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중)

[조선왕조실록 감성으로 읽기]

검토 완료

이윤우(adriane)등록 2008.11.09 17:32
태종의 후궁은 여섯?

1479년은 성종이 왕위에 오른지 10년이 되는 해였고, 7월이었다.
한달전 6월에 연산군의 어머니로 잘 알려져 있는 왕후 윤씨가 내쫓기고 난 후 논의되기 시작한 후궁선발에 관해 정윤정이 반대의 상소문을 올렸다.
정몽주의 증손이라는 그는 성종이 여색에 빠지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나라가 망할까 두렵다는 말까지 꺼내어 성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데,
성종(호색에 관해서는 누구못지 않은)은 자신에게 일찍 죽은 아들들이 많아 대비가 후궁을 뽑으라 명한것을 중지해달라 청하지 않았을 뿐,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변명하면서도 이제 중전도 없는 마당에 처녀를 뽑는게 뭐 어떻다는 것이냐며 반발한다.

이때 성종은 태종의 후궁은 여섯명이었고, 세종은 일곱, 문종은 다섯이었다는 말을 꺼내며
정윤정을 국문하라 명하는데.. 태종의 후궁 여섯이라..?
여섯, 생각보다 적은 수다. 세종의 일곱, 즉위한지 2년여만에 세상을 떠난 문종의 다섯을 따지면 더 그러한데 후궁 여섯으로는 나 호색이요. 라고 명함도 못내밀지경이니,
이게 어찌된걸까.

일단 성종이 말한 후궁 여섯의 성분을 파헤쳐보자.
물론, 쉽게 예상되듯 태종의 여자는 여섯이 아니었다. 여섯이라니, 고작!
성종이 말한 여섯은 빈의 작위를 받은 후궁들만 따졌기 때문에 그런 숫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인데, 실록의 기록을 뒤져보면 중전인 정비를 제외하고도 열일곱명의 여자가 나온다.
그나마 자식을 낳고 얘깃거리를 제공해서 실록에 기록된 여자들의 숫자만 (성이나 이름이 언급된) 그렇다는 얘기다.

그저 한두번 건드리고 말아, 자식도 낳지 못하고 깊은 궁 구석에서 늙어갔을 여자들의 정확지 않은 숫자를 대충 합쳐보거나 하지 않아도 열일곱의 수가 적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 중국 황제의 몇천명 후궁에 빗대어 보면 우스운 수준일 수도 있다. 너무 지금의 기준으로 당시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태종에게 호색이라 말한 사람이 이지직과 전가식만이 아니었다면 어떨까.
당시 사람이 심하다고 했다면, 당시의 기준으로 지나치다고 말했다면 그건 분명 믿음이 가는 얘기라 할만하지 않을까?

누가 이러한 사람이 있겠느냐

1412년, 그러니까 이지직과 전가식의 상소문 이후 10 년의 세월이 지난후였다.
태종은 세자와 종친, 그리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냇가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풍악이 울리고 술에 어느정도 취해 흥이 돋자, 칠성군 윤저에게 일어나 춤을 추게 하고는 자신의 과실에 대해 바른대로 말하라고 명한다.
이때 윤저는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후궁이 이미 족하며 반드시 많이 둘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꺼내는데, 그 말을 들은 태종은 화를 내기는 커녕 세자를 보며,

"이 사람은 태조를 따르면서부터 오늘에 이르렀고, 또 내 잠저 때에 서로 보호한 사람이다.
질박 정직하고 의를 좋아하는 것이 누가 이러한 사람이 있겠느냐?
너는 나이 어리니 마땅히 독실하게 믿고 공경하여 무겁게 여겨야 한다."

라고 까지 하면서 자신의 말을 윤저에게 내려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걸까.
윤저의 말은 이지직등의 것과 조금 포장만 다를 뿐 당신에게 여자가 많다. 라는 내용은 사실상 별로 다르지 않은것 같은데 누구는 평생을 고생하고, 누구는 말까지 하사 받다니.
태종의 말대로 왕이 되기 전부터 서로 '보호하던' 사이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10년의 세월동안 정말 윤저의 말대로 이미 족할정도로 후궁을 보았기 때문일까.

