과 인류문명을 교도한 권한은 어디서도 찾아낼 수 없다.
일상의 정치경제적 현안들, 중학 졸업 이상 정도면 누구든지 의견 개진이 가능하고 건전한 상식으로 충분히 판단 가능하다. 그걸 두고 돌리고 돌려 어렵게 만드는 게 고래로 허위 이데올로기의 상투수법이며, 바로 오늘의 사이비 과학과 사이비 종교가 그러하다.
조선일보는 이명박이 임명한 산업은행 총재 민유성과 함께 금융선진화 운운하며 미국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 인수를 최근 극구 주장하고서도, 세계금융위기의 와중에 막상 그 회사가 파산한 지금 국민들에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한 친구가 ‘균형감각’을 위해 일부러 조중동을 찾아본다기에 “만약 당신이 미디어 비평에 나설 작정이 아니라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답해줬는데, 그의 사고방식은 엉뚱한 방향으로 잘못 튀어나간 일종의 ‘결벽증세’가 아닌가 한다.
굳이 조중동을 보지 않아도 세상을 건강한 눈으로 바라봄에 필요한 정도의 ‘항체’는 도처에서 절로 형성될 만큼 감염된 현실이, 바로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2008. 9. 18. (목) 오용석 / (정책연) ‘개방과 통합’ 소장
덧붙이는 글 | 본고는 인터넷 매체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2008.09.18 1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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