은밀한 힐난

태종이 윤저의 말을 듣고 그에게 말을 내려준 후 3년. 태종은 '민씨'가 자신의 아들 원윤 이비 모자를 사지로 몬것에 대한 죄를 묻겠다며 나섰다.
원윤 이비는 경녕군을 말하고, 그의 어머니라 함은 나중에 효빈이 되는 정비의 노비 출신이었던 김씨를 말하는데 '민씨'가 이비 모자를 죽이려 했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태종의 얘기를 한번 자세히 들어보자.

"임오년 여름 5월에 민씨의 집 종으로서 본래부터 궁에 들어온 자가 임신하여 3개월이 된 뒤에 나가서 밖에 머물고 있었는데, 민씨 가 행랑방에 두고 그 계집종 삼덕과 함께 있게 하였다. 그 해 12월에 이르러 해산할 달이 되어 이 달 13일 아침에 태동하여 배가 아프기
시작하였다. 삼덕이 민씨 에게 고하자, 민씨 가 문바깥 다듬잇돌 옆에 내다 두게 하였으니, 죽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 형으로 이름이 화상이라는 자가 불쌍히 여기어, 담에 서까래 두어 개를 걸치고 거적으로 덮어서 겨우 바람과 해를 가리웠다. 진시(오전 7-9시)에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의 원윤 이비 이다.
그날 민씨가 그 계집종 소장.금대 등을 시켜 부축하여 끌고 아이를 안고 숭교리 궁노인 벌개의 집 앞 토담집에 옮겨 두고, 또 사람을 시켜 화상이 가져온 금침과 요자리를 빼앗았다. 종 한상좌란 자가 있어 그 추위를 무릅쓰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어 말의 옷을 주어서 7일이 지나도 죽지 않았다. 민씨 가 또 그 아비와 화상 으로 하여금 데려다 소에 실어 교하의 집으로 보냈다. 바람과 추위의 핍박과 옮겨 다니는 괴로움으로 인하여 병을 얻고 또 유종이 났으니, 그 모자가 함께 산 것이 특별한 천행이었다. 내가 그 때에 알지 못하였다.
지금 내가 늙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태종은 이비가 태어났을 무렵의 일을 끄집어 내어 '민씨'의 죄를 물어야 겠다고 말하고 있다. 임오년은 태종이 말을 꺼낸 1415년으로부터 13년전인 1402년이었고, 태종은 자신이 그때에는 알지 못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태종이 말하는 '민씨' 란 누구를 말함일까. 정비는 이미 궁안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었을 때이니 정비를 꼬집어 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태종의 말 이후 조정의 신하들은 태종이 풀어놓은 얘기 그대로를 주워 담으며 정비의 동생들은 민무휼과 민무회의 죄를 청하고 있으니 민씨는 민무휼과 민무회등의 민씨 일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거다.

앞서 5년전에 역시 정비의 동생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이 자결을 명받고 죽었고, 민무휼과 민무회 또한 태종이 이비 모자를 죽이려 했던 죄를 묻겠다 나선 이후 한달여만에 자진했으니 태종이 이비 모자의 얘기를 꺼낸 의도는 이비 모자가 안쓰러워서가 아닌 민씨 형제들을 모두 없애버릴 빌미로 삼고자 하는 것이란 걸 의심할 여지는 없어 보이지만, 그 뿐만이 아니었다.

태종은 정비의 동생 넷을 모두 죽게했다. 그는 정비의 동생들이 역심을 품고 있다 몰았고, 정비에게는 불손하고 투기가 심하다고 윽박 질렀다.
이비 모자를 죽이려 했다는 '민씨'에는 정비의 형제들 뿐만이 아니라 정비 역시 포함되는 것이었다. 민씨 형제들에게는 자신의 여자와 아들을 죽이려 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웠다면 정비를 향한 것은 바로, 끔찍한 투기로 인해 첩과 그녀의 아이를 죽이고자 했던 잔인한 여자라는 '은밀한 힐난'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